오후 4시, 다오청에 도착했다. 숙소까지 거리는 약 2KM, 걷기로 했다. 터미널을 빠져나오자 일명 ‘빵차’라고 불리는 승합차 운전자들이 호객행위를 해댔다. 다오청에서 야딩까지는 차로 약 2시간, 그러나 대중교통이 없다. 그래서 ‘빵차’라는 것이 야딩으로 가는 사람들의 발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차는 최소한 몇 명의 사람이 모여 비용을 나누어 가는 것이 일반적인데, 비수기의 경우 사람이 모이지 않는다면 비용을 혼자 전부 지불해야 한다. 그래서 나는 걱정이 많았다. 나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사람들이 모인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서 빵차들의 호객을 무시하고 걸었다. 시내로 가는 길은 고즈넉하고 조용한 시골길이었다. 주인이 보이지 않는 소 무리가 줄지어 어디론가 유유히 걸었다. 목에는 저마다 종을 하나씩 달고 있어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딸랑딸랑’ 정겹게도 울렸다. 내가 가까이 가서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맨 앞에 있던 소가 멈췄다. 그리고 이내 뒤따라오던 소들도 모두 멈췄다. 나는 일단 사진을 한 방 찍고 소를 보고 물었다. “왜?”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저 물끄러미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큼지막하고 볼록하게 튀어나온 까만 두 눈동자는 순수했다. 나는 “미안”이라고 하고 가던 길을 그대로 떠났다. 그리고 뒤를 돌아보았는데 그제야 소들도 앞 소를 따라 다시 움직였다. 나는 한참을 걸어 시내에 도착했다. 다오청은 해발 3750M의 도시로, 야딩으로 가기 전 사람들은 이곳에서 고산을 적응한다. 나는 저지대에서 몇 KM씩 걸어댔지만, 고지대로 와서 고작 2KM 걷고 숨을 몹시도 헐떡였다. 이곳은 티베트인(장족)이 모여 사는 지역이라 그런지 지금까지 지나온 도시들과는 느낌이 확연히 달랐다. 알록달록하고 아기자기한 티베트 전통 가옥이 많이 보였다. 햇빛에 그을린 장족의 얼굴은 짙은 갈색을 띠었고, 겨울 고산지대의 추운 날씨라 다들 두껍고 어두운 색의 점퍼를 입고 있었다. 차림새가 매우 후줄근해서 도시민 전체가 노숙자인 듯한 느낌마저 들 정도였다. 그들은 눈에 띄게 다른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나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숙소를 찾아 정말 한참을 헤맸다. 말 한마디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정처 없이 방황하는 것은 가장 피해야 할 것 중 하나이다. 나는 지도가 가리키는 한 건물로 들어갔다. 첫눈에 봐도 숙소는 아니었지만 지도가 이곳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나는 안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내부를 서성이다 사무실로 보이는 공간에 들어가 한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키가 작고 왜소한 체격에 스포츠머리를 한 남자였다. 나는 핸드폰을 들이밀며 “여기가 게스트하우스 맞나요?”라고 물었다. 영어를 못하던 이 남자는 적극적으로, 정말 매우 적극적으로 나를 도와주려고 애썼다. 먼저 그는 핸드폰 번역기를 켜고 “이곳은 정부 건물이다”라고 대답을 해왔다. 나는 중국의 노숙자, 건달, 테러보다 두려운 것이 정부다. 중국을 떠나기 전까지 절대 엮이고 싶지 않은 것이 중국 정부다. 도움은커녕 엉뚱한 것으로 시비나 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나는 어서 그곳을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런데 이 남자가 나를 숙소로 데려다준다고 했다. 내키지는 않았지만 숙소는 찾아야 했기에 알겠다고 하고 따라갔다. 정부 건물이라는 곳에서 약 10분 정도 걷자 게스트하우스가 보였다. 카운터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는 체크인까지 도와주려는지 어딘가에 줄곧 전화를 해댔다. 내가 “왜 아무도 없어요?”라고 물어도 그는 기다리라고만 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가지 더 도움을 요청했다. “내일 야딩에 가야 해서 빵차를 구해야 하는데 혹시 도와주실 수 있나요?”라고 묻자, 체크인이 끝나면 도와주겠다고 했다. 나는 생각보다 일이 잘 풀려간다고 생각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고 아저씨 한 분이 들어와 체크인을 해주었다. 혼자 왔는데 아무도 없었다면 꽤 난감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저씨는 나를 방으로 안내했고 넓은 방에는 7개의 침대가 있었는데 특이하게 전부 1층 침대였다. 티베트 전통 인테리어가 꽤 으스스하게 느껴지는 방이었다. 나는 짐을 풀며 그들에게 물었다. “오늘 투숙객은 저 혼자인가요?” 그들은 “그렇다”라고 대답했다. 역시 혼자다. 나는 어제 불교 축제를 다녀오고 나서 티베트의 전통 분위기가 조금 무서워졌는데, 이곳에서 혼자 밤을 지낼 생각에 걱정됐다. 방값을 계산하러 다시 로비로 내려갔다. 아저씨가 계산기에 34를 찍어 보여주었고, 나는 100위안을 건넸다. 그러나 거스름돈이 없다며 돈을 다시 돌려주었고, 나는 밥 먹고 남은 돈으로 방값을 지불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나를 도와주었던 이 남자가 내게 묻지도 않고 방값을 자기가 계산해버렸다. 나는 그러지 말라고 손사래를 쳤지만 상황은 순식간에 벌어졌다. 마음 한편에 찝찝하던 감정이 두려움과 부담으로 바뀌어버렸다. 그리고 그가 말했다. “오늘 저녁 같이 먹자, 저녁 먹고 야딩으로 가는 빵차 찾아줄게. 일단 내 사무실로 가자”라고 했다. 또다시 중국인의 지나친 도움이 나를 서서히 익사시키고 있었다.
버스터미널에서 빵차를 많이 보긴 했지만 시내에 와서는 한 대도 보지 못했다. 게스트하우스 아저씨에게 야딩 가는 빵차를 구해달라고 했지만, 투숙객은 나 혼자였다. 나는 분명히 그의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이 남자의 무엇을 믿고 따라갈 것이며, 말도 통하지 않는 남자와 같이 저녁도 먹기 싫었고, 심지어 정부 사무실로 다시 가기는 더욱 싫었다. 모든 상황이 불편했지만, 처절하게도 내게 선택권은 없었다. 이 불편한 것을 잠깐만 참으면 일이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나는 그렇게 그의 사무실로 끌려갔다. 중국 정부 건물로 다시 들어갔다. 그는 나를 어떤 방에 넣고 기다리라고 했다. 한눈에 봐도 이 방은 높은 사람의 사무실이었다. 묵직하고 고급스러운 목재 테이블과 앉으면 ‘뿌드득’ 소리가 날 것 같은 까만 의자, 그리고 그 옆으로 커다란 오성홍기가 위풍당당하게 놓여있었다. 그는 내게 따듯한 차 한잔을 내주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굳이 줬다. 노란 꽃잎이 둥둥 떠다니는 차였는데 내 눈에는 이것이 마약으로 보여 한 모금도 마시지 않았다. 나는 몹시 두려웠다. 여기에 앉고 보니 지금 빵차가 중요한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 들어온 것이다. 숨이 막혀 익사해버릴 것만 같았다. 이 남자는 줄곧 누군가를 찾으며 내게 와서 “내 보스가 널 도와줄 거야. 잠시만 기다려.”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일을 키우고 싶지 않았다. 나는 몰래 방을 나와 도망치듯 건물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리고 이 친구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도와주는 건 정말 고마운데, 나는 좀 쉬어야겠어. 차는 내가 알아서 구해볼게 고마워” 그냥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가 내 숙소 위치를 알고 있는 것이 두려웠다. 그리고 그에게 답장이 왔다. “알겠어. 내가 지금 차 갖고 너희 숙소 앞으로 갈게, 저녁이나 같이 먹자. 그건 괜찮지?” 나는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지 한 시간도 되지 않았고 대화도 통하지 않는 남자가 말이다. 나는 다시 고산증세를 들먹이며, 제안은 고맙지만 피곤해서 좀 쉬어야겠다고 거절했다. 그제야 깊고 깊은 물 웅덩이로부터 빠져나왔다.
아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나는 숙소로 향하며 내일 야딩으로 가는 빵차를 어떻게 구해야 하나 고민했다. 배도 고프고 날도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 외국인이라고는 나 밖에 없었고, 언어도 되지 않는 내가 중국인을 모아서 빵차를 잡을 수도 없었다. 나는 넋을 놓은 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때, 옆에서 “야딩! 야딩!”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한 장족 남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바로 그에게 가서 협상을 시작했다. “야딩으로 가요?” “응” “얼마예요?” “50위안” 이것은 내가 정확하게 고려한 가격이었다. 같이 가는 사람이 없으면 이 가격이 나올 수가 없었기에 몇 명이 함께 가냐고 물었다. “중국인 세 명 더 있어. 내일 8:30분까지 네 숙소 앞으로 갈게” 유난히도 유쾌하고 웃음도 많은 남자였다. 나는 가격도 맞고 간단하게 일이 해결되어 매우 홀가분했다. 껄껄 웃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치기도 하고 악수도 하고 아무튼 친한 척을 했다. 너무 기분이 좋아서 그랬다. 그리고 내일 약속을 다시 한번 더 확실히 하고, 그와 헤어졌다.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꽉 막혀있던 일이 홀가분하게 해결되어 기분은 좋았지만, 아무래도 밤이 찾아오고 티베트 장식을 보고 있자니 무서웠다. 어린아이가 쓰기에도 부족한 크기의 전기장판은 간신히 등만 따듯하게 할 뿐이었다. 나는 한국에서 선물 받은 핫팩을 가방에서 꺼냈다. 소중하게 간직하던 것이라 정말 필요할 때 쓰고 싶어서, 무겁게 들고 다니며 아껴왔던 것이다. 나는 지금보다 필요할 때는 없다고 생각했다. 다섯 개 중 한 개를 뜯었다. 몇 번 흔들고 주머니에 넣어두니 이내 몹시 뜨거워졌다. 나는 발이 너무 시려서 핫팩을 발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누워 있자니, 민방위의 나이가 되었음에도 군대에서 지내던 때가 생각났다. 이것이 그리워 떠난 것이건만 역시 쉽지 않았다. 나는 지도를 있는 대로 확대해야 드디어 이름이 작게 보일 만한 도시에 왔다. 낯선 남자의 도움에 시달리고, 말도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말을 섞으며 믿음과 불신 사이에서 끊임없이 방황했다. 7명이 같이 지낼 수 있는 넓은 방에 혼자 덩그러니 누웠다. 기침을 하면 방안에 소리가 메아리쳤다. 찬 바람이 창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방을 이리저리 휘젓고 다녔다. 서늘한 기운은 무서운 그림과 의미를 알 수 없는 패턴의 장식으로부터 흘러나와 분위기마저 차디찼다. 이따금 밖에서 늑대울음소리가 들렸다. 아직 고산에 적응되지 않아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데, 추위에 코까지 막혀 입으로 숨을 헐떡였다. 가만히 있어도 심장이 쿵쾅쿵쾅 요동쳤다. 그러니까 결국 이 모든 것이 외로움으로 찾아왔다. 쉽게 잠들 것 같지 않은 밤이었다. 나는 작은 불은 하나 켜두었다. 어둠이 두려웠다. 나는 내일 모든 일이 잘 풀리기를 기대했다. 예정대로만 된다면 나는 세 명의 중국인과 함께 야딩으로 갈 것이며, 그들이 영어를 할 줄 안다면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렇게만 된다면 정말 완벽할 텐데 말이다. 나는 다음 날을 위해 어떻게든 잠에 들어야만 했다.
얼마나 잤을까, 닭이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닭이 우는 소리에 잠에서 깬 것이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핸드폰 알림이 울리지 않은 것을 보니 새벽이겠구나 생각했다. 침대를 더듬으며 핸드폰을 찾았다. 머리맡에 놓여있던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하려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내 심장은 바닥으로 순식간에 주저앉아 다시 쿵쾅쿵쾅 요동쳤다. 핸드폰이 꺼져있었다. 결국 자는 사이 추위에 방전된 것이었다. 나는 벌떡 일어나 아이패드로 뛰어가 시간을 확인했다. 06:50분,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닭이 울어주지 않았으면 약속시간에 나가지 못할 뻔했다. 오늘 하루를 완전히 망쳐 버릴뻔했다. 결국 핸드폰이 이렇게 한번 더 말썽을 부렸다. 문득 정말 화가 났다. 너무 놀란 탓에, 아이패드로 뛰어간 탓에, 화가 난 탓에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뛰었고 나는 몹시 헐떡였다. 들숨 날숨을 최대한 크게 하며 진정하려 애썼지만 두통까지 찾아왔다. 그래도 하루를 망치기 전에 깨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닭에게 진심으로 감사했다.
7시 50분, 나는 로비에서 커피라도 한 잔 하며 기다릴 겸 일찍 나왔다. 아무래도 진정이 필요했다. 로비에는 어제 보지 못했던 젊은 남자 직원이 앉아있었다. 중국어로 인사를 걸고, 영어를 할 줄 아냐 물었다. 그러자 그가 “YES”라고 대답하길 얼마나 반갑던지. 나는 그에게 오늘 야딩으로 가서 이틀간 트래킹을 하려고 하는데 사람이 많이 없을까 걱정된다고 했다. 그러자 그는 “사람이 많이 없긴 할 텐데, 그래도 아예 없진 않을 거야”라고 했다. 그리고 나는 이후의 스케줄에 대해서도 말했다. “야딩에 다녀오고 샹그릴라로 떠날 거야. 거기서도 이틀간 트래킹을 하려고” 그러자 그가 나에게 되물었다. “어떻게 가게?” 내가 대답했다. “여기서 가는 버스 있잖아.” 그러자 그의 대답은 다시 나를 멍하게 만들었다. “응, 그런데 지금 비수기라 버스 운행 안 해” 정말 첩첩산중, 산 넘어 산이다. 나는 어떻게 해야 갈 수 있냐고 물었고 그가 방법을 설명해 주었지만 매우 복잡했다. 나는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지게 됐다. 그렇게 까지 해서 갈 필요가 있을까, 시간은 충분할까, 충칭에서 약속에 늦어버리진 않을까, 머리가 아파왔다. 지금 고민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다. 나는 당장 야딩으로 가야 하기 때문에, 이것부터 집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에게 하마터면 정말 난감해질 뻔했다고, 미리 알려주어서 고맙다고 했다.
8시 15분, 나는 15분 전에 나갔다. 고산지대의 아침은 매우 추웠지만 혹시나 기사가 왔다가 그냥 가버릴 까 봐 일찍 나가서 기다렸다. 30분이 되어도 나타나질 않아 불안한 마음을 가질 때쯤 기사가 멀리서 서서히 오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어제처럼 기분 좋게 인사하고 보조석에 탔다.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차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나를 처음으로 데리러 온 모양이었다. 기사는 출발했다. 아주 천천히, 정말 아주 천천히 가다가 곧 내게 손짓 발짓으로 말을 걸었다. “어제 같이 가기로 한 중국인 세 명이 자나 봐, 연락이 안돼” 결국 우려하던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나는 속았다고 생각했다. 분명히 거짓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잡아 두기 위한 거짓말. 이미 타버린 나는 어찌할 수가 없는 것이다. 아침에 체크아웃하고 짐까지 챙겨 나온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이 기사는 잘 알고 있었다. 기사는 나를 태우고 사람을 모으기 시작했다. 창문을 열고 어슬렁어슬렁 시내를 돌아다니며 지나다니는 사람에게 “야딩! 야딩!”을 외쳐댔다. 그러나 한 겨울 비수기에 설산에 올라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에게 이제 어쩔 건지 물었다. 그는 “한 명만 데리고는 못 가, 너 혼자 네 명치를 내면 돼”라고 했다. 결국 이렇게 됐다. 나는 최대한 합리적으로 생각하려 노력했다. 네 명치를 다 합쳐 200위안을 내면 갈 수 있다. 중국 물가를 보아 200위안이면 4박 5일 치 숙소를 계산할 수 있는 가격이다. 적은 돈은 아니다. 야딩에 도착해서도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 어떤 일이 일어나 해결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불어날 것이다. 만약 야딩에 가서 문제가 생겨 바로 돌아와야 한다면, 나는 또다시 혼자 200위안을 지불해서 돌아와야만 한다. 샹그릴라로 가는 버스도 비수기라 막혀버렸고, 핸드폰마저 말썽이다. 앞뒤가 꽉 막혀버린 기분이었다. 앞으로 계속 가냐, 포기하고 뒤로 돌아가냐의 문제였다. 나는 머리가 복잡하면 행동이 먼저 튀어나가 버린다. 나는 아직 생각의 정리가 끝나지 않았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서 “가자”라고 말이 튀어나왔다.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엑셀을 세게 밟았다. 10명이 탈 수 있는 빵차는 그렇게 나만 태우고 야딩으로 향했고, 나는 가는 길에 끊임없이 합리화를 해야만 했다.
기사에게 한 번 속았다고 생각하니 도통 믿음이 가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나는 기사가 맞는 길로 가는 것인지, 혹시 다른 길로 빠져버리는 것은 아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기사가 나를 여기에 버린다면, 어떻게 해서 살아 돌아가야 할지 그런 것들을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러나 생각 외로 기사는 친절했다. 이따금 포인트가 나오면 손짓으로 이곳은 어디고, 저곳은 어디라고 말을 해주었다. 우리가 언덕을 넘을 때면 손가락을 동그랗게 말아 언덕임을 표시하고, 다시 손으로 반원을 그리며 우리가 그곳을 넘는 것이라고 알려줬다. 기사는 내게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며 줄곧 불경을 외고 있었다. 내 귀에는 그저 웅얼웅얼하는 소리로 밖에는 들리지 않았는데, 그것을 한 시간을 넘게 웅얼거렸다. 한 시간이 넘는 분량을 외워서 웅얼거리는 것이 매우 신기했다. 지대가 높은 산을 오르락내리락 하니 어느새 도착했다. 기사는 내게 표 파는 곳을 알려주고 이리 가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그래, 이 사람도 먹고 사려고 하는 건데, 비수기인 지금 얼마나 돈이 궁하겠어. 나는 문득 기사의 사진을 한 장 갖고 싶어 졌다. 네 사진을 찍어도 되냐고 묻자 그는 흔쾌히 알겠다고 하고 찍어 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알려준 길로 떠났다. 조금 후에 그가 뒤에서 내게 소리쳤다. “거기가 아니라, 저쪽으로!” 아, 나를 뒤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고맙다고 인사를 하고 갔다. 생각해보면 괜찮은 친구였던 것 같다.
드디어 야딩에 도착했다. 매표소 뒤로 산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마치 여러 명의 거인이 서로의 어깨너머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표를 사고 입구로 들어갔지만 정말 아무도 없었다. 에스컬레이터가 있었지만 사람이 없어 운행하지 않았다. 계단을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숨이 차 올랐다. 본격적인 야딩 트래킹 장소로 들어가려면 버스로 한 시간을 더 들어가야 한다. 버스에는 역시 아무도 없었다. 앉아서 기다리는데 기사가 와서 사람이 다 차기 전까진 출발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건 또 무슨 말인가. 기사는 그때까지 대기실에서 기다리라고, 나를 데리고 어떤 건물로 들어갔다. 안에는 서넛의 남자가 앉아서 중국 영화를 보고 있었다. 옛 중국인들이 장풍을 쏘아대는 촌스럽기 그지없는 영화였는데, 이들은 “오, 오”라며 재미있게도 봤다. 나는 그 옆으로 난로가 있어 앉아있었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버스 출발할 테니 가서 타라고 했다. 버스에는 아까보다 많은 사람이 타있었는데, 대부분이 승려였다. 빨간 천을 두른 티베트 승려들이 단체로 온 모양이었다. 그중 어린 승려도 많이 보였다. 내가 버스에 오르자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나를 쳐다봤다. 같은 동양인이지만 이들에겐 익숙하지 않은 얼굴이었다. 힐끗힐끗 나를 쳐다보는 것이 느껴졌는데, 나는 그저 창 밖만 응시했다.
창 밖에 젊은 여자 넷이 보였다. 이들은 급하게 뛰어와 버스에 올라타 웃으며 재잘거렸다. 친구들끼리 야딩으로 놀러 온 모양이었다. 부러웠다. 그리고 나는 다시 창 밖을 보았다. 사람이 많이 모여 출발할 때가 되자 기사가 마이크를 들고 뭐라고 많이도 말했다. 안전? 막차시간? 그런 내용들이겠지, 나는 전혀 알아듣지 못했고 그저 창 밖만 보고 있었다. 버스는 곧 출발했고, 산길을 따라 한참 들어갔다. 그리고 버스는 사진이 멋지게 나오는 한 지점에 멈추었다. 나는 내려서 사진을 찍고 있었는데 기사가 나를 불렀다. 기사는 젊은 여자 넷과 같이 있었는데, 이들은 내게 기사가 했던 이야기를 영어로 통역해주었다. 아, 이 여자들은 영어를 할 줄 안다. 잘 하진 못하지만 더듬더듬하고자 하는 말은 다 해주었고, 나도 정보를 들을 수 있었다. 이후로 버스에 다시 타고서도 버스기사가 방송을 하면 내게 통역을 해줬다. 그리고 나도 궁금한 것이 있으면 이들에게 물었다. 나는 이들을 매우 의지했다. 사무치는 외로움에, 사람과의 대화에, 낯선 곳에서 필요한 정보에 대한 모든 갈증이 이윽고 터져버려 이들에게 매달리게 된 것이다. 버스는 도착했고 나는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마음속에선 이 친구들 없이 또 혼자 어떻게 다녀야 하나 걱정이 많았다. 그때 이들이 내게 되물었다. “혹시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다닐래요?” 나는 덥석 물었다. 아침부터 많은 일이 틀어졌지만, 결국 이 타지에서 말이 통하는 친구들을 만났다. 나는 정말 졸졸 따라다녔다. 이야기를 나누며 알게 된 사실은 이들도 둘씩 일행이었는데, 합친 것이었다. 중국에서 이런 오지를 여행할 때는 뭉치는 것이 좋다. 나까지 끼어 다섯 명이 함께 여행하게 된 것이다. 드디어 모든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기 시작했다. 이들 중 영어를 할 줄 아는 친구는 두 명뿐이었는데, 호주 멜버른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있었다. 나도 호주 시드니에서 일 년간 살았고 멜버른으로 여행 간 적이 있어서 통하는 이야기도 많았다. 이 친구들은 나를 많이 챙겨주었다. 여자 친구들이라 확실히 준비가 철저했다. 가방엔 초콜릿, 비스킷 등 먹을 것들이 많았다. 나는 그런 것들을 챙길 여유가 없어 아무것도 가져오지 못했던 터라 조금 얻어먹었다. 내가 이 친구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사진을 찍어 주는 것뿐이었다. 나는 사진기사 노릇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이들의 호의에 보답할 수 있는 선물이 될 수 있다면 했다. 이 친구들이 내게 숙소는 어디냐고 물었다. 나는 아직 정하지 않았다고 했다. 사실 그것이 걱정이었다. 야딩 촌이라고 산속에 숙소가 있긴 있어서 그곳에서 묵을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내키지는 않았었다. 그러자 이들이 운전사를 고용해서 다니고 있는데 오늘은 자기들이 묵는 숙소에서 같이 묵고, 다음날 같이 와서 트래킹을 하자는 것이었다.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너무도 좋은 제안이었기에 나는 다시 덥석 물었다. 그리고 좀 더 들어보니 이들도 다시 다오청으로 돌아가서 마지막은 청두로 간다고 했다. 나는 결국 청두까지 모든 여정을 이 친구들과 함께 하기로 했다. 원래 계획이었던 샹그릴라로 가는 버스도 비수기라 운행하지 않는다고 했으니, 오지 여행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 친구들과 함께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이런 인연이 생길 줄은 꿈에도 몰랐다. 나는 그저 부딪쳐보자 해서 여기까지 밀고 왔다. 그리고 이들을 만나 풀리지 않던 일들이 미역줄기 풀어지듯 전부 풀렸다. 시작이 두려워 이곳에 오지 않았다면, 혹은 중간에 포기하고 돌아갔다면 이런 인연은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첫날의 산행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두 명의 친구들은 다른 숙소에 묵었는데 이들과는 내일 만나기로 하고 헤어졌다. 나는 영어를 할 줄 아는 두 친구의 숙소로 따라갔다. 이곳의 사정도 다르진 않았다. 투숙객은 이 친구들이 전부였고, 나는 10인실을 혼자 쓰게 되었다. 친구들이 있어서일까, 무섭거나 외롭지는 않았다. 나는 씻으려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뜨거운 물이 김을 모락모락 내며 콸콸 잘도 쏟아져 나왔다. 산행 후 따듯한 물로 샤워라, 정말 최고였다. 나는 샤워를 마치고 친구들을 만났다. 세 명의 친구가 나왔는데, 고산병을 심하게 앓아 오늘 산행은 포기했던 친구도 있었다. 이 친구는 조선족이 많은 동네에 살고 있어서 내가 한국말로 말을 하면 알아 들었다. 그러나 대답은 하지 못했다. 정말 신기하고 재미있는 친구였다. 내가 한국말로 “그래서 내가 지금 뭐라고 하는지 알아듣는다고?”라고 물으면 “YES”라고 대답했다. 영어도 통하고, 한국말도 통하니 정말 마음이 정화되는 기분이었다. 그동안의 고생이 전부 씻겨나가는 듯했다. 그리고 우리는 한 식당에 들어가 저녁을 먹었다. 오랜만에 밥을 먹었는데 매우 맛있게 먹었다. 이것이 이 날의 첫 끼 식사였다. 아침부터 한 끼도 못 먹고 그저 친구들이 나누어준 초콜릿만 한두 개 먹었을 뿐이었다. 정말 살 것 같았다. 그리고 계산을 하려는데 자기가 먹은 것은 각자 자기가 계산했다. 아, 정말 좋다. 이것이 맞는 것이다. 내가 먹은 것은 내가 계산하는 것이 맞다. 드디어 상식적인 계산을 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들에게 더욱 큰 믿음이 생겼다. 기분이 좋아 밥을 먹고 2시간은 떠들었다. 우리는 내일 아침 다시 만나 밥을 먹고 출발하기로 하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