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수도 뉴델리(New Delhi)에 도착했다. 나는 이곳에서 무려 6일을 지낼 예정이었다. 번잡하고 어지러운 도시를 좋아하지 않는 내가 뉴델리 같은 대도시에 이토록 오래 머무르려는 까닭은, 다음 여행지인 아프리카 케냐(Kenya)에 가야 할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나 남아메리카의 국가 중 황열병(Yellow Fever) 위험지역에 입국하기 위해서는 황열병 예방접종을 받아야 하며, 이를 증명하기 위한 ‘국제공인 예방접종증명서(International Certificates of Vaccination)’를 소지해야 한다. 나는 한국에서 여행을 계획하던 때 황열병 위험지역에 갈 일정이 없었던 데다가 너무나도 비싼 예방접종 가격에 이것을 미루어두었었다. 그러나 혹시나 마음이 바뀌어 그런 지역에 가게 된다면 인도 뉴델리에서 예방접종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어 이곳에서 받고 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10만 원 이상의 가격을 요구한다면 인도에서는 고작 300루피, 그저 점심식사 한 끼의 가격밖에 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아프리카까지 여행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고 ‘황열병 국제공인 예방접종증명서’가 꼭 필요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주사를 맞고 심한 몸살 기운을 겪는 사람이 많다고 해서 나는 몸져누울 것을 감안하여 6일이라는 긴 시간을 이곳에서 지내게 된 것이었다. 게다가 뉴델리에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유적지와 역사적인 건축물이며 볼 것이 꽤 많았기에 나는 오랜만에 관광을 하고 싶기도 했다.
뉴델리의 중심가이자 외국인 거리인 파하르간지(Paharganj)는 지독하게 정신 사나운 곳이었다. 모래먼지가 휘날리는 거리에 차, 오토바이, 자전거, 사람 할 것 없이 얽히고설켜 북새통을 이루었다. 릭샤에서 내려 숙소까지 걸어가는데 “닌하오” “곤니찌와” “친구” “헬로우”등 온갖 언어가 다 들려왔다. 숙소에 도착한 첫날은 피곤해서 그저 침대에 앉아 글을 썼고 다음날이 되어서야 유적지를 관광할 생각으로 나왔다. 번잡한 인도의 수도에는 고급스러운 백화점이나 화려한 건물만이 있을 줄 알았지만, 생각보다 유적지가 많이 남아있어 역사적으로도 매우 의미 있는 도시였다. 요즈음 나는 이런 역사적인 유적지를 찾아다니는 것에 부쩍 재미 들렸다. 나는 붉은 요새라 불리는 레드포트(RedFort)와 인도에서 가장 큰 이슬람사원인 자미 마스지드(Jami Masjid), 그리고 이슬람 세력의 승전을 기념하며 세운 쿠툽 미나르(Qutub Minar)에 갔다. 인도에서 이런 곳들을 가자면 현지인에 비해 매우 비싼 입장료를 지불해야 하는데, 배낭여행을 하는 많은 친구들은 이 돈이 아까워 혹은 이런 것들에 관심이 없어 그냥 지나치는 경우가 많았다. 나는 그런 것들이 참 아쉽기도 했다. 물론 사람들을 만나고 술을 마시며 어울려 노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을 위해 배낭여행을 떠나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실 비싼 가격이라고 해봐야 고작 8,000원 남짓한 돈인데, 복잡한 역사 속에서 끊임없는 전쟁을 거쳐 기꺼이 그 모습을 보존하고 있는 훌륭한 건축물을 감상하는 가격이라고 생각하면 절대 비싼 가격이 아니었다. 늦은 나이에 많은 것을 포기하며 힘겹게 만든 시간이었기에 나는 죽기 전에 보고 싶은 것들을 모조리 마음에 담아 가고 싶었다. 다만 나는 유적지까지 가는 릭샤 값, 그러니까 4KM 정도 되는 거리를 1,600원이나 주고 가는 교통비는 무척이나 아까워 걸어갔다. 하루 20KM는 거뜬히 걸어 다닐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있는데, 또한 걸으면서 마주하는 것들의 인도의 참모습인데, 이런 것들을 놓쳐가며 지불하는 교통비가 그렇게 아까울 수 없었다.
요즈음 줄곧 늦잠만 자던 나는 모처럼 알림을 맞추어 놓고 일찍 일어났다. 황열병 예방접종을 맞으러 가야 했기 때문이었다. 타국에서 병원 업무를 봐야 한다는 생각에 언제부터 마음 한편에 자리 잡고 있던 걱정을 마침내 해결할 날이 온 것이었다. 나는 몇 가지 정보를 미리 알아두었다. 황열병 예방접종은 인도 정부에서 공식으로 허가한 병원에서만 가능하며 매주 수, 토요일 아침 9시 30분부터 접수를 시작한다. 백신이 한정적이라 하루에 맞을 수 있는 사람의 수는 약 100명이 안 되었으며, 병원 홈페이지에는 선착순으로 접수를 받는다고 적혀있었다. 내가 병원에 찾아간 날은 토요일이었으며 다음 주 화요일에는 뉴델리를 떠나야 했기에 이 날 무조건 예방접종을 맞아야만 했다. 나는 분명 사람이 많이 몰릴 것이라 예상하고 접수시간보다 1시간 일찍 병원에 도착했다. 병원은 꽤 컸으며 입구에 ‘Yellow Fever Vaccination’이라고 큼지막하게 적혀있어 잘못 찾아왔다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됐다.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자 낡은 건물이 하나 보였고 나는 문을 열어 들어갔다. 서로 마주 보고 있는 여러 개의 방들은 이렇다 할 문이 없었으며 줄지어 있는 병원 침대가 보였다. 이따금씩 어디선가 환자의 비명소리가 들려 섬뜩하기도 했다. 나는 4층에 있는 접종장소로 올라갔다. 이미 20여 명 정도 되는 사람들이 앉아있었으며 나는 “황열병 예방 접종하는 곳 맞나요?”라고 물었는데 그들은 “맞아요”라고 대답했다. 실내는 전등이 켜져 있었으나 몹시 우중충하고 습한 기운이 돌았으며 많은 사람들에 비해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나는 대기실에 앉아 접수가 시작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때, 두 눈에 스치듯 들어온 문구가 있었다. 그것은 내가 열리길 기다리던 철문 앞에 무심하게 붙어있던 것이었으며 나는 스치듯 본 문구를 제대로 본 것이 맞는지 철문 가까이로 가서 다시금 확인했다. 얼룩진 하얀 종이에 퉁명스럽게 써진 문구를 차근차근 읽어보고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황열병 예방접종은 오직 온라인 예약자에 한해서만 진행됩니다” 나는 ‘Dr. Ram Hospital’의 공식 홈페이지에서 예방접종에 대한 모든 정보를 정독했지만 이런 중요한 내용은 그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다리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문 앞에 예약자만 받는다고 쓰여있던데, 온라인 예약하고 오신 건가요?”라고 내가 묻자 한 인도인 부부가 “네, 예약하고 왔죠. 지난주에 왔었는데 예약을 안 해서 접종 못 받고 돌아갔었거든요”라고 대답했다. 나는 이것을 듣고 몹시 조급해졌다. 나는 부부에게 “혹시 예약하는 사이트를 알고 계신다면,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는데, 그들은 흔쾌히 허락하고 나를 옆에 앉혔다.
내가 갖고 있던 아이패드를 부부에게 넘겨주자 그들은 예약사이트로 접속해서 내게 돌려주었는데 나는 그것을 보고 또 한 번 한숨이 터져 나왔다. 간단한 예약마저도 핀 번호를 문자로 받아 인증절차를 거쳐야 했다. 나는 부부에게 휴대폰이 고장 나 문자를 받을 수 없다고 말했는데 그들은 별 문제 아니라는 듯 자신의 휴대폰으로 인증절차를 대신해주었다. 어찌나 고맙던지, 그들의 머리 뒤에서 빛이 새어 나오는 듯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간 예약사이트는 또다시 나를 절망하게 했다. 당일 예약은 불가능했으며 앞으로 2주간의 예약이 꽉 차있었다. 머리가 복잡해지면서 문득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인도의 수도인 뉴델리에서 정부의 공식 허가를 받은 몇 없는 병원이 이런 중요한 정보를 홈페이지에 게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불평하고 있을 때가 아니라 어떻게든 이것을 해결해야 할 때임을 곧 깨달았다.
부부는 내게 한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예방접종을 예약해놓은 채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분명히 있을 테니 의사에게 직접 가서 부탁해보라는 것이었다.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예약을 해둔 채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은 어딜 가나 있기 마련이었다. 접수시간이 한참 지나서야 의사가 왔는데 생각보다 젊은 남자의 등장에 적잖이 당황했다. 그러나 대화가 통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기대를 갖고 의사에게 찾아갔다. 양 손을 가지런히 모으는 것이 인도 사람들의 눈에도 공손해 보일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마치 교수님을 찾아뵈어 부탁하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상체를 조금 숙이고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예약하지 못한 상황을 설명했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의사는 부드럽고 온화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예약한 사람들 접종 끝나고 11시에 다시 나를 찾아오세요, 약이 남는지 지켜보죠” 희망 가득한 그의 대답에 나는 방긋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공손히 자리를 빠져나왔다.
이름을 불러도 나타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러고 나면 직원은 다음 사람을 호명했다. 그런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내 마음은 점차 차분해졌으며 안심했다. 어느덧 예약한 사람들의 예방접종이 모두 끝나고 간호사가 나를 불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안에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있어 나는 아직 예방접종이 다 끝나지 않은 것인가 하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은 나처럼 예약을 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온화하고 부드럽던 의사의 표정은 아까와는 다르게 사뭇 진지하며 엄숙했다. 나는 문득 불안한 기분이 들었다. 의사는 내 옆에 앉아있는 여자에게 황열병 위험지역으로 언제 입국하는지 물었는데, 그녀가 다음 달이라고 대답하자, 의사는 그렇다면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아있으니 오늘은 그냥 돌아가고 다음에 예약하고 와서 맞아도 충분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윽고 질문은 내게 이어졌다. 의사의 같은 질문에 나는 “다음 주에 케냐 나이로비에 갑니다”라고 대답했는데 의사는 잠시 골똘히 생각에 잠기더니 이내 간호사에게 “이분은 시간이 없으니 예방접종 진행해주세요”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도 나는 여전히 암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가슴속에서는 다채롭고 화려한 폭죽이 터지고 있었다.
같은 질문이 다음 사람을 향해 가있는 동안 나는 접수증을 작성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소리가 들려 그곳으로 고개를 돌려보았는데, 간호사가 단단히 화난 얼굴로 여자에게 소리치고 있었다. 조금 전 예방접종을 거절당한 그 여자였다. 내용을 들어보니 여자는 오늘 꼭 접종을 맞아야 한다며 따지고 있었고, 간호사는 몇 번을 이야기해도 통하지 않자 이윽고 “예약만 받는다고요!”라고 규정을 언급하며 화를 내고 있던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의사의 허락을 받은 나와는 상관없는 상황이었으며 나는 다시 고개를 돌려 접수증을 완성하고 예방접종비를 결제했다. 나보다 먼저 결제를 한 남자가 주사를 맞으려 간호사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고, 다음 차례였던 나는 그의 옆에 서있었다. 그리고 이렇게 모든 것이 순조롭게 끝나는 듯했다.
윗옷을 걷은 남자의 왼쪽 팔뚝에 찰싹하는 소리와 함께 주삿바늘이 피부를 뚫고 들어가던 그때, 의사가 내게 소리쳤다. “당신도 온라인 예약 안 했으니, 당장 돌아가세요!”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이 정수리를 관통하여 발가락 끝까지 어느 곳 하나 미치지 않은 곳이 없는 것처럼 온몸이 짜릿짜릿하며 정신이 혼미해졌다. 여자를 포함한 예방접종을 거절당한 이들이 의사와 간호사에게 거세게 항의하자, 결국 규정이라는 화살이 나에게까지 와서 꽂힌 것이었다. 나는 무조건 예방접종을 맞아야만 했다, 오늘 맞지 못하면 곧 뉴델리를 떠나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 나는 의사에게 “제발 부탁합니다, 이미 결제도 마쳤습니다.”라고 말했는데 그는 완고했다. 나는 마치 나라를 잃은 듯 곧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체면 따위 차릴 때가 아니었고, 무조건 지금 맞아야 한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이윽고 나는 그들 앞에서 무릎을 꿇어버렸다. 그리고는 “오늘 예방접종을 받지 못하면 제겐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다음 주 케냐로 가는 비행기표도 사두었습니다. 제발 도와주세요”라며 호소했다. 처절했다, 내가 살면서 이렇게 처절하게 부탁한 적이 있던가 싶을 정도로 처참했다. 그러나 의사는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더욱 화가 났는지 고함을 치며 경비를 불렀고, 간호사가 내게 와서 좀 전에 결제한 돈을 환불해주었다. 나는 그제야 이미 단단하게 자리 잡은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일어나 느릿느릿 그곳을 빠져나왔다.
어두침침한 병원의 실내가 그저 캄캄한 어둠처럼 느껴졌다. 머릿속은 전쟁이라도 터진 듯 시끄러웠고 나는 철문 앞에 있는 의자에 힘없이 앉았다. 그때 의사가 투박한 철문을 열어 나를 보고는 또다시 나가라고 소리쳤다. 이미 나오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그는 내게 아예 병원 밖으로 나가라는 것이었다. 더 이상 그에게 어떤 말도 건네고 싶지 않아 나는 그의 말대로 다시 일어나 병원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사람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병원 밖 돌계단에 잠시 앉아 생각했다.
나는 다음 주 케냐 나이로비로 가는 비행기표를 끊어두었다. 가까운 거리는 아니었기에 가격이 만만치 않았으며 환불도 되지 않는 티켓이었다. 나이로비로 입국하기 위해선 황열병 예방접종을 맞아야 했고 그를 증명하기 위한 ‘국제공인 예방접종증명서’가 반드시 필요했다. 그러나 나는 예방접종을 받지 못했고 무언가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그때 문득 한 가지 실낱 같은 희망이 떠올랐다. 모든 사람들에게 예방접종증명서를 요구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를 여행하며 한 번도 ‘예방접종증명서’를 보여준 적이 없었다고도 했고, 어떤 사람은 아프리카 국가를 거칠 때마다 그것을 보여주어야 했다고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최후의 수단으로써, 그저 운에 맡기는 것이었으므로 해결방법이 될 순 없었다. 나는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다. 그때 한 남자가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그는 아까 의사에게 항의하던 인도인 중 한 명이었는데 내게 “주사 맞았어?”라고 물었다. 나는 “아니, 못 맞았어”라고 대답하고는, 지나쳐가는 저놈의 뒤통수를 한대 세게 후려갈겨주고 싶었다. 나는 기분이 무척 안 좋아졌고 바로 숙소로 돌아가 잠에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뉴델리에서 가장 중요한 하루를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흘려보내버렸다. 머릿속에서는 일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의사의 잔인하리만큼 완고했던 표정이 자꾸만 떠올라 괴로웠다.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집중했다. 할 수 있는데 까지는 어떤 방법이라도 찾아내야만 했다. 그래도 한숨 푹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가 꽤 맑아져 있었다. 나는 수 시간 동안 인터넷을 샅샅이 파헤쳐 희망적인 정보를 찾아낼 수 있었다. 뉴델리 공항 근처에 황열병 예방접종이 가능한 병원이 하나 더 있다는 것이었다. 예방접종은 월요일 2시부터 4시까지 가능했는데, 나는 화요일에 뉴델리를 떠나야 했기에 이것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곳도 온라인 예약을 필요로 하는지 홈페이지를 쥐 잡듯 뒤졌으나 그런 공지는 없었다. 더욱이 희망적인 정보는 선착순으로(First come, First served basis) 접수를 받는다고 쓰여있었다. 나는 이 정보가 확실하길 바랬지만 인도에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튼 예방접종은 월요일이었으므로 나에게 이제 남은 일은, 월요일까지 그저 황열병 예방접종에 대한 걱정으로 보내는 것뿐이었다.
나는 두 명의 사람을 만났다. 먼저 만난 사람은, 나보다 나이가 5살 정도 어린 청년이었는데 내가 카페에 있을 때 옆으로 다가와 “혹시 한국사람이세요?”라며 먼저 말을 걸어왔다. 나도 오랜만에 보는 한국인이 반가웠고, 청년은 의자를 내 옆으로 가져와 앉아서 함께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똑똑하고 아는 것이 많던 이 청년은 중국 베이징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었는데 방학을 이용하여 배낭여행을 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인도에 온지는 한 달 정도 되었으며 남부지역을 여행하고 스리랑카에 가서 서핑을 즐기고 돌아온 청년의 여행기는 흥미로웠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으며 정말 멋진 코스를 여행했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에게 “그렇죠, 인도는 참 특이한 나라인 것 같아요”라고 한 마디를 건넸는데, 이 말을 들은 청년은 “인도도 그렇지만, 쿠바도 굉장히 특이해요”라며, 이번에는 작년 중-남미 지역을 여행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저 듣고만 있는 내게 이야기하는 것이 재미있었는지 자신의 찬란했던 지난날의 여행기에 심취하여, 이윽고 아예 휴대폰을 꺼내 들고 지나온 여행지의 사진을 전부 보여주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게 쿠바 길거리에 돌아다니는 차예요, 멋지죠?” “여긴 우유니 사막인데 정말 너무 멋졌어요” 나는 청년의 사진을 보고 이야기를 들으며 “멋지네요” “저도 꼭 한번 가보고 싶네요”라고 호응은 했지만, 어느새 이야기를 듣는 것이 괴로워졌다. 청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모든 것을 내게 전하려는 듯했고 그는 마지막까지 내게 어떤 질문도 없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같은 숙소를 쓰게 되어 알게 된 나보다 나이가 5살 많은 형님이었다. 이 형님은 집을 떠나 세계여행을 한 지 벌써 일 년 반 정도 되었는데, 역시 풍기는 여행의 내공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굉장했다. 나는 숙소에 있을 때면 거의 침대에 앉아 글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날 형님이 내게 시간 괜찮으면 같이 나가서 저녁이나 먹자고 했다. 마침 글도 마무리했고 저녁을 먹으러 나가려던 참이라 함께 식사를 하러 나갔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나는 형님에게 고되었던 오늘 하루 있던 일을 이야기했다. “제가 다음 주에 케냐에 가야 해서 황열병 예방접종을 맞으러 병원에 갔는데, 예약하지 않았다고 쫓겨났네요. 비행기표도 이미 끊어놨는데, 하루 종일 걱정이 끊이질 않아요”라고 내가 이야기하자 형님이 대답했다. “에이, 뭘 그런 걸 갖고 그래요. 여행하다 보면 그런 일 태반이죠. 난 이제 그 정도는 무뎌졌어요” 그리고 형님은 말을 이어나갔다. “제가 남미에 있을 때는 강도도 두 번이나 당해 봤고, 중미에 있을 때는 가방도 털렸었죠” 나는 가만히 형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했던 이야기는 그저 묻혀두기로 했다. 단지 오늘 주사를 맞지 못했다고 이야기했을 뿐이었는데, 어째서 그 이야기가 자신의 지난 여행기로 이어지는 것인지 당혹스러웠다. 내가 그저 “배고프다”고만 해도, “터키에서 먹은 케밥이 정말 맛있었는데!”라고 시작해 어떻게든 자신의 지난 여행기를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 후에도 식당에 혼자 들어온 어떤 한국인이 우리에게 합석했으며 형님은 지난 여행기를 그에게 다시 이야기했다. 그리하여 나는 불과 몇 시간 만에, 그가 지난 일 년 반 동안 지나온 북미부터 시작해 중남미의 여행기와 아프리카에서 있던 스페인 여자와의 로맨스까지 전부 들었다.
요즘 내가 무척이나 노력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처음 만나 이야기를 시작한 상대방에게 섣불리 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 그리고 그 사람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이다. 아무리 내가 대단한 길을 걸어왔고 모두에게 자랑하고 싶은 어떤 이야기가 있더라도, 그것을 상대방이 묻기 전에는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다.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리는 이 ‘훈련’은, 정말 쉽지가 않다. 나는 지금까지 성공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거의 성공에 다다를 뻔 한적은 있었다. 누군가의 자랑을 가만히 잘 듣고 있다가 결국에는 “저도 거기 가봤는데”라며 의미 없는 말을 뱉어버리고는 “이번에도 실패구나”하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훈련’이라고 한다.
묻지도 않은 자기 이야기를 줄곧 자랑해대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몹시 괴로운데, 심지어 그것이 내가 아주 잘 아는 것이라면 그때부터는 정말 속이 뒤틀리기 시작한다. 어떻게든 “나도 알아!”라며 표현을 하려고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당연히 내가 모를 것이라는 전제를 세워두고 내게 가르치듯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이지 참을 수 없을 만큼 괴로웠다. 이를테면, 형님이 내게 “제가 미국에 있을 때 뉴욕에 다녀왔는데, 브로드웨이(Braodway)만 가도 정말 좋아요”라고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그것을 경청하기가 몹시 힘들었다. 뉴욕이라면 승무원 시절 수십 번 다녀온 곳이었고, 그곳의 분위기가 어떤지는 내가 그보다 모르진 않을 것 같았다. 나는 문득, 그런 이야기를 하기 전에 내게 그곳을 다녀와 보았는지, 그런 것들을 묻는 것이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 여행을 통해 ‘경청’을 터득해 간다면,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하며 얻은 것 중 최고로 값진 덕이 될 것이다. 여행한 지는 얼마나 오래되었으며, 어떤 굉장한 곳을 거쳐왔고, 어떤 엄청난 경험을 했고 어떤 수모를 당했는지 그런 것들을 자랑하듯 꺼내지 말자. 상대방이 묻기도 전에 하는 내 이야기에는 힘이 실려있지 않다. 그것은 단지 터질 듯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무게 없이 허영만 가득한 자기 자랑일 뿐이다. 헤르만 헤세의 ‘싯다르타’의 한 구절이다. (민음사) “말이란 신비로운 참 뜻을 훼손해 버리는 법일세. 무슨 일이든 일단 말로 표현하게 되면 그 즉시 본래의 참뜻이 언제나 약간 달라져 버리게 되고, 약간 불순물이 섞여 변조되어 버리고, 약간 어리석게 되어버린다는 이야기야”
월요일 아침, 마침내 황열병 예방접종을 맞으러 가는 날이 또다시 밝았다. 나는 전날 잠들기 전에 아무래도 가만히 있기가 불안해서 인터넷을 더욱 샅샅이 뒤져보았다. 그러다가 운명을 뒤바꿀만한 정보를 발견했다. “접수는 아침 10시부터 시작합니다” 나는 2시부터 접종을 시작한다는 것만 알았을 뿐 접수가 몇 시인지는 몰랐다. 그리하여 나는 공항 병원에 10시가 조금 지나 도착했다. 이곳도 ‘Yellow Fever Vaccination’이라고 크게 적혀있어 화살표를 따라가면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앉아 기다리고 있었으며 내가 앉고 나서도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왔다. 인터넷에서 본 바로는 하루 60명 정도만 예방접종이 가능하다고 쓰여있었는데, 몸에 주삿바늘이 꽂히기 전까지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한 시간 정도 지나고 직원이 나를 불러 앞으로 다가갔다. 직원이 묻는 질문에 공손히 대답하고 접수증을 작성하자 내게 번호표를 주었는데, 번호를 보고 깊이 한숨을 내뿜었다. ‘47번’ 만약 전날 밤 인터넷을 한번 더 검색해보지 않았다면, 아침이라도 먹고 출발했다면, 공항으로 가는 기차를 한 번이라도 놓쳤다면 접수조차 하지 못할 뻔했다. 그러나 번호표를 받았다고 안심할 순 없었다. 인도에서는 어떤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직원은 점심을 먹고 오후 1시 45분까지 이곳으로 돌아오라고 했으며 나는 근처에서 시간을 보냈다.
나는 15분 전에 병원에 다시 도착했다.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모여 기다리고 있었으며 이들은 모두 번호표를 받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었다. 나는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으며 조급했다. 접종시간이 되고 한 직원이 대기실로 와서 힌디어로 뭐라고 알렸는데, 그것을 듣고 수십 명이 일어나 그를 따라가기 시작했다. 나는 무슨 상황인지도 몰랐으며 그저 그들을 따라갔다. 그러자 한 여자가 내게 “몇 번이에요?”라고 물어서 나는 “47번이요”라고 대답했는데, “40번까지만 오라고 했어요”라고 알려주었다. 나는 머쓱해하며 다시 대기실로 와서 기다리다가 이윽고 나머지도 올라오라는 직원의 말에 그제야 따라 올라갔다.
올라가서도 나는 줄곧 기다려야 했다. 세계의 어느 병원을 가도, 병원은 기다려야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예방접종을 받을 수만 있다면 나는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릴 수 있었다. 직원이 대기실로 와서 또다시 뭐라고 말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47번이잖아, 너 부른다”라고 이야기해주었다. 이곳에서 유일한 외국인인 내 번호가 47번이라는 것을 모든 이들이 알고 있었다. 나는 조금 긴장이 풀리면서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주사실로 들어가 의사의 간단한 몇 가지 질문에 공손히 대답하고 이윽고 윗옷을 걷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마침내 나는 간호사 앞에 놓여있는 작은 의자에 앉았다. 간호사가 알코올 솜을 들고 왼쪽 어깨를 슥슥- 닦아줄 때 나는 그에게 “아플까?”하고 장난을 쳤다. 그러자 그는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한 번 웃어 보이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주삿바늘을 왼쪽 어깨에 찌르고 피스톤을 밀어 그토록 바라던 약물을 나의 몸에 주입했다. 그동안의 걱정이 무색하리만큼 예방접종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나는 대기실로 돌아가 한 시간 정도 더 기다리고, 이윽고 간절히 원하던 노란 종이, ‘국제공인 예방접종증명서’를 손에 넣었다.
한국사람들은 온통 걱정에 사로잡혀있다. 물론 이것은 나를 보고 알게 된 것이다. 여행을 통해 느끼고 있는 것이라면 대부분의 걱정과 문제는 알고 보면 사실 별거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곧 해결될 일마저도 걱정하고, 기대를 두려워한다. 나는 영 답이 보이지 않는 문제가 있다면 때로는 나를 빼도 박도 못하게 만들어버린다. 궁지에 몰린 쥐가 그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뱀을 공격하듯, 남들은 생각지도 못한 방법으로 어떻게든 해결해낼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걱정을 해야 한다면, 걱정을 크게 하자. 휴대폰이 고장 나 문자를 받지 못하는 것을 걱정할 게 아니라, 너무나도 휴대폰에 의존적인 나를 걱정하자. 이왕 해야 할 걱정이라면 넓고 크게 하자. 당신이 자신의 삶을 찾고자 하는 것, 그리하여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하는 걱정은 세상에서 봤을 때 그저 사소한 것일 뿐이다. 그러나 당신이 자신의 삶을 찾고 세상에 어떤 커다란 기여를 할지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을 중요한 걱정이다. 이왕 같은 걱정을 할 것이라면 넓고 크게 보자.
다음날 나는, 네팔에서 육로를 통해 처음 인도로 들어왔던 도시인 ‘바라나시’로 갔다. 한국에서 친한 친구가 오기 때문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친구가 오기를 몹시도 기다렸으며 설레는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뉴델리에서 모든 문제를 해결했고 인도 여행의 마지막은 친구 정규와 함께 장식할 생각에 나는 무척이나 들떠있었다. 마침내 인도 여행을 마무리할 때가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