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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BABA PRO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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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ABAJUNG Apr 29. 2018

BABA PROJECT – 고아(GOA)

 고아는 인도 남서부에 위치하여 인도양을 마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과거 고아는 포르투갈의 식민지로 포르투갈령 인도의 수도이자, 포르투갈 동양 무역의 발판이었던 도시이다. 그리하여 고아에서는 인도 같지 않은 모습을 도시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를테면 거리에 사원보다는 교회가 더 많이 보이고, 소고기 스테이크를 파는 식당이 있고, 주류에 세금이 붙지 않아 다른 도시와 비교하여 가격이 매우 저렴하다는 것 등이 있다. 그러니까 고아를 다시 정리해보면, 고아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술을 마음껏 마실 수 있고, 그동안 구경도 못한 소고기 스테이크를 먹을 수 있으며, 인도양 해변에서 낮엔 해수욕을 하고 밤에는 아름다운 노을을 감상할 수 있는, 내가 생각하는 인도 최고의 휴양지라는 말이다.  


 이윽고 고아에 다다른 버스가 멈추었다. 나는 마음을 추스르고 버스에서 내려 릭샤 기사들과 흥정을 시작했다. 내가 가야 할 ‘깔랑굿 해변(Calangute Beach)’까지 가격을 맞추려는데 도무지 일정 가격에서 양보를 하지 않았다. 나도 생각하고 있던 가격을 포기하지 않자 한 기사가 “그래, 네 가격으로 해줄게”라며 다가왔다. 흥정에서 이겼다고 생각한 나는, 가격을 양보하지 않던 다른 기사들을 보고 놀리듯 웃었다. 그리고 뒤따라가던 기사가 멈춘 곳에는 릭샤가 아닌 그냥 오토바이가 한 대 서있었고, 기사는 나보고 뒤에 타서 자길 잡으라고 했다. 한 순간이라도 믿거나 방심했다간 이들에게 코를 베여버리기 일쑤였다. 나는 가격을 더 깎아보려고 했지만, 기사도 여기서는 더 양보하지 않았다. 흥정은 여기까지, 무엇을 타고 가든 내가 생각한 가격에 갈 수만 있으면 됐다. 앞에는 가방, 뒤로는 몸통만 한 배낭을 메고 빈약하기 짝이 없는 그의 오토바이 뒷좌석에 앉자 푹- 하니 내려앉는 것이 느껴졌다. 배낭의 무게 때문에 몸이 자꾸만 뒤로 쏠려서, 나는 허리에 힘을 바짝 주고 그의 허리를 꽉 잡았다. 그의 오토바이는 무거워 죽겠다는 듯 요란한 짜증을 내며 한 바퀴씩 앞으로 나아갔다. 다른 오토바이들이 빠르게 우리 옆을 지나쳐갈 때, 그저 기사는 천천히 목적지로 달렸다. 나는 그것이 좋았다, 릭샤가 아닌 오토바이 뒤에 타고 가는 것이, 기사가 아주 느린 속도로 가는 것이 좋았다. 거리의 양 옆으로 야자수나무들이 반듯하게 줄지어 서 있었고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얼굴을 스쳐갔다. 어쩐지 고아의 느낌이 좋았다. 기사는 나를 안전하게 목적지에 내려주었다. 그리고 이제 나는 약속 장소인 식당을 찾아야 했다. 만나야 할 사람이 있었다.

  

 인도의 북부도시 바라나시에 있을 때였다. 나는 어떤 식당에서 음식을 기다리던 중이었는데, 그때 한 여자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행색이 혼자 여행하는 듯한 친구였는데 꽤나 자신감에 찬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잠깐 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둘 다 목적지가 고아로 같았고 이동경로도 거의 비슷했다. 게다가 다음날 바라나시에서 카주라호로 가는 같은 기차를 탔고 심지어 우연찮게도 같은 칸을 배정받았다. 그리 인연이 되어 나는 그 친구와 카주라호에서 식사도 함께 했었는데, 마침 고아에 도착하는 날도 같아 이렇게 정말로 만나게 된 것이었다. 

 끊임없이 꺼져버리는 핸드폰을 들고, 잠시 켜진 틈을 타 지도를 확인하며 약속 장소로 가는 것이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아의 태양은 강렬하게 내리쬐었고 달아오른 바닥으로부터 후끈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고아의 여행 적기는 겨울로, 여름에는 그저 불덩이라는 말이 쉽게 이해됐다. 내가 약속 장소인 식당에 이르러 친구를 만났을 때에는, 배낭을 메고 있던 온몸이 땀으로 젖어 축 늘어져있었다. 우리는 먼저 간단하게 인사를 하고, 서로 먼 길을 와서 고아에 이른 것을 축하하기 위해, 그리고 그토록 고대하던 고아 휴양의 시작을 알림으로써 아침식사와 맥주를 한 병씩 들었다. 내가 고아에 온 가장 큰 이유 술, 그동안 비싸서, 두려워서, 혼자라서 참아왔던 술을 나는 이곳에서 폭발시키기로 했다. 나는 작은 맥주 한 병을 순식간에 해치워버렸다.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숙소를 잡았다. 해변에서 가까운 곳에 괜찮은 숙소가 있어 이곳에서 지내기로 금방 정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고아를 즐기기 위해서는 먼저 해야 할 몇 가지가 있었으므로 그것을 하러 거리로 나왔다. 우리는 길거리에 넘쳐나는 수많은 옷 가게 중 하나를 골라 들어갔다. 휴양지에 맞는 옷으로 갈아입기 위해, 친구는 수영복을 샀고 나는 ‘GOA’라고 쓰여있는 민소매 티셔츠를 하나 샀다. 사실 고아에 있는 대부분의 남자들은 윗옷을 입고 있지 않았으므로, 나는 쉽게 훌렁 벗어버릴 수 있는 것이 하나 필요했을 뿐이었다. 다음으로 우리는 고아에서 지내는 5일간 사용할 오토바이가 필요했다. 고아는 해안선을 따라 다른 매력을 가진 해변이 많이 있는데 서로 간 거리가 꽤나 멀었고, 잘하는 식당을 수월하게 찾아다니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오토바이가 한 대 필요했다. 우리는 최대한 싼 오토바이를 찾으러 이 가게, 저 가게를 다 돌아다녀 보았는데, 그중 어떤 가게의 주인이 “저게 제일 싼 거야”라며 한 녀석을 가리켰다. 내 시선이 다다른 녀석은, 온통 흠집투성이에 곧 부서질 것 같은 오토바이였다. 그리고 우리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이 녀석으로 골랐다. 이 녀석만큼 고아에 잘 어울리는 오토바이는 어딜 봐도 없었다. 이제 문제는 면허였다. 나는 한국에서 국제운전면허증을 만들어오긴 했지만, 이것은 차를 위한 것이지 오토바이를 몰 수 있는 면허는 아니었다. 주인은 내게 면허증을 달라고 했고, 나는 한국 면허증과 국제운전면허증, 그리고 여권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그는 그것을 제대로 보지도 않았으며 내게 곧바로 오토바이 키를 주었다. 그리고 나는 헬멧을 달라고 했는데, 달랑 하나만 주며 “운전자만 쓰면 돼”라고 했다. 뭐, 이곳에서 지켜야 할 법이란 것이 있긴 있을까. 



 우리는 스쿠터를 타고 숙소로 돌아와 바로 앞에 있는 해변으로 달려갔다. 숙소 앞 계단을 지나 모래사장 사이로 난 돌길을 따라가자 눈부신 바다가 황홀하게 보였다. 정말 이것이 얼마만인지, 하늘과 수면이 맞닿아 이룬 지평선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햇살이 바다를 비추어 생긴 찬란하게 빛나는 진주가 헤엄치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래사장까지 돌진하던 파도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부서지는 소리를 듣는 것이 얼마만인지, 그로 인해 생긴 새하얀 물거품이 모래 위에서 춤을 추는 것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른다. 여행을 처음 떠나온 해안도시 중국 칭다오(Qingdao)에서 바다를 본 후로 처음 보는 바다였다. 더욱 굉장한 것은, 그때 본 바다는 태평양이었다면 이곳은 인도양이라는 것! 그동안 참 멀리까지도 왔다는 생각에 정말 뿌듯했다. 모래사장에는 선배드가 둘씩 짝지어있었고, 그 옆으로 꼭 파라솔이 하나씩 따라다녔다. 햇살이 파라솔에 막혀 차마 들어가지 못하는 그곳에는, 사람들이 자리를 펴고 누워 일광욕을 즐기고 있었다. 인도 사람들이 가장 많았고 유독 나이가 지긋한 서양인 부부들이 많았다. 우리도 적당한 자리를 찾아 누웠고, 간단한 식사거리와 인도 맥주 ‘King Fisher’를 각각 한 병씩, 가장 큰 놈인 650ml짜리로 주문했다. 무언가 먹기만 한다면 이곳에서 해가 질 때까지 누워 일광욕과 해수욕을 즐길 수 있었다. 정녕 이곳이 인도가 맞는 것인가 싶을 정도로, 고아의 바다는 평화롭고 아름다웠다. 나는 맥주 한 병을 금방 다 마시고는, 윗옷을 훌렁 벗어 바다로 뛰어들어갔다. 그리 깊지 않은 수심에 적당히 파도가 있어 혼자 놀기에도 재미있었다. 참, 이곳은 인도양이었지, 세상에, 내가 인도양에서 수영을 하고 있다니. 나는 곧 세계의 모든 바다에서 수영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영을 하고 나오니 더위가 싹 가셨고, 입에 짠맛이 돌아 맥주를 한 병 더 주문했다. 나는 자리에 누워 맥주를 금세 비우고, 또 한 병, 그리고 또 한 병, 그렇게 나는 해가 질 때까지 하루 종일 맥주를 마시며, 지친 여행 속의 휴가를 즐겼다.  


 그렇다, 이것은 내게 휴가인 것이었다. 두 달 반 동안 여행하며 생겼던 크고 작은 끊임없는 문제들, 그리고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쉬지 않고 했던 걱정과 고민, 한정된 예산의 압박감, 타지에서 외지인으로서의 긴장과 이방인으로서의 서러움, 밤이 되면 갑자기 물밀 듯 밀어닥치는 외로움,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 등, 나는 꽤 지쳐있었다. 여행이 장기로 들어가면, 일상이 된다. 새로운 도시에 적응하는 것이, 새로운 곳에서 자는 것이,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이, 모든 것에 다시 적응하는 것이, 그리고 적응한 모든 것들로부터 이별을 고하는 것이, 일상이 된다. 나는 지친 일상으로부터 일탈이 필요했으며 휴식이 필요했고, 최적의 장소로 고아를 선택했던 것이었다. 나는 인도에서 한 달 정도 사용할 수 있는 생활비를 환전하여 휴가비용으로 마음껏 쓰기로 했다. 그동안 마시지 못했던 술도 마음껏 마시고 싶었고, 맛있고 비싼 음식도 먹고 싶었다.  


 어느덧 시간이 꽤나 지났고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누군가, 여행하면서 무슨 음식이 가장 그리운지 물어보면, 나는 그때마다 해산물이라고 대답했다. 물론 회 말이다, 그중에서도 방어회에 소주가 정말 가장 먹고 싶긴 했지만, 아무튼 해산물이 먹고 싶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저녁으로 그토록 기대하던 해산물 요리를 먹으러 가는 것이었다. 우리는 친구가 아는 한 식당으로 갔다. 자리에 앉아 고개를 돌리면 바로 해변이 보이는 곳에 위치한 고급스러운 해산물 식당이었다. 곧 점잖은 직원이 다가왔고, 우리는 ‘King-Fish 구이’, ‘Crab Curry, ‘Fried Rice’, 그리고 맥주를 주문했다. 그렇게 설레는 마음으로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고개를 돌려 바다를 바라보았는데, 어느덧 부끄러운 태양이 발그레한 얼굴을 지평선 너머로 감추려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멀리서 엿보는 것이 정말 행복했다. 회사를 그만두지 못하고 그렇게 원치 않는 삶을 이어나가고 있었더라면, 만약 그랬더라면 세상 깊숙한 곳에 이렇게 아름다운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까, 이렇게 세상을 넓게 볼 수 있었을까. 점점 멀어져 가는 태양을, 그 새빨간 태양 아래에서 거뭇거뭇 간신히 형체만 보이던 모래사장을 뛰어다니는 아이들을, 아주 짧은 시간만 허락된 노을 지는 빨간 세상을 즐기는 연인들을, 나는 그저 바라보았다. 그들이 느끼고 있을 마음의 색들이, 내게도 느껴졌다.  



 나는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친구가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나는 내가 그렇게 놀랄만한 이야기를 했나 당황해있었는데, 친구가 “생선 나온다!”라며 다시 소리쳤다. 뒤를 돌아보자 길고 커다란 생선 한 마리가 멋스럽게 요리된 채 하얀 접시 위에 올려있었고, 점원은 그것을 소중하고 고귀하게 받쳐 들어 우리에게 들고 왔다. 그의 표정은, 우리의 반응이 상당히 마음에 든다는 듯 인자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나는 입 안에서 침이 마구 나오는 것을 느꼈다. 생선 한 조각을 뜯어 접시에 올리기도 전에 입에 바로 넣어버렸다. 생선에서 흐릿한 비린내가 났는데 그 냄새가 묘하게 인도의 바다와 잘 어울려 오히려 더욱 풍부한 맛이 났다. 나머지 음식이 마저 나오고, 나는 그때부터 정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Crab Curry와 Fried Rice를, 마치 김치찌개에 밥 말아서 먹듯 비벼서 한 숟갈씩 입에 넣었다. 그리고 물 마시듯 맥주를 벌컥벌컥 마시고 또 생선살을 한 조각 뜯어먹었다. 정말 최고였다. 눈에서 눈물이 흐르지 않았을 뿐이지 마음속에서는 이미 오열을 하고 있었다.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계산을 하고 나올 때는, 그 가격을 듣고 또다시 울음이 터져 나오는 줄 알았다. 저녁 한 끼 식사의 가격이 자그마치 인도에서 5일 치 생활비였다. 친구가 돈을 갖고 있었기에 이것을 계산할 수 있었지, 만약 돈을 내가 갖고 있었다면 그대로 놀라 도망쳐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아직 완전히 휴가를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특히 자금 문제에서는 더욱 그렇다. 아무튼 오랜만에 생선요리를 실컷 먹었다. 우리는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 들러 맥주 한 박스와 과자 몇 개를 사 왔다. 그리고 노트북과 스피커를 연결해 환상적인 영화관을 만들고, 매일 저녁 영화를 두 세편씩 보며 맥주를 마셨다. 영화 보면서 마시는 맥주가 어찌나 맛있던지, 우리는 3일 만에 맥주 2박스를 해치웠다.  


 고아에서 하루하루는 매일이 같았다. 아침에 눈을 뜨면 만나 근처 식당에 가서 아침식사를 하고, 해변으로 가서 적당한 자리를 찾아 누웠다. 하루가 지나 사라진 취기를 다시금 충전하기 위해 맥주를 마셨고, 윗옷을 훌렁 벗어 바다로 뛰어들어가 수영을 했다. 자리로 돌아와 맥주를 마시고 노곤히 잠이 쏟아져 낮잠을 자기도 했다. 일어나면 허기져 그 자리에서 점심을 먹었고, 파라솔을 접고 태닝을 하며 책을 읽기도 했다. 참, 한량이 따로 없었다. 그러면서 우리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보다 한 살 어린 이 친구는 글을 쓰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정말 글로 돈을 만드는 친구였다. 나는 차마 이 친구에게 글을 쓴다는 말을 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조심스럽게 “그냥 블로그에 끄적이고 있어”라는 정도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해변에 나갈 때나 어디를 갈 때 항상 노트북을 들고 다녔으나, 거의 글을 쓰지 못했다. 혹시나 이 친구가 내 글을 본다면, 초등학생이 쓰고 있는 이 일기를 본다면, 나는 바닷물 속으로 다시 뛰어들어가 익사해버릴지도 몰랐다. 그래서 나는 이 친구가 자거나, 화장실을 가거나 아무튼 글 쓰는 것을 볼 수 없을 때, 그것도 아니면 노트북을 볼 수 없도록 조금 내 쪽으로 돌려 글을 썼다. 글로 돈을 만들 수 있는 필력은 어느 정도나 돼야 하는 것인지, 지금 누가 내 글을 보고 돈을 준다고 하면 나는 거절할 것 같다.  


 어느 날, 안주나 해변에서 여유로운 시간을 마치고 해가 그윽이 질 무렵 오토바이를 타고 숙소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서 경찰이 내게 멈추라는 손짓을 했다. 나는 길가에 오토바이를 세우러 가고 있었는데 경찰이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로 몸을 날려 오토바이를 강제로 세웠고, 일어나지 말고 키를 당장 뽑으라며 내게 윽박질렀다. 나는 시동을 끄고 키를 뽑아 그에게 주었고, 그는 내게 면허증을 요구했다. 나는 오토바이를 빌릴 때처럼, 한국 면허증, 국제운전면허증 그리고 여권을 경찰에게 건네었다. 사실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내 면허로는 오토바이를 몰 수 없다는 것을, 그리고 경찰에게 걸릴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하여 항상 조심하고 있었지만 결국 걸리고 만 것이었다. 아무튼 이렇게 되어버려 나는 어떻게든 되라는 생각으로 면허증을 주었다. 경찰은 내게 “네 면허증으로 오토바이 운전은 못하게 되어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어떻게든 넘어가 볼 생각으로 “그래? 한국에선 오토바이 몰 수 있는데?”라고 거짓말을 해보았지만 그는 강경했다. “아니야, 여기 쓰여있듯이 이건 오토바이 몰 수 없는 면허야. 그러니까 무면허 벌금 1,100루피, 그리고 헬멧 쓰지 않은 벌금 500루피, 총 1,600루피다” 그리고 우리의 귀를 의심하게 만든, 이어지는 그의 한 마디가 참 충격적이었다. “자, 말해봐, 얼마 줄래?” 뭔가 싶었다. 방금 1,600루피라고 해놓고 얼마를 줄 것이냐고 다시 묻는 건, 이해가 안됐다. 내가 아무런 대답을 못하자 그가 종이에 750루피를 적으며 한다는 말이, “반값도 안돼, 어떻게 할래 빨리 말해”라며 죄진 사람처럼 미친 듯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렇다, 지금 이 경찰은 내게 뒷돈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나는 혹시나 하고 흥정을 해보았다. “우리가 지금 돈이 많이 없어서, 500루피에 봐주면 안 될까?”라고 하자, “600루피에 해줄게, 빨리 내놔”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빨리 주고 끝낼 생각으로 주머니를 뒤적여보았는데, 마침 딱 500루피밖에 없었다. 우리가 “이거뿐이 없는데..”라고 하자, 경찰은 “됐어, 그거라도 줘”라며 돈을 받아갔는데, 들고 있던 서류철로 돈 받는 것을 어떻게든 가리려고 애쓰던 그 모습이, 참 진상이었다. 그리고 그 경찰은 우리에게 “이제 가”라고 말하고는, 여전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어느 곳으로 도망갔다.  



 나는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방금 무슨 일이 지나간 것인지, 잠시 어리둥절하다가, 어처구니없는 이 상황에, 나는 역시 헬멧을 쓰지 않고 숙소로 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경찰의 행동, 어떻게 저렇게 뻔뻔하고 자연스럽게 돈을 요구하다니, 흥정을 하려 들다니, 법을 돈벌이 수단으로 사용하다니, 외국인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것일까. 저것은 릭샤 기사인가, 길거리 노점상인가, 경찰인가, 국가를 위해 일하는 그 공무원이 맞는 것 인가. 그래, 아까 말한 인도에서 지켜야 하는 법? 당연히 있다. 그러나 그것은 정부 마음대로, 공무원 마음대로, 경찰 마음대로, 그저 지들 마음대로, 지키고 싶을 때는 법이 되고, 돈이 필요할 때는 돈벌이가 되는 것이다. 경찰에게 준 500루피 따위 전혀 아깝지 않았다. 부패할 대로 부패해버린, 썩을 대로 썩어버린 경찰, 구토가 날 만큼 역겨운 냄새가 진동했다. 인정한다, 법은 내가 먼저 어긴 것이 맞다.  


 고아를 떠나기 하루 전날, 무리한 태닝으로 살이 발갛게 익어버렸다. 더 이상 해안가에 한가로이 앉아있을 수 있는 몸이 아니었다. 우리는 해변으로 가지 않았다. 친구가 한국으로 보낼 엽서를 사고 싶다고 해서 우리는 고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팔 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경찰인지, 주차요원인지, 아무튼 제복 같은 것을 입고 있는 사람만 보이면 이제 덜컥 겁이 났다. 또 나를 잡으려 든다면 이번에는 그냥 도망가버릴 생각이었다. 그러던 중 친구가 무언가 발견하고는 내게 소리쳤다. “어, 저기 핸드폰 수리점이다” 

 나는 고아에 온 후로 줄곧 핸드폰 없이 지냈다. 숙소에도 와이파이는 없었고, 연락이 필요할 때는 친구가 인터넷을 빌려주긴 했지만 사실 고아 대부분의 지역에서 인터넷이 원활하지 않았다. 크게 불편한 것은 없었으나, 휴가가 끝나고 다시 여행으로 돌아가려면 아무래도 수리가 필요하긴 할 것 같았다. 나는 수리업자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증상을 설명했다. “중국에서 배터리에 문제가 생겨서 새것으로 바꾼 지 한 달밖에 되지 않았는데, 무슨 이유에선지 충전이 안돼, 좀 봐줄 수 있어?” 그러자 그는 “맡기고, 한 시간 후에 다시 와”라고 했다. 우리는 엽서를 찾으러 여기저기 돌아다녀보았지만 결국 찾지 못했고, 근처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에어컨 바람을 쐬며 쉬었다. 그리고 시간이 되어 다시 수리점으로 돌아갔다. 그는 내게 “배터리는 이상 없는데,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네”라며 핸드폰을 돌려주었다. 대체 뭘 확인한 건지, 나는 핸드폰을 켜 보았는데, 그가 체크한답시고 만진 핸드폰은 이제 아예 켜지지도 않았다. 전에는 충전만 안 됐을 뿐 그나마 1%라도 켜지긴 했는데, 이제는 까만 화면에서 요지부동이었다. 중국에서부터 그렇게 말썽을 일으키며 내 마음을 쥐락펴락했던 핸드폰이 이윽고 인도 고아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나는 문득 가방에 있는 아이패드가 생각나서, 혹시 핸드폰에 있는 심카드를 아이패드에 옮길 수 있는지 물었는데, 어댑터가 있으면 가능하다고 했다. 나는 어댑터는 어디서 구할 수 있는지 물었는데, 그들은 내게 서비스로 하나 줄 테니 가지라고 했다. 핸드폰을 저 세상으로 보내 놓고 이런 친절이라, 아무튼 고마웠다. 나는 혹시나 하고 아이패드에 심카드를 넣어봤는데, 인터넷을 잡았다! 좋다, 이로써 일단 가장 중요한 인터넷, 한국과의 연락, 그리고 지도는 해결됐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아직 완전히 해결된 것이 아님을 알았다. 내가 갖고 있는 아이패드는 완전 초기 모델로, 애플의 모든 지원이 끊겨있었다. 워낙 오래전 모델이라 인터넷도 3G밖에 잡지 못했는데 너무 느려서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었다. 버전이 낮다며 받을 수 없는 애플리케이션이 많았고, 심지어 애플 로그인도 되지 않아 문자(I-Message)를 받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니까 정말 인터넷만 될 뿐, 전화로서의 기능은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장기 여행할 때에 전화번호가 없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무엇을 예약할 때, 예약하고 확인 문자를 받을 때, 여행 시 필요한 회원가입을 할 때에 문제가 된다. 또한 위급할 시 대사관에 전화를 걸어야 할 때, 예약한 숙소를 찾지 못해 주인에게 전화해야 할 때 등 전화가 필요할 때도 많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핸드폰이 아예 켜지지 않는 것은, 이것은 심각했다. 그동안 핸드폰에 저장해둔 모든 정보들 이를테면 각종 사이트의 아이디와 비밀번호, 은행 공인인증서, 스케줄러 등을 잃어버렸다. 그로 인해 사이트에 들어가 잃어버린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찾기 위해선, 아무튼 뭐라도 하려면 빌어먹을 ‘Pin번호’라는 것을 문자로 받을 수 있는 핸드폰 번호가 필요했다. 하다못해 스타벅스에서 와이파이를 좀 쓰려고 해도 저 Pin번호를 받아야 했다.  



 좋다, 그러니까 결국 돌고 돌아 다시 핸드폰이 필요하다는 결과로 귀결됐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았다. 첫 번째 해결법, 한국에서 핸드폰을 사서 곧 인도로 놀러 오는 친구 편으로 보내는 것, 그러나 한국에선 약정 없이 핸드폰을 사는 것이 불가능했으며 매장에서도 품절이라고 했다. 두 번째 해결법, 인도에서 핸드폰을 구입하는 것, 그러나 인도는 한국에 비해 가격이 더 비쌌으며 신용카드로 결제 시 수수료까지 나갈 것이었다. 게다가 인도에서 산 핸드폰이 한국에서 수리가 잘 될지도 의문이었다. 세 번째 해결법, 한국에서 중고 핸드폰을 사서 친구 편으로 보내는 것, 나는 남은 몇 개월의 여행에서 굳이 최신 핸드폰이 과연 필요할까 하는 의문이 줄곧 들었다. 그래서 중고 핸드폰을 사려했지만 이것 역시 가격이 만만치 않았고, 상태가 어떨지도 몰랐다. 도저히 마땅한 해결방법이 떠오르지 않아 몇 시간을 계속 골머리를 썩고 있었다. 덕분에 나는 고아에서 남은 휴가를 온통 이 생각에서 헤어 나오질 못했고, 친구는 심심해했다. 그러다 문득, 정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핵심적인 문제는 공기계가 없다는 것, 그렇다면 해답은 어떻게든 공기계를 만들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생각난 것이 엄마의 핸드폰, 엄마는 핸드폰을 지금까지 약 4년 이상 쓰고 있었는데 나름 수리도 잘 받아서 상태가 꽤 괜찮았다. 당연히 약정은 오래전에 끝났고 생각해보니 바꿀 때가 지났다. 나는 바로 동생에게 연락했다. “내일 가서 엄마 핸드폰 새것으로 바꿔주고, 쓰던 것은 초기화해서 친구 편으로 인도로 보내줘” 그리고 다음날, 엄마에게는 새 핸드폰이 생겼고 내게는 공기계가 생겼다. 이로써 이 문제도 해결했다. 


 고아에서의 마지막 저녁, 우리는 숙소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해안가로 갔다. 꽤 늦은 시간이라 길거리에는 경찰도 없었고, 밤바람이 기분 좋게 불었다. 가로등도 없고 사람도 없는 어두컴컴한 곳을 지나기도 했는데 무섭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소슬한 고아의 밤거리를 지나 이윽고 안주나 해변에 도착했다. 우리는 이미 이곳에 몇 번을 와본 터라, 우리를 챙겨주는 점원이 생겼을 정도였다. 나는 그 점원이 좋았다. 언제나 해맑고 정성스러운 미소를 띠고 모래사장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일을 했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해변을 어슬렁거리는 우리를 본 점원이 가까이 뛰어와서는, 그토록 반갑게 인사하며 이리 와서 앉으라고 했다. 우리는 역시 그 친구가 있는 식당에서 마지막 날을 보내고 싶었다. 모래 위에 아기자기 차려진 테이블에는 작은 촛불이 하나 켜 있었는데 용케 꺼지지도 않고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이리저리 춤을 추고 있었다. 우리는 해산물 요리와 맥주를 주문했다. 바다는 잠도 없는지, 밤이 깊었는데도 여전히 쉬지도 않고 파도를 밀어내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열 걸음만 걸어도 발을 축축이 적실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파도가 부서지고 있었다. 곧 점원이 지글거리는 해산물 요리를 가지고 왔고, 그것을 본 우리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점원에게 연신 고맙다고 하자, 그는 안 그래도 좋던 기분이 더욱 좋아졌는지, 어떤 전쟁도 끝내버릴 수 있을 만큼 빛나게 활짝 웃으며, 뛰어갔다.  



 황홀한 식사를 마치고 어느덧 시간이 꽤 지났다. 나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맥주를 홀짝이고 있었는데, 순간 강하게 친 파도가 부서지더니 이윽고 우리 자리를 덮쳐버렸다. 나는 다리를 번쩍 들어 그것을 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순간 너무 신나 물을 피하며 환호를 질렀다. 기분 최고였다, 최고로 좋았다! 가만 보니 바닷물이 눈에 띄게 가까운 곳까지 차 올랐다. 우리는 이만 떠나기로 했다. 점원에게 우리는 내일 다시 뭄바이로 떠난다고 인사를 했는데, 그 말을 알아 들었는지 못 알아 들었는지, 어떻게 하면 그렇게 시종일관 밝은 미소를 유지할 수 있는지, 어쩜 그렇게 표정만으로 사람 기분을 좋게 하는지, 그저 우리를 보며 웃고 있었다. 나는 인도에 와서, 아니 배낭여행을 하며 처음으로 우러나는 마음에 TIP을 주었다. 큰돈은 아니었지만 꼭 주고 싶었다, 덕분에 고아에서 마지막 식사를 멋지게 마칠 수 있었음에. 



 고아를 떠나는 날, 아쉽거나 한 것은 없었다. 충분히 즐길 만큼 즐겼고 마침 떠돌아다니는 여행이 다시 그리워지던 참이었다. 우리는 그늘이 진 식당에 앉아 아침을 먹고, 간식을 먹고, 저녁까지 먹었다. 그리고 7시에 뭄바이로 출발하는 버스를 타러 갔다. 이것은 비싸서 그동안은 탈 생각도 하지 않았던, 누워서 갈 수 있는 슬리핑 버스(Sleeping Bus)였다. 고아에서 뭄바이로 돌아가는 시간, 올 때와 마찬가지로 12시간을 가야 했다. 앞으로 남은 인도의 여정에서 슬리핑 버스를 타볼 일은 더 이상은 없을 것 같아, 조금 비싸더라도 나는 꼭 한번 타보고 싶었다. 슬리핑 버스는 굉장히 특이했다. 지금까지는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버스, 한국같이 좁은 나라에서는 만들 생각조차 하지 않은 구조의 버스였다. 버스에 오르면 가운데로 길이 나있고, 양 옆으로는 파란 커튼이 쳐져 있었다. 나는 내 자리 앞으로 가서 커튼을 걷어보았는데, 충전할 수 있는 콘센트도 있었으며 자리도 꽤나 넓고 아늑했다. 언제나 그렇듯 잠자리를 만들고 있는데, 그때 친구가 내게 편지를 건넸다. 지난밤, 한국에 있는 친구들에게 편지를 쓰며 내 것도 하나 썼다는 것이다. 이런, 나는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 무척 미안했다. 우리는 내일 보자며 인사를 하고, 각자 자리로 올라가 누웠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출발했다. 누워서 고개를 돌리면 창 밖이 보였다. 달리는 버스에 누워 창 밖을 보는 기분이란, 정말 특이했다. 나는 친구의 편지를 읽어보았다. 종이에 손 글씨로 정성스레 써준 편지, 나는 이것을 다 읽고 파일에 끼어두었다. 한국에 꼭 가져가야 할 기념적인 것들을 모아두는 파일이었다. 나는 어느새 스르르 잠에 들었고, 눈을 떴을 때는 기사가 뭄바이에 도착했으니 어서 내리라고 성질을 버럭 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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