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다시 온 바라나시, 기차는 차마 어둠이 저물지 못한 매우 이른 새벽에 도착했지만 두렵거나 낯설지는 않았다. 오히려 인도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듯 편하게 느껴졌다. 기차역에서 숙소까지는 약 4KM,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바라나시 거리를 걸어볼까 했지만 릭샤기사가 꽤 합리적인 가격을 제시해 그냥 타고 가기로 했다. 릭샤기사가 내게 이토록 정직한 가격을 부른 것에는 분명히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릭샤에는 이미 여러 명이 비좁게 앉아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이 싫다거나 힘든 것은 아니었다. 나는 그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배낭을 무릎 위에 올리고 자리를 잡았다.
굳이 지도를 보지 않아도 익숙한 길거리, 이즈음에선 노점상들이 나올 것이고 조금 더 가면 쓰레기 더미 위에 자리를 튼 소 무리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 그때 오른쪽으로 보이는 작은 골목에 들어가, 바닥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는 소똥을 피해가며 500m 정도 직진을 하면 숙소가 모여있는 골목이 나온다. 지도를 보지 않고 익숙하게 길을 찾아가는 내 모습이 많이 자연스러워졌는지, 어쩐지 호객하는 친구들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숙소가 모여있는 골목에 다다라 한 숙소에 들어갔는데 일찍부터 직원이 깨어있어 체크인을 도와주었다. 고작 일주일 머물다 간 것이 전부인데 너무나도 익숙한 바라나시,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사실 숙소가 꽉 찼거나 체크인이 안 된다고 했어도 크게 걱정할 것이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해가 뜰 때까지 가트에 앉아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숙소에 짐을 풀고 누웠는데 피곤이 몰려왔다. 아무리 기차에서 자면서 왔다고 하더라도 밤을 새우는 장시간의 이동 후에는 항상 피곤했다. 나는 숙소에서 낮잠을 푹 자고 오후에 나와 바라나시에서 꽤 비싸고 좋은 숙소를 예약했다. 혼자 있었다면 얼마인지조차 몰랐을 이 숙소를 예약한 까닭은, 한국에서 절친한 친구인 정규가 오기 때문이었다.
중국에 있던 어느 날, 갑자기 정규가 내게 물었다. “정아, 설 연휴쯤에 너 어디 있어?” 앞으로 일정을 확인해보니 그때쯤엔 인도에 있을 것 같아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자 정규가 “나 설 연휴에 시간 되면 인도 갈까?”라고 말했는데, 그때 나는 중국 여행에 무척이나 지쳐있었던 탓에 정규에게 오히려 쓴소리를 했다. “진짜 올 거 아니면 그런 말 하지마” 나는 정규가 별생각 없이 던진 말에 기대하고 싶지 않았으며, 오지 못하게 된다면 그로 인해 적잖이 받게 될 상처와 실망감이 싫었다. 그래서인지 정규도 내게 그것에 대해 확실히 말하진 않았는데, 며칠이 지나고 갈 수 있게 됐다며 인도에 도착하는 날짜까지 내게 말해주었다. 그때부터 나는 마음 놓고 정규가 오기만을 기다렸고, 기대했다.
정규는 인도에서 꼭 보고 느끼고 싶은 것이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갠지스강과 타지마할이었다. 나는 그동안의 인도 생활에 꽤나 현지화가 되어있었으며 그런 것쯤 얼마든지 데리고 다니면서 보여줄 수 있었다. 그러나 한 가지 문제라면, 한국에서 회사를 다니는 정규는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설 연휴를 이용해 오는 것이었는데, 인도에서 지내는 기간이 4일밖에 되지 않았다. 인도를 여행하자면 한 달도 부족한데, 고작 4일 만에 갠지스강과 타지마할을 돌아야 한다니, 일정이 몹시도 빠듯할 것 같았다. 그리하여 나는 이미 한 달 전에 바라나시에서 지내며, 어떻게 하면 정규에게 하루 만에 바라나시와 갠지스강의 많은 것을 보여줄 수 있을지 생각했고, 함께 보기 위해 인도를 여행하는 내내 아껴두었던 타지마할로 가는 기차는 지연의 위험이 상대적으로 적은 비싼 열차를 예약해두었다. 우리의 계획은 무척 빠듯했으며 무엇 하나라도 지연되던가 문제가 생기는 날엔 모든 스케줄이 틀어질 것이었다.
나는 정규를 맞이할 모든 준비를 마치고 바라나시의 한 카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글을 적고 있었다. 그때 눈 앞으로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 한 분이 지나가다가 갑자기 멈추어 서서 벽을 향해 몸을 돌려 기도 같은 것을 했다. 별다른 생각 없던 나의 눈길은 그저 멍하니 할머니를 향해있었다. 짧은 기도를 마친 할머니는 가방에서 주섬주섬 무언가 꺼내더니 그것을 골목 담벼락 툭 튀어나온 선반 위에 올려놓고 다시 한번 짧은 기도를 했다. 그러고 나서 할머니는 천천히 그곳을 떠났다.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할머니가 올려놓고 간 것이 무엇인지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작고도 빨간 꽃, 생화 한 송이였다. 나는 문득 마음이 너무도 평화로워졌다. 떠나는 할머니의 뒷모습은 여전히 차분했으며 고요했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기도였을까. 아직 시들지 않은 것을 보면 아침 일찍 나가서 구해온 것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가방에 담아 이곳까지 가져와서 선반에 올려놓으며 누구를 생각했을까. 나는 가방에서 카메라를 꺼내 꽃 가까이로 다가가서 사진을 찍었다. 할머니의 마음도 함께 담겼으면 했다.
마침내 정규가 올 시간이 다되었다. 정규는 뉴델리를 거쳐 바라나시로 부지런히 날아오고 있었다. 나는 정규에게 공항으로 마중 나갈 수 없으니 택시를 타고 시내로 와서 만나자고 했는데, 사실은 정규를 깜짝 놀래켜주고 싶은 마음에 장난을 쳐본 것이었다. 이윽고 비행기가 도착했고 나는 정규가 나올 출구 근처에 몰래 숨어 기다렸다. 그러면서 나는 정규가 배낭을 메고 공항에서 나오는 것을 상상해보았는데, 이곳이 바라나시라고 생각하면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공항에서 사람들이 하나둘씩 나올수록 심장이 두근거렸고 마치 여자 친구라도 기다리듯 떨리기까지 했다. 숨은 자리를 이리 옮겼다 저리 옮겼다 하며 긴장되는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공항에서 파란 배낭을 멘 정규가 성큼성큼 걸어 나오는 것이 보였다. 오직 시선은 정면을 고정한 채 굉장히 빠른 속도로 걸어갔는데, 호객들이 붙을 까 봐 꽤나 긴장하고 있는 듯 보였다. 걸어가는 정규 뒤를 따라가며 어떻게 놀라게 할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너무 빠른 속도로 걸어가버리는 바람에 급한 마음에 그저 “정규야!!”하고 불러버렸다. 내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정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마 이곳이 바라나시라는 것을 깜빡 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를 발견하고는 자기가 지금 어디에 와 있는지 알아챈 듯했고, 우리는 너무도 반갑게 인사했다.
이곳은 바라나시였다. 그냥 인도도 아니고 무려 바라나시였다. 한국으로 돌아가야만 볼 줄 알았던 친구가, 바라나시에 와서 나와 함께 택시를 타고 갠지스강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 좀처럼 믿기지 않았다. 나는 줄곧 정규에게 “정규야, 너 왜 여기 있냐”라고 했고, 정규는 다시 내게 “그러게, 나 진짜 왜 여기 있지”라고 대답했다. 흘러가는 상황이 믿기지 않았고 꿈을 꾸는 듯했다. 그리고 우리는 택시에서 봇물 터지듯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할 말이 너무나도 많았다. 항상 휴대폰으로 메시지를 주고받기는 했지만, 친구에게 직접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다. 친구들은 요즘 다들 잘 지내는지, 자주 만나는지, 일은 다들 잘 하고 있는지, 한국은 요즘 평창 동계올림픽 열기가 얼마나 뜨거운지 그런 것들을 이야기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정아, 정규 만났니? 휴대폰은 잘 돼?” 엄마는 정규를 통해 보낸 휴대폰 공기계가 잘 작동하는지 걱정했는데, 나는 차마 심카드를 바꿀 시간도 없이 정규와 떠드느라 확인을 못했다. 나는 엄마에게 “정규랑 얘기하느라 휴대폰 아직 받지도 못했네”라고 대답했는데, 엄마는 내게 “아이구, 그렇게 좋아”라고 하며 안쓰러워했다. 그렇게 좋았다. 나는 도저히 내 사람들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나는 정규에게 인도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도로 위에서 정신없이 얽혀있는 차, 오토바이, 릭샤 그리고 질서 없는 사람들, 온순한 사람도 이윽고 폭발하게 만드는 끊임없는 경적소리, 무엇이 예의이고 무례 인지도 모른 채 무작정 다가오는 호객들, 먹으면 곧바로 물갈이에 걸려버릴 것 같은 길거리의 음식들을 보여주었다. 정규는 인도에 도착하고 처음 마주한 도시가 바라나시였는데, 무질서하고도 태연한 사람들의 모습에 충격을 감추지 못했다. 그런 인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나는 내심 뿌듯했다. 인도 사람들이 더욱 심하게 경적을 울리고 호객하고 무질서하게 행동해서 정규를 괴롭혔으면 했다. 그동안 혼자 이런 곳에 와서 적응하며 살았노라고 으쓱하며 자랑하고 싶었다.
우리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둠이 자욱하게 내려앉았다. 나는 정규를 데리고 ‘산 사람’을 위한 뿌자 의식을 잠시 보고, 숙소로 들어왔다. 정규는 짐을 풀며 내게 정말 줄곧 이렇게 살고 있던 것이냐며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말을 하면서 정규는 배낭에서 한 손 크기의 페트병에 담긴 소주 12병을 꺼냈다. 정규만큼 기다리던 소주였다. 이것 말고도 안주라며 ‘김자반’을 함께 꺼냈다. 김자반이라, 바라나시에서 이것을 먹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우리는 시간이 많지 않았으므로 바로 나와서 갠지스강을 따라 천천히 거닐었다. 바라나시의 밤길은 꽤나 위험했다. 수행자라며 어둑한 곳 바닥에 앉아 마약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마약을 팔겠다고 다가오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있을 때는 웬만해선 밤길은 걷지 않았지만, 정규와 함께 걸으니 그렇게 위험한 것들이 오히려 구경거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우리는 골목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기도 하고 갠지스강을 걷기도 하다가, 화장터에 갔다. 밤이 깊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장터의 불은 꺼질 줄 몰랐다. 우리는 화장터에 올려진 한 사람 옆에 서서, 그가 화장되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나무더미 위에 시체를 올려놓고 그 위로 나무를 더 쌓아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기름을 뿌리기도 하고 톱밥 같은 것을 뿌리기도 하며 불을 더욱 거세게 만들었다. 어느새 불길은 시체를 잡아먹을 듯 맹렬하게 뒤덮었으며 어둠 속에서 하늘에 닿을 듯 높이 치솟았다. 우리는 이렇다 할 대화 없이 그것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화장터를 보고 배가 고파져 한 식당에 들어갔다. 식당에선 한국인 남자와 여자가 둘이 맥주를 마시고 있었는데, 그들이 우리에게 같이 맥주를 마시지 않겠냐고 물어 우리는 그러자고 했다. 나는 정규에게 바라나시의 이런 모습도 보여주고 싶었다. 바라나시에는 한국사람들이 정말 많은데 모두 친구처럼 지낸다. 골목을 지나가다 한국인이 보이면 서로 인사하고, 그러다 보면 어느새 바라나시 골목에서 마당발이 될 정도로 많은 사람들과 인사하고 다니는 자신을 볼 수 있다. 처음에 나는 멀리까지 와서 한국인들과 모여 지내는 것을 꺼려했지만, 외로운 여행을 마치고 바라나시로 돌아와서 한국인들을 보니 반가웠다. 맥주를 마시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그들이 우리에게 “닭을 한 마리 잡았는데, 내일 닭도리탕하고 부침개도 부쳐서 한 상 차려 먹을 생각인데, 같이 드실래요?”라고 물었다. 우리는 그러자고 했다.
밤이 깊어지고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 갠지스강 일출을 보러 가야 했기 때문에 일찍 일어나야 했지만 인도에 와서 만난 첫 날을 이렇게 끝내기 아쉬워, 우리는 소주를 들고 숙소 옥상에 있는 테라스로 나갔다. 조촐한 술상은 완벽했다. 포장된 김자반의 배를 갈라 가운데에 놓았고 뭄바이에서 친구가 준 통조림 오징어채를 깠다. 그리고는 소주를 각자 한 병씩 들고 마셨다. 정말 오랜만에 소주를 한 모금 마셨는데 속이 따듯해지며 내쉬는 날숨을 통해 소주의 향기가 퍼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엄지와 검지로 집게를 만들어 김자반과 오징어채를 집어 먹었는데 짭조름한 맛이 소주의 쓴 맛을 금세 가라앉혔다. 소주가 한 잔 들어가니 취기가 돌고 자연스레 진중한 대화가 이어졌다. 한 살씩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진지하고도 심오한 대화가 좋다. 그저 술 먹는데 그치지 않고 나를 한 번 돌아보게 만드는 술자리, 신경 쓰지 못했던 친구들을 걱정하게 되는 그런 것이 좋았다. 그날 밤은, 정규와 갠지스강 달빛 아래에서 소주를 한 잔 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다음날 새벽, 우리는 일출을 보러 갔다. 한 달 전 일출을 보러 왔을 때는 안개가 몹시도 자욱이 끼어있었는데, 이날은 맑은 날씨에 일출이 선명하게 보였다. 새빨간 태양이 지평선 너머에서 그 아름다운 모습을 반쯤 드러낸 그때 함께 배를 타고 있던 한 아저씨가 말했다. “이야, 새해 일출을 인도 바라나시에서 보네” 그렇다, 잊고 있었다. 이날은 설날이었고, 우리는 인도 바라나시 갠지스강의 배 위에서 설날의 일출을 보고 있던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매우 묘했다. 나는 정규에게 “와, 정말 그렇네. 바라나시에서 설 일출을 너랑 보고 있네”라고 했다. 무심하게 지나쳤거나 혹은 알았더라도 더욱 한국 생각이 간절해졌을 설에 여기까지 와서 함께 있어준 정규가 너무 고마웠다. 우리는 태양이 더 이상 빨간빛을 내지 못할 때까지 지켜보다가, 이윽고 태양의 온기가 피부에 느껴질 때쯤 배에서 내려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옥상에 올라가서 아침식사를 했다. 옥상에서 바라나시를 내려다보는 모습 또한 정규에게 꼭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었다. 갠지스강줄기를 한눈에 볼 수 있고 그 아래에 수많은 건물이 즐비한 모습, 그리고 바라나시 사람들이 아침을 시작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간단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체크아웃을 하고 나왔다. 우리는 가트의 한 편 끝 지점인 아씨가트(Assi Ghat)까지 걷기로 했다. 이것은 내가 저번에 해봤던 것이었는데 정규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다. 우리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바라나시의 모습을 더욱 가까이서 봤다. 갠지스강가에서 목욕하는 사람, 깊은 곳까지 들어가 수영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사람처럼 가트를 거니는 소 등을 보았다. 우리는 아씨가트까지 가서 돌아오는 길에는 나룻배를 하나 잡았다. 배에 오르고 뱃사공이 천천히 노를 저어 갠지스강을 유유히 떠다니며 돌아오는 길이 매우 평화로웠다.
우리는 전날 약속한 한식을 먹으러 갔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었고 주방에서는 아직 한창 요리를 하고 있었다. 우리가 도착하고도 사람들이 더 왔는데 약속을 하고 온 사람들은 아니었고, 그저 식당에 점심이나 먹으러 온 것이었는데 뜻하지 않게 우리와 합석하게 되었다. 그렇게 모인 사람은 나와 정규, 그리고 어른이 두 분 계셨으며, 여자 두 명과 남자 세 명, 그렇게 총 9명이 한 자리에 모였다. 함께 다니는 사람들은 나와 정규뿐이었으며 모두 각자의 여행을 꾸려나가는 사람들이었다. 이윽고 음식상이 차려졌다. 푸짐하게 담긴 닭도리탕이 2 접시, 밑반찬으로 김치, 가지조림, 오이무침, 그리고 감자전과 고구마전이 모여 무척 푸짐하고 근사한 한 상이 차려졌다. 정규의 여행에 이것은 나도 예상하지 못한 계획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함께하게 될 줄 몰랐다. 우리는 맥주와 함께 식사를 시작했다. 닭도리탕 국물을 흰 쌀밥에 비벼 크게 한 숟갈 먹고 밑반찬을 하나씩 전부 먹었다. 너무도 맛있었다. 다들 식사를 하며 너무 맛있다, 라는 말이 끊이질 않았다. 설날 가족과 친척들이 한 상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역시 친화력이 너무도 좋은 정규는 사람들과 무척 잘 어울렸다. 사람들이 정규에게 “인도에 한 달은 있던 사람 같아요”라고 할 정도였다. 심지어 식사를 마치고 돈 계산을 해야 할 때쯤엔 정규가 직접 나서서 사람들에게 돈을 걷고 계산을 하고 있었다. 정규가 잘 적응하고 여행자들과 즐거워하는 그런 모습을 보니 내심 뿌듯했으며 “역시 정규구나”하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렇게 설날의 풍족한 식사를 마치고 옷 가게로 향했다.
정규가 내게 말했다. “정아, 너희 어머니 선물 사러 가자. 한국 가서 어머니 직접 찾아뵙고 선물드리면서 정이 건강하게 잘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인사드리고 올게”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너무도 고마워서, 인도까지 와서 내게 힘이 되어주는 것도 벅차게 고마운데 이런 생각까지 해준 정규가 너무 고마워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나는 그저 “그래 주면 고맙지”라고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옷 가게로 가서 선물을 골랐다. 이것저것 한참을 보고 재고 고르다가, 우리는 어머니 두 분께 드릴 인도 숄 2개를 샀다. 그리고 정규가 인도에서 입을 바지 하나, 내 바지 하나, 우리가 쓸 숄도 하나씩 샀다.
바라나시에서 하루는 너무도 짧았다. 그러나 스치듯 지나간 하루 속에 많은 인연을 담았고 많은 것을 보고 느꼈다. 인도의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다시 찾은 바라나시의 모습은, 한 달 전 처음으로 왔던 바라나시의 모습과 매우 달랐다. 이토록 평화롭고 친근한 도시였던가 싶었다. 인도에서도 보기 힘든, 정말 인도의 모습을 간직한 도시였다. 또한 정규와 함께 한 인도는 혼자 있을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는데, 이를테면 혼자 있을 때 호객이 달라붙으면 지치고 짜증났지만 정규와 있을 때는 “이것 봐, 이렇게 호객이 붙어”라며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되었다. 흥정은 놀이가 되었고, 인도인들은 친구가 되었다. 그동안 혼자서는 보지 못했던 인도의 모습에 나도 흥미로웠다.
우리는 비행기를 타고 뉴델리로 갔다. 기차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비행기에 새삼 감탄했다. 밤늦은 시간 뉴델리 번화가인 코넛플레이스에 도착한 우리는 호텔로 걸어갔다. 번화가를 조금 벗어나니 집 없는 사람들이 길바닥 여기저기 누워있는 으슥한 골목이 나왔다. 우리는 그들의 시선을 애써 외면하며 빠른 속도로 걸었는데, 그때 한 남자가 우리에게 따라붙었다. 갈색 가죽재킷을 입고 있던 그는 “저는 돈이 없어요”라며 줄곧 우리를 따라왔는데, 보통 대답하지 않으면 어느 정도 따라오고 마는데 이 남자는 으슥한 골목 안까지 계속해서 따라왔다. 나는 정규에게 “이 남자 너무 으슥한 곳까지 따라오는데”라고 했는데, 정규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며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것을 보니 꽤나 긴장한 듯했다. 그러나 나도 긴장되긴 마찬가지였고 여차하면 싸워야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줄곧 따라오던 남자는 호텔이 가까워지자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뉴델리 숙소에 도착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 나는 정규에게 “배낭 메고 오면, 외국인들이랑 게스트하우스 10인실에서 자야지”라고 했는데, 정규는 예산에 전전긍긍하며 다인실만 다니는 내게 마지막은 편안하게 지내라며, 좋은 호텔을 잡아주었다. 숙소 로비에서 정장을 반듯하게 차려입은 직원들이 밤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정중하게 대접했는데, 나는 인도인들이 이러는 것을 보면 여전히 적응이 잘 안됐다. 체크인을 마치고 직원이 우리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참, 돈이 좋긴 좋다. 나는 여행하며 자본주의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것을 참 감사하고 있다. 언제나 호텔방으로 들어가면 침대가 가장 먼저 보이는데, 새하얗고 두꺼운 이불이 반듯하게 깔려있으면 너무도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는 문을 하나 더 찾아 열어보고, 맨발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깨끗한 타일에 넓고도 아늑한 화장실을 보고 안심한다. 인도에서 이런 시설의 숙소는 처음이었다. 승무원 시절 그렇게 많은 호텔을 다녔지만, 여행하며 게스트하우스만 다니다 보니 어느덧 습관이 많이 바뀌어있었다. 샤워를 하려고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에 내가 가방에 갖고 다니는 작은 수건을 꺼내가는 것을 보고는, 정규가 한 마디 내질렀다. “정아, 화장실에 큰 수건 있잖아. 그거 써” 나는 정말로 문득 당황했다. 참, 호텔에는 화장실에 수건이 비치되어 있었지, 하고 말했다. 그것 말고도 나는 호텔에서 무엇이 가능했더라, 하고 잠시 생각하기도 했다. 씻고 나와서는 둘 다 기진맥진하여 정말 무엇도 할 기운이 남아있지 않았다. 우리는 룸 서비스로 야식을 간단하게 먹고, 다음날 아그라(Agra)의 타지마할에 가는 아침 기차를 타야 했기 때문에 바로 잠에 들었다.
몇 시간 못 자고 새벽 6시에 일어났다. 끊임없이 술을 마시고 하루 수 시간을 걸어 다니며 빠듯한 스케줄을 소화하려니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우리는 호텔 조식 뷔페를 먹고 릭샤를 타고 기차역으로 갔다. 정규는 처음 타는 릭샤를 매우 재미있어했다. 나는 정규에게 인도 현지인들이 많이 이용하는 기차를 경험하게 해주고 싶었지만, 지연될 것이 걱정되어 비싸고 좋은 기차로 예약해두었다. 만약 지연되어 타지마할을 보지 못하게 된다면 되돌릴 수 없을 것이었다. 기차는 정확하게 정시에 출발했고 아그라로 향하는 1시간 40분의 짧은 여정에 식사 서비스를 제공받았다. 그동안 인도에서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돈을 쓰며 겪는 새로운 경험에 나 역시도 매우 흥미로웠다. 그러면서 나는 한 번 더 정말 돈이 좋긴 좋구나,라고 생각했다.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잠시 졸다 일어나니 금세 아그라에 도착했다. 우리는 아그라에서 타지마할과 아그라 포트를 관광했다. 멋지기도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정규와 함께 이런 것들을 본다는 것이 더욱 행복했다.
우리는 다시 뉴델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토록 내가 먹고 싶어 하던, 그토록 정규가 내게 먹이고 싶어 하던 회를 먹으러 가기로 했다. 틈만 나면 정규가 인터넷을 검색하여 찾아낸 곳이었는데 뉴델리에 일식집이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이번만큼은 정규가 나를 데리고 식당을 찾았다. 지도를 한 번 보고 다시 정면을 두리번거리며 이 골목 저 골목을 파헤치다가 이윽고 커다란 식당의 입구가 보였고, 정규가 “찾았다”라고 소리쳤다. 문을 열고 들어간 일식집은 너무도 고급스러웠으며 화려했다. 손님은 대부분 일본인 혹은 서양인이었고 직원 말고 인도인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직원이 건넨 메뉴를 보고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였는데, 하나는 내가 그동안 먹고 싶었던 회가 종류별로 있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가격이었다. 정규는 내게 걱정 말고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고르라고 했지만, 여행하며 지내온 습관 때문인지 그것 조차 쉽지 않았다. 결국 메뉴는 정규가 골라 시켜주었고 물도 한 통 시켰다. 두 개의 유리컵과 물 한 통이 먼저 나왔으며 우리는 물을 한 컵씩 가득 따라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는 가방에서 소주를 꺼내 컵에 채워 넣었다. 이윽고 몹시도 기대하던 회가 나왔다. 직원이 화려하게 장식된 회를 우리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순간 외국인들의 시선이 쏠리는 것이 느껴졌다. 젓가락을 사용하여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보는 것이 얼마만인지, 나는 익숙하게 젓가락을 들고 가장 먼저 연한 주황빛이 도는 연어를 집었다. 그리고 그 두께에 놀랐다. 나는 간장을 살짝 찍고 겨자를 듬뿍 묻혀 입에 넣었는데 스륵- 하고 녹아버리는 감촉이 너무도 행복했다. 그리고 컵을 들어 정규와 잔을 한 번 친 후 소주를 마셨다. “크-“ 나도 모르게 나와버린 환호성, 속이 따듯해지면서 기분이 좋아지면서 다시 말이 많아져 버렸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 것일까, 이런 달콤함을 느껴버리고 혼자 남게 되면 더 힘들어지는 것은 아닐까, 조금 걱정이 되기도 했지만 당장 너무 행복했다. 식사를 마치고 가격을 보았다. 여행 초반에 나는 이런 가격을 보면 한화로 계산해서 생각하곤 했었는데, 여행이 길어지면서 “이 정도면 몇 일치 생활비겠구나”하고 생각한다. 무려 일주일도 넘게 지낼 수 있을만한 가격이 한 끼 식사에 나왔다. 정규가 사주는 저녁이었다. 나는 정규였기 때문에, 조금의 부담감도 미안함도 없이 편하게 얻어먹었다. 그리고 “고마워, 잘 먹었다”라는 인사말은 빼놓지 않았다.
이윽고 마지막 날, 우리는 남는 시간을 이용해 연꽃 사원을 둘러보고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저녁이 가까워지고 공항으로 갔다. 돌아가야 할 시간은 우리를 피해가지 않고 찾아왔다. 정규가 한국으로 가고 다음날 나는 아프리카로 가야 했기에 함께 공항으로 간 것이었지만, 특이하게도 뉴델리의 공항은 비행 출발 6시간 전부터 공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밖에서 인사를 하고 헤어져야만 했다. 정규가 공항으로 들어가기까지 세 번을 인사하고 포옹했다. 근처의 인도인들이 우리를 보고 웃었다. 정규를 보내고 나는 망설임 없이 뒤로 돌아 다시 뉴델리 시내로 가는 기차를 타러 갔다. 다시 혼자 남았다. 기차를 타러 가는 길에 많은 생각을 했다. “정규가 인도까지 와서 너무 좋았어, 정규도 일상으로 돌아갈 테니 이제 나도 다시 기운 내고 마음잡고 여행을 이어나가자”라고 생각하며 다짐하는데 왠지 모르게 울컥했다. 정규가 엄마를 만나 선물을 건네며 “정이 여행 잘 하면서 건강하게 있습니다”라고 안부를 전해줄 생각을 하니 또다시 울컥했다. 혼자 너무도 고독하고 외로운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이 그리워졌고 모든 이가 보고 싶었다. 심지어 몸살 기운까지 있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이따위 후유증 충분히 예상하던 바였다.
이윽고 인도를 떠나는 날이 왔다. 2018년 01월 17일 네팔 국경을 통해 인도에 입국하여, 34일간의 인도 여행을 마치고, 마침내 2018년 2월 19일 아시아를 떠나 아프리카 대륙 케냐의 수도 나이로비로 가는 것이었다. 2017년 11월 09일, 집을 떠나고 여행한 지 103일째 되는 날이었다. 생각해보니 정규와 함께 있을 때 여행 100일을 지나쳤었는데, 축하라도 한 번 받을걸 그랬다. 네팔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을 했었다. “내가 직접 인도로 가서 느껴보겠다”라고. 인도에서 지내면서 참 많은 경험을 하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다. 사실 인도에서의 기억을 떠올려보라 하면 대부분 힘들었던 기억들만 떠오른다. 끊임없이 달라붙는 호객들, 생각 없이 울려대는 경적소리, 기차역에 앉아있을 때 인도녀석들이 강제로 얼굴을 들어 사진 찍게 했던 일, 사원을 관광하던 중 잠시 앉아 책을 읽고 있을 때 대여섯 되는 인도 꼬마들이 내 주위를 빙 둘러 “칭총 칭총”거리며 약 올렸던 일, 황열병 예방접종을 예약하지 않고 왔다는 이유로 의사에게 문전박대 당했던 일, 이런 것들이 먼저 생각난다. 그래서 그런가 보다, 사람들이 인도를 이야기할 때 그토록 힘들다고 말하는 것이. 그래서 그런가 보다, 사람들이 인도가 그토록 그립다고 말하는 것이 말이다.
정규를 보고 “내가 참 많이 변했구나”라고 느꼈다. 공항에서 만나자마자 너무도 빠른 걸음으로 나를 앞질러가는 정규에게 “정규야, 천천히 걷자, 천천히 천천히”라고 말하고는 나도 속으로 새삼 놀랐다. 내 입에서 천천히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라고 생각했다. 인도에서 많은 일을 겪으면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을 때마다 나는 “그래, 여긴 인도니까”하며 모든 것을 그러려니 했다. 인터넷 속도가 속이 터져라 느릴 때면 “언젠간 되겠지”하고 주머니에 넣었다. 확인할 때마다 기차가 끊임없이 지연되면 “언젠간 오겠지”하며 책을 읽었다. 미친 듯이 울려대는 경적소리가 어느샌가 전혀 신경도 쓰이지 않고 가끔은 들리지 않을 때도 있었다. 식당에 가면 식사를 시키고 나서 뉴스나 책을 보는 습관이 생겼고, 생각보다 식사가 너무 빨리 나오면 아쉬웠다. 한국에선 눈 깜빡하는 것처럼 쉬운 일들도, 여행 중에는 어느 하나 쉽사리 해결되지 않는다. 인도 여행이 끝나갈수록 화내는 일이 줄어들고 모든 상황을 그러려니 하게 됐다. 내가 생각하는 ‘그러려니’는 곧 ‘이해’이다. 이로써 나는, 조금은 이해라는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 됐을까. 정규가 한국을 떠나면서 내게 했던 말이 문득 떠오른다. “너 한국 가면 일주일도 안돼서 다시 돌아올걸” 아무튼 Incredible India! 한 달간 정말 멋진 경험을 선물해준 굉장한 나라였음은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