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장이었을까 설렘이었을까, 어젯밤에 맥주를 다섯 캔이나 마셨지만 밤새 뒤척였다. 처음 배낭여행을 떠나는 날도 잘만 잤는데, 이상하게 편히 잠들지 못했다. 캉딩으로 떠나는 아침 9시 버스를 타야 했기에, 늦잠이라도 자버린다면 모험은 시작도 전에 물거품이 되어버린다는 걱정 때문이었으리라. 천재지변이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 부주의로 무언가 못하게 된다면 나는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끊임없이 멍청한 짓을 하고 있지만, 무엇 하나 못하는 멍청이는 아니다. 나는 자기 전에 미리 싸놓은 짐을 갖고 아무도 깨지 않도록 조용히 방을 나왔다. 많은 대화를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일주일 동안 매일 보고, 어색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고, 같은 화장실을 쓰며 나름 정이 들었던 친구들을 뒤로하고 몰래 나오는 마음이 가볍지만은 않았다. 인사라도 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굳이 깨워서 할 것도 아니었다. 나는 까만 커튼을 쳐두고 나왔다. 친구들에게 떠난 뒤의 휑한 자리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평소처럼 지내다가 어느 순간 “갔나 보네”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겨주길 바랬다. 체크아웃을 하고 로비에 잠깐 앉아 쉬다가 시간에 맞춰 버스터미널로 출발했다. 나는 급하게 움직이는 것을 싫어한다. 어딘가로 떠난다거나, 새로운 일을 시작한다던가, 친구들과 약속이 있던가 할 때에는, 커피 한 잔 하며 무언가 읽을 시간의 여유를 꼭 갖는다. 그러면서 마음을 가다듬고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다. 버스터미널은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나는 근처 식당에 가서 따듯한 국물에 국수를 한 그릇 하고, 만두 한판을 해치웠다. 그제야 기분 좋게 버스에 올랐다.
사람들 말로는 좋은 버스가 올 수도 있고 낡은 버스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단지 운에 맡겨야 한다고 했다. 곧 굉장한 버스가 나를 반겼다. 영국도 아닌 중국에서 2층 버스를 타게 될 줄은 몰랐다. 2층으로 올라가니 이것이 기차인지 버스인지, 좌석이 지네 다리처럼 길게 뻗어있었다. 나는 2층, 앞에서 두 번째 통로 자리에 앉았다. 앞에는 커다란 모니터가 달려있었고 버스가 도착할 때까지 영화를 상영했다. 나는 이제 7시간 동안 버스기사에게 몸을 맡기고 무엇이든 하면 됐다. 누군가 나를 위해 운전해주는 것은, 참 포근한 느낌이다. 버스는 이내 빈자리를 찾아볼 수 없이 가득 찼으며 시간에 맞춰 출발했다. 나는 이런 비수기에 캉딩으로 가는 사람이 이렇게 많다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나는 창 밖을 보며 잠깐 넋을 놨다. 계획된 시간이었다. 떠남과 동시에 다른 짓을 하는 것은 나를 일주일간 보살펴준 도시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 청두를 떠나며, 지나온 거리에 마지막 인사를 했다.
곧 졸음이 몰려와서 잠에 들었다. 버스에 몸을 얹히고 긴장이 풀린 모양이었다. 한 시간 정도 잤을까, 모니터에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줄곧 영화가 상영되고 있었는데 화면에 이병헌이 나오고 있었다. 외국 배우들도 같이 나오는 것을 보고 이것이 ‘지아이 조’라는 영화인 것을 알았다.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이병헌이며 외국 배우들이며 전부 중국어를 쓰고 있었다. 더빙이었다. 도저히 못 봐주겠다 나는 저것을. 강제로 들어야만 하는 영화에서 신경을 끄려면 귀마개밖에 없었다. 그리고 나는 책을 읽기 시작했다.
잠시 후 휴게소에 도착했다. 화장실이 딸린 작은 식당에는 버스 네 대 정도 들어갈만한 크기의 주차장이 있었다. 우리보다 먼저 온 버스들이 주차되어있었고 사람들은 옥수수, 국수, 과일 등의 음식을 서서 먹고 있었다. 몇몇은 화장실로 갔고 나도 그들을 따라갔다. 그리고는 소문으로만 듣던 장면을 보았다. 나는 화장실로 들어서면서 문 없는 대변 칸에서 쪼그리고 앉아 태연하게 볼일을 보는 사람들을 보고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태연하던 그들도 나를 보고 민망이라는 감정을 느껴버렸을지도 모를 정도로 나는 정말 식겁하고 놀랐다. 버스에서 내린 수십 명의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자연스럽게 어울려 소변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태연한 척하며 그들과 융화되려 애썼다. 그것이 더럽다거나 충격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익숙하지 않은 그들의 문화가 내게는 매우 놀랍고도 신기하게 다가온 것이다.
버스가 캉딩에 도착할 무렵에는 태양이 자취를 감추고 있었다. 오후 6시가 넘었으니 9시간도 넘게 온 것이다. 나는 곧바로 창구로 가서 다음날 새벽 6시, 다오청으로 가는 버스표를 샀다. 잠만 자고 나와서 다시 10시간의 강행군이다.
캉딩은 전혀 기대하지 않은 도시였다. 그저 거쳐가는 기착지로 여겼으며 비수기인 데다가 어두워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그저 저녁이나 먹고 다음 계획을 확인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바로 보이는 아무 건물에나 들어갔다. 건물은 온통 나무로 지어져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삐거덕거렸으며 실내는 매우 쌀쌀한 기운을 풍겼다. 그러나 왼쪽 구석에 큼지막한 난로가 있어 쌀쌀한 기운을 아늑하게 상쇄시켰다. 많은 여행자가 거친 듯 벽에는 세계의 국기들이 벽에 붙어있었고 그들만의 언어로 낙서가 되어있었다. 그것들을 보는 것만으로도 꽤 재미를 느꼈다. 고즈넉한 분위기에 마음에 드는 숙소를 찾은 것 같다고 생각했다.
카운터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 머리가 길고 키가 나랑 비슷한, 호감 가는 인상의 젊은 남자가 영어로 내게 인사를 걸어왔다. 그 옆에서 내게 거스름돈을 건네며, 키가 작고 통통한 젊은 여자가 “안녕”이라고 인사했다. 홍콩에서 온 남자는 영어를 할 줄 알았고, 여자는 중국인인데 한국말 몇 단어 정도는 아는 모양이었다. 생각지도 못하게 외진 곳에서 영어와 한국어를 동시에 들으니 기분이 많이 좋아졌다. 체크인을 마치고 들어가려는데 남자가 내게 말을 보탰다. “오늘 티베트 불교 행사 있는데 같이 갈래?” 내가 대답했다. “좋지”, 그러자 그가 “그럼 8시에 로비에서 만나자”라고 내게 손을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 친구가 마지막으로 이어 말했다. “요즘 비수기라 오늘 손님은 너밖에 없어”, 예상한 바였다. 나는 아무런 기대도 않던 이곳에서 뭐라도 하겠구나 싶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투박한 방문 앞에 서서, 나무로 만들어진 큼지막한 손잡이를 돌렸다. ‘삐걱’ 소리가 요란하게 났다. 이곳 캉딩은 2,500m의 고산지대로 기온이 뚝 떨어져서 몹시 추웠으며, 찬 공기가 방안에 그대로 머물러있었다. 그래도 올 겨울 한국의 추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나는 먼저 짐을 풀고 전자기기를 모든 침대의 콘센트에 꽂았다. 그리고 기분 좋게 샤워하러 가려는데, 첫 번째 난관에 봉착했다.
아무 문제가 없다면 그것을 모험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떤 문제가 어떻게 발생할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휴대폰이 끊임없이 말썽이었다. 2년도 넘게 사용한 휴대폰의 배터리가 아무래도 수명을 다한 모양이었다. 그동안은 그저 불편할 정도로 자주 꺼질 뿐이었는데, 결국 곯아있던 문제가 터져버린 것이었다.
씻으러 가기 전에 휴대폰을 확인했는데 꺼져있었다. 한두 번인가,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다시 충천했는데 켜지지가 않았다. “전기가 안 들어오나?” 확인해보았지만 아니다, 잘 들어왔다. 수십 번을 해보아도 같았다. 휴대폰은 그저 속이 텅 빈 배터리 잔량을 무심하게 깜빡일 뿐이었다. 왜 하필 지금인가, 그 많고 많던 시간 중에 왜 하필이면 지금인가, 하루만 일찍 고장 났어도 고치고 왔을 텐데, 왜 하필 지금인가, 원망스러웠다. 휴대폰이 없으면, 허망하게 넓은 중국 땅에서 길을 찾을 수도 없으며, 돌아가는 비행기표도 살 수가 없다. 이미 벌어진 일이었으므로 어떻게든 해결해야만 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나는 숙소 직원들에게 갑자기 사정이 생겨서 가지 못한다고 말할까 하다가, 그런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방이 너무 추워서 방전된 것은 아닐까 하고 휴대폰을 정기장판에 올리고 그 위로 두꺼운 이불을 덮어두었다. 마냥 기다린다고 될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샤워를 하러 갔는데, 뜨거운 물이 잘도 나와서 역시 괜찮은 호스텔이라고 생각했다. 샤워를 마치고 다시 방으로 돌아가, 시험 결과를 확인하듯 조심스럽게 전원 버튼을 길게 눌렀다. 여전히 속이 텅 빈 빨간 배터리가 깜빡였다. 나는 좌절했다. 당장 한국과 연락이 두절된 것도 문제였다. 연락이 끊겨 걱정할 엄마가 걱정됐다. 나는 가만히 앉아 생각에 빠졌다. 일단 홈페이지에 이 상황에 대해 글을 올려 사람들에게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좌절의 늪은 내가 허우적거리면 거릴수록 더욱 깊이 나를 끌고 들어갔다. “돌아가는 비행기는 어떻게 끊어야 하지? 그냥 여기서 그만두고 내일 청두로 돌아가서 휴대폰을 고쳐야 하나? 약속시간이 다되었는데 저 친구들에게는 뭐라고 해야 하나, 내가 이 짓을 왜 시작했을까, 집에 가고 싶다” 낯선 공간이 더욱 소슬하게 느껴졌으며 노란 전등 불빛마저 두렵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구원의 소리가 들려왔다. “우웅, 우웅” 두 번의 짤막한 진동, 하루에 수십 번도 넘게 들은 매우 익숙한 소리, 나는 당장 달려가 이불을 걷어내고 휴대폰을 확인했다. 휴대폰이 켜져 있었다. 나는 침대에 무릎을 꿇고 앉아 엎드려 팔꿈치를 침대에 붙이고 양손을 공손히 모아 휴대폰을 들어 받치고 “감사합니다”라고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터져 나온 감사인사였다. 나는 휴대폰이 다시 꺼져버릴 까 봐 바로 엄마에게 연락해서 상황을 설명하고 혹시 연락이 되지 않더라도 걱정하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고는 휴대폰을 다시 전기장판 위에 눕히고 두꺼운 이불을 덮어주었다. 나는 편히 쉬라는 인사도 잊지 않고 이불을 두 번 톡톡 치고 기분 좋게 약속을 나왔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는 짧은 시간 동안 방에서 좌절과 희망을 맛보고 나왔다. 역시 모험이란 긴장의 연속이다. 로비에서 기다리는데 못 보던 친구가 나를 보며 “갑시다!”라고 했다. 일행은 총 다섯 명으로, 아까 이야기한 로비의 두 친구, 그리고 남자 두 명이 더 있었는데, 키가 큰 한 명은 비니를 쓰고 있었으며 영어를 조금 할 줄 알았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왜소한 체격에 군밤장수들이 쓰는 그런 털모자를 쓰고 있었다. 이 친구는 영어는 못했고, 나중에 들어보니 자전거로 2,000km를 여행해온 대단한 녀석이었다. 여기에 2주 정도 무료로 쉬면서 일을 돕고 있다고 했다. 나는 줄곧 홍콩 친구와 대화를 하면서 갔다. 앞으로 내 여행경로를 말해주니 “추워서 지금 그곳으로 가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그래도 전혀 없진 않을 거야”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에게 여기에서 지내는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그는 “자연이 좋아서 머물게 됐어, 온지도 두 달 정도 됐네.”라고 대답했다. 말 한마디 한 마디에서 호감이 느껴지는 친구였다.
친구의 말대로 캉딩의 길거리는 기분 좋은 풍경의 연속이었다. 마을을 따라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으며 물 흐르는 소리가 잔잔하게 들렸다. 스무 걸음이면 건널 수 있는 자그마한 다리 위에 서서 계곡물을 내려다보면 바닥에 돌이 몇 개인지 셀 수 있을 정도로 물이 맑았다. 마을 주변으로는 온통 산이 뒤덮고 있었다. 자연이 아름다운 마을이었다. 꽤 걸어서 어느 지점에 이르자, 잔잔하게 들리던 계곡물소리 위로 괴상한 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리고 가까이 갈수록 그 기묘하고도 괴상한 소리는 점점 커졌다.
이윽고 우리는 한 사원 앞에 도착했는데, 발 디딜 틈 없이 사람들이 북적였다. 나는 사람들 사이에 끼이고 밀려서 사원으로 들어가졌다. 그리고 내 눈을 의심할 만큼 엄청난 장면을 보았고 분위기에 압도당했다. 첫눈에 보인 것은, 길이가 10m는 되어 보이는 긴 테이블 위에 수백 개의 촛불이 올려있었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리던 기묘하고 괴상한 소리는 이제 완전히 나를 덮쳐버렸다. 나는 순간 잔뜩 겁에 질려버렸다. 어쩌면 숨도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겁에 질려버렸다. 끊임없이 울리는 기괴한 소리는, 나팔을 부는 것 같은 소리였는데 매우 두껍게 일정했다. 마치 괴성 같았다. 악마를 내쫓는 괴성, 그것이 아니라면 악마가 불에 타 죽어가며 괴로워하는 괴성, 아무튼 이 세계의 것들이 아닌 것들에게서 나는 소리 같았다. 살면서 이렇게 소름 돋고 기괴한 소리는 처음 들어 보았다. 그리고 나는 안쪽 더 깊숙이 들어갔다. 길이가 제각기 다른 테이블이 놓여 있었으며 빈 틈이 보이지 않게 빼곡히 촛불이 올려있었다. 촛불 위로 촛불을, 또 그 촛불 위로 촛불이 위태롭게 쌓여있었다. 이리저리 부는 바람에 따라 춤을 추는 촛불들을 보고 있자니 정신이 없었다. 한쪽에선 나무를 태우고 있었고 동시에 수많은 촛불이 타며 내는 연기와 냄새에 숨쉬기가 곤혹스러웠다. 곳곳에서 소방관과 경찰들도 눈에 띄었다. 빨간 천을 두른 티베트 승려들도 많이 보였다. 사원 내부에서는 승려들이 모여 앉아서 불경을 외고 있었는데, 주변으로 돈이 앉은키만큼 수북이 쌓여있었다.
한 시간 정도 그곳을 둘러보며 구경하고 친구들을 다시 만나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너무도 섬뜩한 곳이었다.
숙소로 돌아와 우리는 큰 난로 근처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아늑하고 포근했다. 굳이 서로 말을 걸지도 않았으며 각자 넋을 놓고 있던, 책을 읽던, 둘이서 대화를 하던 아무튼 각자 할 것들을 하고 있었다. 이따금 비니 쓴 친구가 일어나서 난로 뚜껑을 열어 안에 있는 나무를 한 번씩 뒤적였다. 사그작사그작, 까맣게 타버린 나무들이 긁히는 건조한 소리가 좋았다. 나는 문득 친구들에게 궁금한 것이 생겨 물었다. “그런데 티베트 불교행사는 얼마나 자주 열리는 거야?”라고 묻고, 속으로는 “자주 열린다면 승려들 벌이가 괜찮겠는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홍콩 친구가 “티베트 불교행사는 일 년에 한 번 열려, 운이 좋았어”라고 대답했다. 그제야 나는 버스가 만석이었던 것이 이해됐다.
정말 그랬다, 여행을 하면 끊임없이 위기가 생기지만 그것들이 참 운이 좋게 해결됐다. 하루 묵는 그 날이, 일 년에 한 번 있는 행사의 날이었다니. 어쩌면 한국인중 내가 처음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조금 으쓱했다. 11시가 지나고 친구들이 하나 둘 자러 들어갔다. 마지막까지 나, 홍콩 친구, 그리고 비니 쓴 친구 이렇게 셋이 카운터 바에 남아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다가 12시가 다 되어 각자 방에 들어갔다. 나는 다음날 새벽 5시에 일어나야 했으므로 휴대폰으로 알림을 맞추고, 혹시나 꺼져버릴 상황을 대비해 다른 기기에도 알림을 맞추어두었다. 생각지도 못한 굉장한 하루였다.
새벽 5시, 알림이 두 곳에서 시끄럽게 울렸다. 나는 간단히 씻고 바로 배낭을 추려 나왔다. 로비에는 아무도 없었다. 문득 전날 친구들이 한 이야기가 떠올라서 피식- 웃음이 났다. “내일 우리는 자느라 로비엔 아무도 없을 거야. 체크아웃은 따로 안 해도 되니까 네가 알아서 문 열고 나가”라며 키득대던 녀석들, 나는 로비에 앉아 커피를 마시다 문득 이 친구들에게 편지를 남기고 싶어졌다. 나는 남는 시간 동안 노트를 찢어 짧은 편지를 쓰고 그 위에 명함 두 장을 올려두었다. 그리고 친구들의 말대로, 직접 내 손으로 잠긴 대문을 활짝 열어두고 터미널로 향했다.
아침 먹을 시간이 없었다. 편지를 쓰고 나오느라 시간을 약간 지체한 터였다. 나는 직원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무작정 붙잡아 “다오청, 다오청!”을 외쳤다. 그러면서 그들이 손짓하는 방향으로 조금씩 가며 버스를 찾을 수 있었다. 짐을 싣고 버스에 올라타서, 앞에 앉은 사람을 보고 한 번 더 “다오청?”이라고 묻자,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후 버스가 출발했다. 나는 아직 어두운 창 밖을 바라보며, 어둠이 걷히고 세상이 서서히 파란빛을 띠는 것을 느꼈다. 어두운 파란빛이 돌기 시작할 무렵 나는 눈을 감았다. 그러고 5분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눈을 떠보니 창 밖은 아까보다 더 밝은 하늘빛이 되어있었다. 고작 5분만으로도 세상의 색깔이 바뀌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아름다운 시간이다.
어둠이 완전히 걷히고 날이 밝자 산자락 아래에 티베트의 전통 가옥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곳곳에 돼지, 당나귀, 염소, 소 그리고 말 같은 가축들이 들판을 유유히 거닐고 있었다. 고산지대로 올라갈수록 그렇게 보고 싶었던 야크 무리도 자주 보였다. 나는 이런 곳에서 동물 보는 것이 좋다. 그럴 수만 있다면 더 가까이 가서 보고, 교감하고 싶다. 마을에 사람들도 보였다. 티베트 전통복장을 입은 한 어린 꼬마 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잡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들이 향하는 곳으로 고개를 들어보니 제법 큰 건물이 몇 개 보였다. 아마도 엄마 손을 잡고 학교에 가는 모양이었다. 버스가 그들을 지나친 짧은 순간에, 나는 그들의 생활을 엿보았다. 모든 것이 정겨웠으며 그래서 설렜다. 대화가 통해 저들 사이에 섞여 하루만 지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마법의 약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버스는 비좁은 산길을 오르락내리락 아찔하게 달렸다. 나는 버스기사의 운전실력에 기립박수를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산을 지나니 끝없는 평야가 펼쳐졌다.
잠시 후, 평야를 달리던 버스가 멈추었고 총을 든 경찰이 버스에 올라 신분증 검사를 했다. 티베트 지역으로 가까이 갈수록 신분증 검사가 엄해졌다. 누구는 넓은 땅에서 자국민과 외국인들의 안전을 위한 것이라고 하는데, 내 눈에는 그렇게 좋은 의미로 보이지 않았다. 선글라스를 쓰고 입을 굳게 다문 경찰이 커다란 기관총을 앞으로 메고 강압적으로 신분증을 요구했다. 중국인들은 익숙하다는 듯 한 명씩 신분증을 내어주었다. 내게도 예외는 없었고 외국인인 나는 여권을 줬다. 국민에게 총을 들이밀며 강압적으로 신분증을 요구하는 것이 내게 좋게 보일 리가 없었다. 티베트인, 위구르인들의 독립운동, 그리고 그로 인한 테러의 위험, 이런 것들로부터 사전에 안전을 지키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웃기지도 않는 말이다. 나는 독재, 억압, 세뇌, 강압 따위의 단어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티베트의 건물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아기자기한 건물에 알록달록한 티베트 불교 전통 장식,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라면 좋겠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모든 건물에 오성홍기가 꽂혀있다는 것이다. 기분 나쁠 정도로 모든 집에 빨간 오성홍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내 눈엔 잔인한 피로 물든 빨간 깃발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도 신분증 검사를 세 번 정도는 더 한 것 같다. 여권을 가방에 넣으면 또 들어와서 “신분증”, 다시 넣으면 또 들어와서 “신분증”. 중국어를 알아듣진 못하지만 나는 저들이 최소한 “보여주세요”라는 말이라도 붙이길 바랬다. 경찰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국가다. 여권을 넣었다 꺼내기를 몇 번, 이윽고 버스기사가 다오청에 도착했다고 방송을 했다. 나는 이틀간 20시간의 여정으로 무사히 다오청에 이르렀으며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많이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