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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Apr 30. 2018

다시 뭄바이, 그리고 고마운 사람들에게

 버스기사는 어찌나 내게 빨리 내리라며 호통을 치던지, 인도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는 ‘인도는 천천히’는 결국 자기들이 필요할 때만 등장하는 모양이다. 나는 뭄바이에서 며칠을 더 보낸 후 뉴델리(New Delhi)로 가야 했고, 친구는 다음날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친구는 한국으로 가기 전 인도에서 마지막 날을 즐겨보겠다며 남은 인도 루피를 전부 탕진하고 가겠다고 했다. 그리고는 나를 데리고 꼭 가고 싶은 뷔페가 있다며 택시를 타고 인도양 바닷길을 따라 한참을 달려갔다. 정오를 막 지난 시간, 식당은 아직 점심식사 준비가 한창이었고 손님은 우리가 전부인듯했다. 잠시 후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직원이 우리를 자리로 안내했다. 어둑한 실내는 고급스러운 나무로 인테리어 되어있었으며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구석구석 어디 하나 닿지 않는 곳이 없었다. 지금껏 인도에서 와본 식당 중 단연 최고로 좋아 보였다. 우리는 아주 잠시 앉았다가 의자가 차마 미지근해지기도 전에 일어나서 음식을 가지러 갔다. 나는 먼저 무슨 음식이 있나 한번 훑어보았는데, 놀랍게도 회가 있었다. 인도에서 회를 볼 줄이야, 주변을 보니 대부분이 일본음식 혹은 동남아시아 음식이었다. 이곳은 아시안 음식 뷔페 레스토랑이었다. 이제야 마음의 준비를 마친 나는, 큼지막한 접시를 들고 회를 한 주먹씩 접시에 담았다. 그 위로 간장을 살살 뿌리고 겨자를 한 숟갈 퍼서 접시에 긁어 올렸다. 적어도 여기 있는 모든 음식을 한 번씩은 먹어보고 나가겠다는 욕심을 부렸다. 비록 소주는 없었지만 오랜만에 회를 한 접시 하니 끝내줬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친구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했다. 혼자였다면 결코 이렇게 비싸고 좋은 곳에는 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아니 이런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을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영화관으로 갔다. 인도에서 영화관이라, 조금 의아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인도 뭄바이의 영화는 ‘Bollywood’로 굉장히 유명하다. ‘Bollywood’란 인도의 영화산업을 지칭하는 말로, 인도 뭄바이의 옛 이름 ‘봄베이(Bombay)’와 미국 영화산업 ‘Hollywood’의 합성어이다. 이미 인도 여행이 3번째인 친구는 인도에 대해 아는 것이 많았는데 자기가 좋아하는 인도 배우의 영화가 개봉했다며 그것을 보자고 했다. 우리는 시간에 맞춰 극장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영화 시작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광고가 끝날 줄을 몰랐다. 인도에서는, 어딜 가나 돈 밝히는 소리가 들린다. 마침내 지겨운 광고가 끝나고 영화가 시작하나 했는데, 갑자기 극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는 바람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친구도 일어나는 것을 보고 나도 두리번거리며 따라 일어났다. 그리고 극장에서는 인도의 국가가 울려 퍼졌고 다들 그것을 따라 불렀다. 마치 70년대 대한민국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면 가던 길을 멈추어 가슴에 손을 올리고 국가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던 것처럼, 이들도 영화를 보기 전에 경건하게 국가를 불렀다. 국가가 끝나고 모두 자리에 앉자 이윽고 영화가 시작됐다. 알아듣지 못하는 힌디어를 들으며 영화에 집중하려 노력하는데, 그때 어디선가 강한 빛이 들어오는 바람에 내 시선이 그리 향했다. 빛은 이리 갔다 저리 갔다 하더니 계단을 걸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것은 극장에 늦게 들어온 사람들이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밝히던 휴대폰의 불빛이었다. 이들은 영화가 시작했던 말던 사람들이 영화를 보던 말던 그런 것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했고, 심지어 사람들 얼굴에 불빛을 쏘아가며 자리를 찾았다. 그 후로 들어온 사람들도 모두 똑같은 짓을 했는데, 영화가 시작하고 늦게 들어온 사람이 몇 명인지 셀 수 있을 정도였다. 나는 문득 이들의 언어에 ‘배려’라는 단어가 존재하기는 할까 궁금해졌다.  


 영화는 힌디어로 진행되어 우리는 그저 장면과 분위기를 보고 내용을 유추해야 했다. 결국 내 집중력은 30분을 채 넘기지 못했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잠시 잠들었다가 시끄러운 소리에 슬그머니 눈을 떠보면, 아까만 해도 카리스마 넘치던 남자 배우가 호들갑을 떨면서 춤을 추고 있었다. 산만한 인도 노래를 부르며 매우 과격하게 춤을 추었고, 그 옆으로 여배우건 신하들이건 아군이건 적이건 모두 다 같은 춤을 추었다. 전에도 인도영화를 본 적이 있어서 그렇게 놀랍지는 않았으나, 요즘 나오는 영화도 여전히 저렇게 춤을 춘다는 것이 조금 웃기긴 했다. 그러다가 다시 잠들고 눈을 떴을 때는 극장이 밝아있었고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고 있었다. 내가 끝인 줄도 모르고 그렇게 깊이 잠들었던 것인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친구가 말하길 영화 쉬는 시간이라고 했다. 연극도 아니고 영화가 쉬는 시간을 갖다니, 보통 인도영화들이 워낙 길다 보니 이런 문화가 생긴 모양이었다. 곧 영화 2부가 시작하고도 나는 줄곧 졸았다. 힌디어만 들으면 신기하게도 잠이 쏟아졌는데, 덕분에 나는 영화관에서 3시간을 푹 자고 나왔다. 


 다음날, 나는 친구를 공항까지 데려다 줄 생각으로 따라 나왔다. 친구는 한국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치고는 내게 남은 인도 루피를 전부 건넸다. 자기는 이제 한국으로 떠나기에, 이 돈은 더 이상 필요가 없으니 여행에 보태 쓰라는 것이었다. 나는 괜찮으니, 차라리 이 돈으로 같이 점심을 먹자고 했지만 기어코 친구는 내게 돈을 쥐어주었다. 나는 몇 번을 거절하다가 결국 돈을 받기로 했다. 받은 돈을 들고 있는 손이 몹시 어색했다. 바지 주머니까지 거리가, 한국을 떠나 인도로 온 거리보다 더 멀게 느껴졌다. 나는 친구에게 그것을 받고도 한참이나 주머니에 넣지 못한 채 손에 쥐고 다녔다. 주머니에 넣는 내 모습을 왠지 보기 싫었던 것 같다. 12시가 되어 택시가 왔고 우리는 공항으로 갔다. 나는 친구와 짧은 포옹을 하고, 그렇게 일주일간의 잊지 못할 추억을 여기에서 마무리했다. 참 이런 인연이 어디 있을까, 너무나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고, 나보다 더 누나 같은 친구였다.  


 나는 곧바로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승무원 시절 비행하다 알게 됐는데 당시에는 나보다 1년 선배였으나 내가 퇴사하고 지금은 오빠 동생으로 지내고 있는 친구였다. 아무튼 고아에 있을 때 그녀에게 연락이 와서 “이번에 뭄바이로 비행을 가게 되었는데 혹시 어디서 여행하고 있는지”내게 물었다. 마침 나도 고아에서 휴가가 끝나면 다시 뭄바이로 돌아가야 했기에 우리는 만나기로 약속했었던 것이었다. 나는 정말 한국 친구들이 몹시 그리웠으므로 그녀를 만나는 것을 굉장히 기대하고 있었다. 공항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텔이 있었고 나는 그녀를 데리러 호텔 앞으로 갔다. 그리고 마주한 익숙한 풍경, 이곳은 오래전 내가 비행 왔을 때 묵었던 그 호텔이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확연히 다른 허름한 나의 행색에 입구에서 들어가지 못하게 막을 까 봐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경비가 출입을 막진 않았다. 나는 익숙하게 호텔로 들어갔다 옛날처럼. 비행 와서 잠시 외출하고 호텔로 돌아오던 때처럼 그렇게 들어갔다. 기분이 참 묘했다 정말, 그때와는 너무도 다른 상황이라니, 기분 참 묘했다. 호텔로 들어가자마자 놀랄 만큼 거대한 홀이 보였고, 이윽고 소파에 앉아있는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정말 반가웠다. 정말 너무 반가워서, 내가 마치 한국에 돌아간 마냥 기뻤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내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만났던 그날처럼, 또 무언가 주섬주섬 꺼내더니 내게 봉지 하나를 건넸다. 봉지 안에는 컵라면, 컵밥, 통조림 깻잎 2개, 물 티슈 몇 개 그리고 작은 물 2통이 들어있었다. 인도 물이 워낙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 깨끗한 물을 못 먹고 지냈을까 봐, 걱정되어 가져왔다고 했다. 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는 차오르는 고마움에 봉지를 받자마자 물 한 통을 다 마셔버렸다.  


 나는 그녀를 데리고 어디를 갈지 고민을 많이 했다. 인도의 진짜 모습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으나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런 곳에 데리고 가면 무서워할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뭄바이에서 가장 큰 몰(Mall)로 데리고 갔다. 아무래도 승무원들은 몰에 익숙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릭샤에 태우고 호텔에서 몰까지 가는 길에 현지인들의 삶을 살짝 엿봤는데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매우 흥미로워했다. 지나온 현지인들의 가난한 삶이 무색하게 느껴질 만큼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부는 몰에 도착했다. 그녀는 내게 먹고 싶은 것은 전부 먹으라고 했다. 뭄바이에서 먹을 복이 터졌나 보다. 나는 인도음식보다는 양식이 먹고 싶었고 우리는 이탈리안 레스토랑으로 가서 피자 한판과 크림 파스타 그리고 멕시칸 식 볶음밥을 주문했다. 어찌나 맛있던지, 특히나 오랜만에 먹은 크림 파스타는 바닥이 보이게 싹싹 긁어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근처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아마 여행 와서 처음이었던 것 같다, 스타벅스에 와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것이. 한국에서처럼, 우리는 커피를 각자 한 잔씩 시키고 한참 수다를 떨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 요즘 회사 일은 어떤지, 남자 친구랑은 잘 지내는지, 여행하면서 무엇이 제일 힘든지, 앞으로 여행 계획은 어떻게 되는지 등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나는 사실 이렇게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것을 정말 좋아하는데, 오랜만에 마음의 벽 같은 것은 허물어버리고 허심탄회하게 대화한 것 같다. 몹시 행복했던 시간, 정말 좋았다.  



 우리는 해가 지기 전에 호텔로 돌아왔다. 나는 그녀와 이렇게 헤어지기 너무 아쉬워 로비에 잠시 앉아있다 가자고 했다. 오랜만에 한국에서 온 친구를 본 탓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많이 의지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우리는 운동장 같은 로비의 커다란 소파에 거의 눕듯 마주 보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 잠시 동안 아무런 근심도 걱정도 없는 시간이 좋았다. 유일한 걱정이라면 그녀와 떨어져서 다시 혼자 남는 것이었다. 어느새 불쑥 밤이 찾아왔다. 사실 그녀는 비행으로 온 것이기 때문에 나와 오랜 시간을 함께 있을 수 없었다. 마침 그녀와 함께 온 팀원들이, 그녀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호텔이 공항 근처였기 때문에 나도 숙소까지 가려면 꽤나 먼 길을 가야 했으므로 더 늦기 전에 이만 헤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녀가 내게 주먹 쥔 손을 뻗었다. 내가 문득 다가오는 그녀의 주먹을 얼떨결에 받자, 그녀는 꽉 쥐고 있던 주먹을 슬그머니 펼쳤다. 그러자 그녀의 손에 들려있던 무언가가 내 손바닥 위로 툭 하니 떨어졌다. 그렇게 나는 손바닥 위로 느껴진 그것을 바라보고도 한 참을 아무 생각 없이 있다가, 이내 정신이 들고 이것이 100달러짜리 지폐라는 것을 알아챘다. 동시에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도 파악됐다. 나는 제발 도로 가져가라고 했으나, 그녀는 원래 가방에 몰래 넣어두려다 그냥 주는 것이라고, 주고 싶어서 한국에서 뽑아 온 것인데 다시 가져가게 할 것이냐고, 여행 응원금이니 받아두라고 했다. 아, 정말 받기 힘들었지만 몇 번의 실랑이 끝에 나는 결국 그녀에게 말했다. “알겠어, 이 돈 받을게. 그리고 정말 꼭 의미 있는 곳에 쓸게, 진심으로 고맙다” 그동안 인도에서 어떻게든 내 돈을 뜯어먹으려는 사람들만 만났지, 반대로 이렇게 내게 선뜻 돈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금 인사를 하고 그녀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그녀를 보내고 잠시 호텔 로비에 앉아 가만히 있었다. 이렇게 좋은 호텔에 잠시라도 더 앉아있고 싶었다. 심지어 나는 투숙객도 아니었는데 호텔 직원들이 내게 굉장히 잘해줬다. 아마도 나를 승무원으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는 무언가 깊이, 처절하고 한심한 생각이 들어버렸다. 나도 원래 이렇게 비싸고 좋은 호텔에서 좋은 줄도 모르고 누리던 시절이 있었는데, 인도인들에게 인종차별당하고 조롱당하던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런 것들이 갑자기 참 서글펐다. 누워도 좋을 만큼 커다란 호텔 로비의 소파에 앉아 나는 문득 창 밖을 보았는데 어두웠다. 정말 나가기 싫었지만 이제 더 이상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었다, 내 발로 나온 것이 아니던 가. 나는 이제 다시 이 공간을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여야 했다. 다시 전쟁터로 돌아가야만 했다. 마음의 벽은 다시금 충분히 단단히 세웠는지, 긴장은 늦추지 않았는지, 정신은 바짝 차렸는지 확인하고, 나는 호텔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현실로 돌아갔다. 내겐 잠시 황홀한 공간에서 꿈같은 시간이었다. 


 호텔을 빠져나와 마주한 도로는 어두웠고 차와 오토바이가 정신없이 얽혀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려대고 있었다. 항상 마주하던 익숙한 장면인데 기분 나쁘게 낯설었다. 나는 일단 복잡한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공항까지 와버렸다. 공항에서 릭샤를 잡아타고 “반드라로 가자”라고 했다. 숙소까지 거리가 워낙 멀어 나는 ‘반드라’라는 곳에서 택시로 갈아탈 생각이었다. 릭샤에 몸을 싣고 기사가 달리는 동안 나는 잠시 긴장을 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올라가고 있는 미터의 가격을 보았는데, 잠시 넋을 놓은 사이 금액이 무서운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이제 공항을 갓 지났는데, 이 정도 가격이 나올 수 없는 거리였다. 나는 그에게 “미터기를 만졌냐”며 소리쳤다. 그는 영어를 잘 못했는데, 이 인간들은 이런 때에 영어 못하는 것을 꼭 방어수단으로 활용한다. 나는 똑똑히 한 발음씩 그에게 “미터를 만졌냐”며 “돈이 너무 빨리 올라가지 않느냐”라고 더욱 크게 화냈다. 평소엔 이 정도까지 열을 올리진 않는데, 아마 호텔을 나오면서 우울함을 떨쳐내느라 더욱 과하게 마음을 잡은 것 같았다. 그러자 기사는 갑자기 길가로 릭샤를 멈추어 세우더니, 시동을 끄고 몸을 뒤로 돌려 나를 무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겁이 난만큼 그에게 “지금 이게 무슨 짓이냐”며 더욱 강하게 쏘아붙이자, 나를 한참 노려보던 기사가 다시 운전대를 잡고 방향을 돌려 공항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일이 단단히 잘못되고 있음을 느끼고 더 이상 화를 내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당장 멈추라며 소리 질렀지만 그는 요지부동 공항을 향해 달렸다. 결국 나는 그에게 미안하니 세워달라고 부탁했다. 체면 따위 세울 때가 아니었다. 그에게 몇 번을 더 미안하다고 사과하자 결국 기사는 다시 길가에 릭샤를 세웠고, 나는 도망치듯 뛰어내렸다. 이대로 도망쳤다간 정말 무슨 일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나는 떨리는 손으로 돈을 꺼내 나온 금액을 줘버리고, 그가 따라오는지 뒤를 힐끔힐끔 보며 거의 뛰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때 마침 앞을 지나가던 택시가 있어 나는 얼른 타버리고 숙소로 바로 가자고 했다. 택시기사의 얼굴은 꽤 순해 보였고, 미터기도 정상이었고, 지도를 확인하니 맞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이제야 긴장이 조금 풀린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이패드로 한국 뉴스를 읽었다. 한국이 너무 그리워서 뉴스를 읽었다. 


 나는 뭄바이의 살인적인 물가에 더 이상 일반적인 숙소에서는 머물 수가 없어서 가장 싸면서도 평이 괜찮았던 숙소로 방을 옮겨놓았었다. 친구를 공항에 데려다주느라 낮에 체크인만 해두고 바로 나온 탓에 내부가 어떻게 생긴지는 몰랐었는데, 나는 정말 이런 곳은 처음 봤다. 내부가 넓은 하나의 공간으로 되어있었는데, 그곳에 2층 침대가 약 20개 정도 있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40인실정도 되는 방으로, 대부분이 인도 사람들이었다. 나는 “잠만 자자”는 생각에 잡은 저렴한 숙소이긴 했다만 왠지 이곳이 적응되지 않아 몹시 외로워졌다. 고아에서 아름다웠던 시간들, 그리고 뭄바이로 돌아와 친구들과 함께 했던 행복한 시간들이 자꾸만 떠올라 혼자 남은 시간이 적응되지 않았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다, 한국이 그리웠다. 나는 그녀가 준 100달러짜리 지폐를 내가 갖고 있는 달러 지폐들과 섞이지 않도록 특별한 곳에 보관해두었다. 나중에 꼭 의미 있는 곳에 사용해서 “덕분에 이런 것을 할 수 있었어, 고마워”라고 다시 인사하기 위해서. 


 곧 한국에서 친한 친구 중 한 명이 인도에 온다. 내가 중국에 있을 때 친구가 인도로 오겠다고 약속했었고, 나는 그때부터 친구가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튼 나는 인도로 오는 친구를 통해, 이번 기회에 한국으로부터 필요한 물자를 전달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엄마는 필요한 물자를 전부 받아가라며 무엇이 필요한지 물었는데, 사실 딱히 크게 필요한 것은 없었고 가장 중요한 휴대폰을 받아야 했다. 그렇게 친구를 통해 한국으로부터 받기로 한 물자는, 휴대폰 공기계, 충전기, 선크림, 그리고 비상약 몇 개였다. 엄마가 집에서 물자를 잘 포장하고 동생이 친구를 만나 그것을 전달해주었다. 그리고 동생과 친구 두 사람 모두 성공적으로 물건을 주고받았다며 내게 연락을 해왔다. 나는 문득 한국에서 나를 위해 이렇게 움직여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새삼 참 고마웠다. 다시 한번 내 사람들이 있다는 것에 감사했다.  



 어느 날, 나는 갑자기 필요한 것이 떠올랐다. 미국 달러, 그렇지 않아도 달러가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특히 아프리카 지역을 여행할 때는 비자나 투어 값을 달러로 지불해야 하기 때문에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나는 친구에게 연락해서 추가적으로 500달러만 찾아와 달라고 부탁하고, 나온 금액은 한국 돈으로 계좌이체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것을 발단으로 사건이 일어났다.  

 나는 밤새 잘 자고 일어나 친한 친구들의 단체 채팅 방에서 자는 동안 무슨 이야기가 오갔나 확인했다. 그리고 한 친구가 남긴 말을 보고 나는 당혹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허정, 내가 30만 원 친구한테 보낼게” 그러니까 이 친구는, 500달러를 찾아오는 친구에게 30만 원을 보내서 보태주겠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대화를 확인하자마자 “잠깐!!!!! 이거 너무 당황스러운데, 그냥 나중에 내가 정말 어려울 때 부탁할 테니, 그때 보내주면 안 될까?”라고 하자, 친구는 “이미 보냈다”며 웃었다. 그렇다, 이미 입금이 끝난 상황이었다. 그리고 30만 원을 보낸 친구로부터 개인적으로 연락이 와서는 내게 말했다. “그 돈으로 클럽 가서 샴페인 사고 외국인들 기 죽여”라고 장난을 한번 치고는 “그냥 개인적인 후원이야, 영화 보는 것 같은 거지. 내가 못하는 걸 하고 있으니 후원함으로써 대리만족할게. 어쨌든 여행 잘 마치고 와서 무용담 들려줘”라고 덧붙여 말했다. 그리고 나도 친구에게 말했다. “알겠어 일단 받을게 고맙다. 그리고 나중에 어디에 썼는지 알려줄게 얼마나 네 돈이 의미 있게 쓰였는지 알 수 있게” 친구는 줄곧 내게 “30만 원이면 그래도 여행에서 일주일의 한 끼 정도는 사치 부릴 수 있잖아, 맛있는 거 사 먹어”라고 했는데, 나는 그런 사치에 쓰고 싶지 않았다. 여행이 끝나고도 영원히 기억될 수 있을만한, “이것은 내 돈이 아니라 친구가 도와준 돈으로 했지”라고 평생 기억될 수 있을만한 것을 하고 싶었다. 


 또 한 친구가 있다. 내가 호주에서 지내던 시절 부단히 나를 도와주던 한 친구가 있다. 내가 호주에서 갖고 있던 현금을 몽땅 털리고 완전히 정신이 붕괴되었던 때, 도와주겠다며 계좌를 부르라고 화내던 친구였다. 아무튼 이 친구도 에티오피아에 다녀와서는 내게 ‘풀로잉’이라는 것을 하겠다며 줄곧 계좌를 보내라고 보챘는데, 나는 지금까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대답하지 않은지 벌써 며칠이 지났는데도 계속해서 계좌를 알려달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풀로잉’이라는 것이 내가 꼭 받아야 끝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는 친구에게 계좌를 알려주었고 친구로부터 10만 원을 받았다. 참,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아이패드도 이 친구가 준 것이었지.  


 사실 이뿐만이 아니다. 여행을 출발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이모가 잘 다녀오라며 50만 원을 보내주셨었고, 퇴사 후 내가 좋아하는 한 사무장님께서도 잘 다녀오라며 10만 원을 보내주셨었다. 이렇게 고마운 사람이 많아서야, 언제 그 은혜를 다 갚을 수 있을까.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 처음엔 참 당황스러웠지만 나는 그들의 도움을 절대 잊지 않으려 꼭 글로 적고 싶었다. 선뜻 이렇게 도움을 건네기 쉽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여행이 끝나면 다른 누군가, 꿈을 쫓는 다른 누군가 있다면 이 보답을 그 친구에게 하고 싶다. 어려울 때에 도움받는 이 기분은 되풀이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나는 뭄바이를 떠나 인도의 수도, 뉴델리(New Delhi)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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