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 석양이 드리워지면서 창 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황홀했다. 높은 하늘에 서서히 불그스름한 빛이 감돌았으며 듬성듬성 떠있는 뭉게구름은 시시각각 변하는 하늘의 색을 흡수했다. 우리는 더욱 어두워지기 전에 돌아가야 했고, 잭슨은 차를 돌려 마사이마라를 나왔다.
우리는 저녁과 함께 맥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와 안토니, 로티, 그리고 중국인 부자 그렇게 다섯 명이 모였으며 중국어를 할 줄 아는 로티가 중국인 부자에게 통역을 해주어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네 명의 인도인은 다른 한 편에 모여 여전히 자기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참, 정이 안 가는 친구들이었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시원한 맥주가 없는 것이 아쉬웠지만 길고도 고된 하루를 마친 후 마시는 맥주는 그저 그대로 끝내줬다. 오랜만에 이런 오지에 오니, 문득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던 때가 생각났다. 그때에 비하면 여기는 편하고 아늑한 수준이지만 가끔은 이렇게 깊숙한 곳이 좋다. 우리는 그렇게 밤이 깊어질 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가 각자 텐트로 들어갔다.
텐트에 들어오자마자 샤워를 했는데 뜨거운 물이 잘 나와서 기분 좋게 씻었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할 수 있다니, 이 정도라면 한 달이라도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텐트 바닥에서 거미가 기어 다니기도 했지만, 나이로비의 숙소에서 바퀴벌레를 수십 마리씩 보았더니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다만 불을 끄고 자려고 누웠는데 꽤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있었다. 근처에 작고 낡은 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밤 10시가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노래하며 기도하며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목사가 마이크를 들고 한 참 이야기한 후에 “할렐루야”라고 하면 모여있는 사람들이 다 같이 따라서 “할렐루야”라고 했다. 소리만으로 짐작하건대, 족히 몇십 명은 모여있는 듯했다. 그렇게 두세 번을 기도하고는 요란한 음악을 틀고 소리 지르며 노래했다. 그러고 나서 노래가 끝나면 다시 목사가 마이크를 잡고 말을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참 마음 따듯해지는 모습이기도 했다. 이 깊은 오지에서 서로를 잘 아는 소수의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서로 의지하고 힘이 되어 주는 것이다. 그들의 고된 삶에서 일탈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 그렇게 생각하면 밤새 끝나지 않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런 먼 곳에서 지내자면 아무리 저들이라도 쉽지 않겠지. 그러나 나는 몹시도 피곤했는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느새 금방 잠들어버리고 말았다.
새벽 5시 50분, 안락한 텐트 안에서 밤새 한 번도 깨지 않고 푹 잘 수 있었다. 2월 말, 아프리카 초원에서 보낸 밤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자기 좋은 날씨였다. 일어나서 텐트의 지퍼를 열고 밖으로 나왔는데 여전히 어두웠다. 나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다시 텐트 안으로 들어와 씻지도 않고 바로 짐을 챙겨 식당으로 갔다. 잭슨이 6시 30분까지 모이라고 했기 때문에, 30분 정도는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커피를 한 잔 하고 싶었다. 식당에는 아직 아무도 나와있지 않았다. 식사로는 식빵과 각종 발라먹을 것들, 콩 수프, 소시지 그리고 얇은 팬케익이 있었는데 아침식사로 딱 좋았다. 식사와 함께 블랙커피를 두어 잔 마시니 잠이 깨며 정신이 들었다.
든든하게 식사를 마치고 약속 장소인 차 앞으로 갔다. 아직 태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서서히 밝아지며 점차 구름도 보이기 시작했다. 이내 가이드 잭슨이 왔고 우리는 모두 차에 올라탔다. 그러나 출발할 수 없었으며 잭슨은 다시 차에서 내려 숙소 방향으로 들어갔다. 약속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인도인 네 명이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잭슨이 들어가고 얼마 후 이들을 데리고 나왔는데, 천천히 걸어 나오며 전혀 늦은 사람들의 태도가 아니었다. 심지어 우리에게 늦어서 미안하다는 간단한 인사치레조차, 아침인사조차 하지 않았고 그저 자기들끼리 이야기하며 차에 올라탔다. 나는 분명히 인도에서 기다림을 배우고 모든 일을 급하지 않게 천천히 하는 마음가짐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인도는 천천히”의 의미는 많이 변질된 것 같다. 여유롭고 천천히 하는 것은 좋으나, 늦어버리라는 말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그로 인해 남에게까지 피해를 주어버린다면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럽게 외치는 “천천히”는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천천히 여유롭게 움직이고 싶었다면, 일찍 나와서 여유를 가졌어야 할 것이다. 늦게 일어나 굼뜨게 행동하면서 “천천히”를 외친다면, 그건 단순히 게으른 인간의 핑계일 뿐이다.
‘잭슨팀’ 10명이 다시 모였고 우리는 아침 일찍부터 마사이마라로 다시 들어갔다. 아직도 봐야 할 야생동물들이 많이 남아있었다. 잭슨은 초원을 달리다가 사방이 훤히 보이는 어떤 곳에서 멈추고 말했다. “저쪽에서 태양이 올라올 겁니다”, 그리고 우리는 일제히 잭슨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태양의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으나 얼마나 떠올라있는지 알 수 있을 만큼 일출의 시간이 가까웠다. 그리고 잠시 후, 태양이 강한 빛을 내며 빼꼼 모습을 드러내었고 그것을 본 우리는 동시에 환호했다. 여행하며 일출을 참 많이 본다. 네팔 히말라야 산맥을 트레킹하며, 인도 바라나시에서 갠지스강 위를 거닐며 그리고 케냐 마사이마라 초원 위에서 일출을 보았다. 세계 어디서나 태양은 성스럽고 신비한 존재로 여겨지며, 태양이 떠오르는 순간은 지구 상에 공존하는 모든 동식물이 함께 반기고 환영하는 시간이다. 가만히 태양이 떠오르는 것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평온해지고 무슨 일이든 잘 될 것만 같은 용기가 생긴다. 태양은 눈에 보일만한 속도로 순식간에 산등성이를 넘어 하늘 위로 떠올랐고 잭슨은 다시 차에 시동을 걸어 넣고 야생동물을 찾으러 떠났다.
둘째 날의 마사이마라 게임드라이브가 시작됐다. 함께 일출을 본 많은 차들이 마사이마라의 드넓은 초원을 샅샅이 파헤치며 야생동물을 찾아내려고 애썼다. 그렇게 오전 시간 내내 우리가 찾아내어 본 동물은, 새끼고양이류(Kitten), 사자 무리, 독수리, 타조, 악어, 하마, 하이에나, 개코원숭이, 치타, 표범 그리고 이름 모를 것들도 많이 보았다. 역시나 코끼리는 보고 또 봐도 등장할 때마다 감탄했다. 아프리카 코끼리의 크기가 워낙 거대하다 보니 다들 그 위엄에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하이에나, 야생 하이에나를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내가 생각하던 하이에나는 무척이나 크고 단체로 몰려다니며 사나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본 하이에나는 혼자 있었으며 생각보다 작고 강아지 같은 귀여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초원을 뒤집고 다녔다. 그 귀한 모습을 우리에게 꽤나 감추고 있는, 모두가 기다리고 있는 ‘그 녀석’을 찾아야 했다. 케냐 마사이마라 사파리 투어에서는 꼭 봐야 할 ‘빅 파이브(Big Five)’가 있는데, 그것은 사자, 코끼리, 버팔로, 표범 그리고 코뿔소이다. 우리는 빅 파이브의 네 마리 야생동물은 모두 보았으나 정작 가장 보고 싶은 코뿔소를 보지 못했다. 안토니가 잭슨에게 물었다. "오늘 코뿔소 본 팀 있어요?" 그러자 잭슨이 "아니요, 아직 한 팀도 없어요"라고 대답했다. 오늘이 사파리 투어의 마지막 날이었고 어쩐지 우리는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잭슨이 우리에게 “아직 시간이 남아 있으니 더 찾아봅시다”라고 말하며,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쿠나 마타타!”
아침 6시에 식사를 하고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해가 중천까지 올라왔음에도 이미 초원 깊은 곳까지 들어온 잭슨이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아, 점심은 언제 먹으려고 그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마찬가지로 배고픈 듯했다. 그렇게 줄곧 초원을 달리던 중 나는 따가운 햇볕과 열어둔 창문으로 불어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밀려오는 잠을 참지 못하였다. 고개를 사방으로 휘청거리며 졸던 그때, 차가 멈추는 느낌에 잠에서 깨었고 잭슨이 “여기서 점심 먹고 갑니다”라고 했다. 나는 거의 눕다시피 한 자세를 바로 잡아 앉으며 차가 멈춘 주변을 돌아봤는데 여전히 드넓게 펼쳐진 초원에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잭슨은 나무 그늘 아래로 돗자리를 두 개 깔고 박스를 하나 꺼냈다. 박스 안에는 종이 백으로 잘 포장된 식사가 여러 개 들어있었다. 나는 종이 백 하나를 꺼내 들고 무엇이 들었는지 살펴보았는데 치킨 한 조각, 샌드위치, 사과, 바나나 그리고 과일 음료가 들어있었다. 나는 이 정도면 최고의 점심식사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이곳은 야생동물의 서식지, 위험하기 때문에 차에서 내리는 것은 가이드의 허락 없이는 금지되어 있었는데, 초원 한가운데 나무 그늘 아래서 점심식사를 하다니, 이렇게 좋을 수 없었다. 우리는 돗자리에 평화로이 눕고 앉아 식사를 시작했다. 치킨을 뜯고 있는데 옆으로 작은 새 한 마리가 와서 앉았다. 노란 줄무늬에 반짝이는 파란빛이 도는 아름다운 작은 새였다. 그때 중국인 부자의 아버지가 먹던 샌드위치의 빵 한 조각을 떼어내 던져주었는데, 우리는 새가 도망가버릴 줄 알고 놀랐지만 오히려 우리에게 총총걸음으로 더 가까이 다가와 빵 조각을 쪼아 먹었다. 조용했으며 평화로웠다. 다만 햇볕이 몹시도 뜨거워 우리는 식사를 마치자마자 바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는 다시 코뿔소를 찾으러 마사이마라 초원을 달렸다. 잭슨은 끊임없이 다른 차들과 무전을 나누며 엑셀을 밟았고, 나는 배가 부르고 차가 흔들리니 더욱 졸음이 쏟아져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이따금씩 깨어나 밖을 보면 여전히 초원을 달리고 있었으며 나는 금세 다시 잠에 들고 말았다. 그렇게 나는 오후 내내 졸다가, 깨어났을 때 우리는 이미 마사이마라 국립보호구를 나오고 있었다. 나는 로티에게 코뿔소 찾는 것은 포기한 것인지 물었는데, 결국 어느 팀도 오늘 코뿔소를 찾지 못했다고 했다. 아쉬웠지만 별 수 없이 우리는 사파리 투어를 그렇게 마쳐야만 했다.
우리는 숙소에서 잠시 쉬고 마사이족 마을(Masai Village)을 가기로 했다. 이곳은 추가적인 금액을 지불해야 했기 때문에 자율적으로 가고 싶은 사람은 가고 원치 않는 사람은 가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다. 인도인 네 명은 가지 않겠다고 했으며, 그렇게 해서 모인 사람은 나와 안토니, 로티 그리고 중국인 부자, 다섯 명이 함께 마사이족 마을에 가게 됐다. 이곳은 잭슨이 아니라, 마사이족에서 한 청년이 나와 우리를 안내해주었으며 그의 이름은 알렌(Allen)이었다. 알렌은 영어를 굉장히 잘했고 곧 부족의 장이 될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간단히 서로를 소개하고 그를 따라 마사이족 마을로 갔다. 걸어서 오 분 거리에 있는 아주 가까운 마을이었다. 우리가 마사이족 마을로 걸어갈 때 수많은 마사이족 사람들이 우리를 둘러싸고 따라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형형색색의 커다란 천을 몸에 두르고 있었는데, 이들은 가족끼리 같은 색의 천을 몸에 두르고 다닌다고 했다. 그리고 무척 특이했던 점은 다들 귓불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는데, 그 구멍이 얼마나 넓은지 뒤에 있는 사람의 얼굴이 훤히 들여다 보일 정도였다.
우리를 입구에 세우고 알렌은 마사이족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러는 동안 다른 부족원들이 우리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서서 환영인사를 할 준비를 했다. 알렌이 설명을 마치자 일렬로 줄을 서 있던 부족원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입으로 나팔소리 같은 것을 내며 굉장한 화음을 만들어냈고 한 발씩 가까이 다가오며 춤을 추었다. 그들은 그렇게 한 발씩 다가오다가 우리 바로 앞에서 다시 뒤로 돌아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우리 주변을 뱅뱅 돌며 춤을 추기도 했고, 우리 앞에 다시 일렬로 서서 몇 명씩 나와 제자리에서 점프를 했다. 서로 점프를 높이 하기 위해 경쟁을 하는 듯 보였는데, 점프를 가장 높이 하는 남자가 여자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알렌은 우리에게 가서 같이 춤을 추어도 된다고 했다. 우리가 그들 사이로 들어가자, 그들은 자신이 두르고 있던 화려한 색의 천을 우리에게 둘러주었다. 그리하여 나도 그들과 함께 나팔소리를 내며 춤을 추다가 앞으로 나가서 점프를 하기도 했다.
환영인사가 끝나고 그들은 곧 우리에게 손바닥으로 나무를 비벼 원시적인 방법으로 불 피우는 것을 보여주었는데, 일 분도 채 되지 않아 불이 만들어졌다. 그러고 나서 이들은 마사이족의 전통 가옥을 보여주겠다고 했다. 한 명씩 영어를 할 줄 아는 남자가 우리를 각각 안내하여 그들의 집으로 들어갔다. 나도 한 남자를 따라 그의 집으로 들어갔는데, 흙으로 만들어진 집 내부에서는 작은 화로에서 불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너무도 어두워서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남자는 눈이 적응되고 나면 차츰 보일 것이라고 했는데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부는 몹시 더웠고 땀이 주룩주룩 나기 시작했다. 불빛을 비추어 집안을 살펴보니 주방이며 잠자리며 신기하게도 필요한 것이 전부 있었다. 나는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그의 딸이 조용히 내 옆으로 와서 앉았다. 그다지 어린아이를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순간 예뻐서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이야기가 끝나고 기념품을 꺼냈다. 그리고는 “기념품을 팔고 모인 돈은 마사이족뿐만 아니라 근처의 모든 부족이 함께 공유할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쓰입니다”라고 덧붙였다. 나는 원래 이런 곳에서 기념품을 사는 경우가 없지만, 만족스러운 투어에, 그리고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목걸이 하나와 팔찌 하나를 사만 원이 넘는 돈을 주고 구입했다. 흥정도 없었으며 그저 그들이 원하는 가격을 그대로 주고 샀다. 그리고 잠시 후, 우리는 다시 마을의 가운데로 모여 만났다. 서로 물어보니 안토니는 거의 십만 원을 썼고 로티는 삼만 원을 썼다. 그러나 아까 본 그 아이들을 도와줬다고 생각하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시간은 너무도 빨리 흘러 벌써 마지막 날이 밝았다. 우리는 아침 일찍 가볍게 산을 올랐다 내려오기로 했다. 인도인 네 명은 나오지 않았으며 언제나 그렇듯 다섯 이서 올라가게 되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이른 시간, 마사이족 알렌의 동생 토니(Tony)가 우리와 함께 오르기로 했다. 캠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산이 하나 있었는데, 약 260m 되는 높이의 완만한 산이었다. 우리는 토니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아침이라 덥지 않고 시원했으며 걷기 딱 기분 좋은 날씨였다. 그렇게 산을 오르기를 고작 몇 분, 중국인 아들이 너무도 지쳐 보였다. 산은 가파르지도 높지도 않았으며 날씨도 시원해 상쾌했지만, 아들은 올라가다 쉬기를 반복했다. 절대 힘든 길이 아니어서 저렇게 힘들어하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도 아들이 멈출 때마다 계속해서 멈춰야만 했다. 해는 이미 진작에 떠올랐으며 아들은 계속해서 쉬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타이르기도 하고 달래기도 했지만 너무도 힘들어하는 친구를 억지로 끌고 갈 수도 없었다. 결국 아버지가 아들의 짐을 들어주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은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사실 산이라기보다 뒷동산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고 이토록 힘들어할 곳이 아니었다. 그렇게 우리도 답답해질 무렵, 이윽고 아들이 구토를 했다. 그것을 보고 우리는 정말 심각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체력이 아무리 좋지 않아도 이건 심각한 수준이었다. 이제 고작 스무 살인데, 우리 앞으로 산을 뛰어가고도 남았어야 할 나이에 저 정도라니, 중국 대기오염의 심각성이 걱정되기도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도움으로 결국 꼭대기까지 같이 오르긴 했지만, 다시 내려갈 때는 다리를 심히 휘청거려 보는 내가 불안했다.
등산을 마치고 우리는 숙소로 돌아와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이것을 마지막으로 마사이마라 사파리 투어의 모든 일정이 끝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인도인 네 명과의 트러블은 없었다. 우리는 짐을 챙겨 차에 올라탔다. 그렇게 몇 시간을 달려 멈춘 곳에서 점심식사를 했고, 그러고 나서 또 한참을 달려 나이로비 시내에 도착했다. 먼저 로티가 내렸고, 그 후에 안토니가 내려서 숙소로 돌아갔다. 그리고 인도인 네 명이 내렸는데, 그래도 나는 차에서 내려 행운을 빌어주며 인사를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숙소에 도착했을 때에는 오후 네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나는 숙소에 짐을 풀고 혼자 저녁을 먹으러 나왔는데, 사파리 투어를 마치고 나오니 나이로비 시내가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침내 케냐의 모든 일정이 끝났다. 어느덧 아프리카라는 대륙에 꽤 적응한 것 같지만, 유독 너무도 외롭고 한국이 그립다. 아무래도 시차도 한몫하는 모양이다. 인도에서는 그나마 3시간 30분의 시차였다면, 아프리카로 오니 6시간의 시차로 밤이 되면 휴대폰이 조용하다. 너무도 위험하고 두려워 밖을 나갈 수도 없고, 그렇게 혼자 방 안에 틀어박혀 글을 쓰고 있으면 외롭기도 하고 문득 우울해지기도 했다. 이 여행은 무엇을 위한 것이며 도대체 언제 끝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케냐 나이로비에서는 대사관 직원을 빼고는 한 번도 한국인을 보지 못했다. 아무래도 아프리카에는 한국인이 매우 드물다. 아니, 동양인이 매우 드물다. 낮에는 한 중국인을 만났는데, 한참을 같이 이야기했다. 같은 동양인이라는 것이 어찌나 반갑던지, 아직 아프리카가 완전히 적응되지 않은 모양이다.
나이로비 숙소에 틀어박혀 글을 적으며 머리를 싸매고 있는데 엄마에게 사진 한 장이 도착했다. 사진에는 투명한 비닐에 포장된 인도 숄 한 장, 제주도 감귤, 녹차, 한라봉 크런치 초콜릿 박스, 그리고 여행 내내 그토록 나를 괴롭히던 고장 난 휴대폰이 나란히 놓여있었다. 나와 인도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간 정규가 제주도를 다녀오고 나서, 약속대로 우리 집에 들러 엄마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며 선물을 주고 간 것이었다. 잠시 후에 정규에게 연락이 왔다. “정아, 어머니께 전달해드렸다. 나한테 너무 고마워하시는데 내가 울컥하더라” 그리고 나도, 정규의 연락을 받고 울컥했다. 그리고 다시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아들 전화기 보니까 눈물 나네, 속 썩인 전화기”라고 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정규가 선물도 네가 산 것처럼 말하길래, 무안할 까 봐 모르는 척했어. 정이 한국 오면 친구들 초대해서 집에서 다 같이 밥 먹자” 하마터면 셋 다 눈물바다가 될 뻔했다. 그리고 엄마는 정규가 선물한 숄을 두르고 사진을 한 장 찍어 내게 보내주었는데 귀여워서 웃음이 났다. 감정이 이랬다 저랬다, 요동쳤다. 그러나 생각한 루트를 끝내기 전까지는 멈출 수 없다. 인천항에서 출발한 여정이 어느덧 아프리카까지 왔다. 더 이상 서쪽으로는 가지 않을 것이며 여기서 우회하여 북쪽으로 올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버스를 타고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ADDIS ABABA)로 떠난다! 무려 2박 3일의 이동 여정이 될 것이다. 케냐 스와힐리어로, 하쿠나 마타타(Hakuna matata)! 다 잘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