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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얀 Mar 05. 2020

돈독

연소득 480만원 대문호를 꿈꾸던 가난한 예술가의 대부호 되기 프로젝트



작년 여름.


살던 집의 전세 계약 만기일이 가까워져 은행에서 대출 상담을 받던 중이었다. 요즘 금리도 많이 내렸고 생애 첫 주택에, 투기 과열 지구가 아닌 곳이라면 집 값의 70%까지도 대출이 가능하다 하니 내일모레 마흔인 나도 이 참에 작은 집이라도 마련해 볼 요량이었다.



다행히 내가 살고 있는 부천에는 1억 초반대의 빌라가 꽤 있어서 부리나케 대출에 필요한 서류를 떼어 은행에 갔다. 담당 직원에게 서류를 건네고 달콤한 내 집 마련의 꿈을 꾸고 있을 때, 2018년도 소득증명서를 든 은행원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러니까,,,, 이게,,, 사백,, 팔십만 원,,, 인 거죠?"



국민 소득이 3만 달러를 넘어서고 있는 작금의 싸우쓰 코리아에서 480만 원이라는 연소득은 실로 믿기 힘든 것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나의 작년 연소득이었다. 나는 옆 창구의 사람들에게 나의 작고 귀여운 소득을 들키게 될까 봐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면서도 단호한 변명을 해 본다.



"아니, 제가 작년에 받은 계약금은 분명히 800만 원이었는데,,, 왜 480만 원으로 나온 건진 저도 모르겠어요......" 


480만 원이나 800만 원이나...... 아무튼 나의 연소득은 천만 원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 팩트였지만, 나는 글을 쓰는 예술인이라는 것을, 지금 쓰고 있는 드라마가 대박이 나면 상황이 180도 달라질 수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예술인은 원래 가난한 것'을 방패로 삼았다. 나의 예술인의 고백에도 별다른 반응이 없던 은행원은 바로 결론부터 말했다. 



"아무튼, 이러면 DTI에 걸려서,, 원하시는 만큼 대출을 받기가 어려우세요,,,"

"네?" 

"요즘 대출 규제가 까다로워져서 소득에 대비해서 대출 금액에 제한이 있어요,,, 그러니까 소득을 보고 대출을 갚을 능력을 결정한다는 거예요,,, (답답) 혹시 다른 근로소득은 없으신가요?"

"예? 아,,,, 네,,, 제가 작년부터는 드라마만 쓰고 있는 상황이라서,,,," 



은행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나는 받아쓰기 빵점을 받은 초등학생처럼 의기소침해졌다. 그러게 연소득이 500만 원도 안 되는 주제에 집을 사겠다고 그 난리를 쳤으니......  이게 뭔 개쪽인가,,,                                                                 



이제껏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살았던 게 문제였을까..... 두 권의 책을 내고, 먹고살기 위해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고, 그러다 드라마 계약을 따내고 기뻐하고 몇 년째 모든 열정을 글쓰기에 쏟았을 뿐인데...... 돌아오는 건 이런 개망신뿐이라니!!!! 분하고 억울했지만 돈의 세계는 냉정했다. 아니, 한편으로는 아주 심플했다. 내가 유능한 작가라면 이제껏 몇 권의 책을 냈는지, 나에겐 얼마나 많은 팬들이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책이 팔렸는지를 숫자로 말해줄 수 있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였다. Anyway 결론은,                                                                                                                                                                                              

무려 11개의 부동산을 돌아다니며 내 생애 첫 집을 보러 다녔던 나의 발걸음이 모두 물거품이 되어버렸다는 것이었다. 2년마다 짐을 싸야 하는 이사 걱정 없이 책으로 가득 채운 나만의 공간에서 좋은 작품을 쓰겠다는 꿈도, 남는 방은 에어비앤비로 쓰며 민간 외교를 펼치겠다는 꿈도, 과거의 나처럼 가난한 여행자들의 쉼터를 만들겠다는 꿈도 모두 날아갔다. 



그때 깨달았다.

돈은 단순히 무엇을 살 수 있는 교환의 가치보다 기회를 갖게 해 준다는 것.



내가 공을 들여 세워둔 여러 기회와 가능성을 단번에 앗아가 버린 그 종이 한 장을 내려보며 나는 난생처음으로 돈에 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았다. 



돈.

돈이란 무엇인가.

돈.

누구도 제대로 말해주지 않았기에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돈.

그랬기에 한 번도 내가 가져본 적 없었던, 돈.



나와 돈의 관계는 어쩐지 잘못된 연애와 닮아있었다. 돌이켜 보면 나는 돈에게 항상 일방적으로 끌려 다녔다. 나름 하고 싶은 것 하고 자유롭게 살았다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늘 돈에 제한당했고 끌려 다녔다. 매달 다가오는 카드값은 또 어떻게 막을까, 벌어 놓은 돈을 까먹으며 하는 이 생활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늘 불안에 시달렸다. 그러면서도 예술을 하는 사람이라면 돈에 관심을 두는 것 자체가 불결하다 생각했다. 무엇보다 돈이 없어 괴로운 건,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베풀 수 있는 여유가 없어진다는 것이었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밤을 새워 쓴 한 장의 편지보다 숫자 몇 개가 적힌 종이 한 장의 파급력이 더 셀 수도 있는 사회에서. 나는 내일모레 마흔인데, 어쩌면 평생 혼자 살 수도 있고, 어쩌면 평생 성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최악의 경우는 성공하지 못하고 평생 혼자, 오래, 살 수 있다. 돈 없이.



그때부터 돈에 대해 공부를 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부자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부자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어디 가서, 누구에게, 무엇부터 배워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일단 내 방식대로 매일 도서관에 가서 경제 신문과 돈 관련 책을 섭렵했다. 예전에는 문학 외에 다른 책은 죄다 시시하다 생각했는데, 그것은 내 연소득만큼이나 귀여운 생각이었다. 돈의 세계는 생각보다 훨씬 넓고 복잡하고 어려웠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다. 



그렇게 공부를 시작한 지 1년이 가까워진 지금, 관련 책 200권을 읽었고, 월소득은 예전의 연소득과 가까워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많이 변했다. 누군가는 돈독이 오른 예술가만큼 추한 게 없다고 흉을 보겠지만, 나는 이제 느낄 수 있다. 늘 끌려 다니기만 했던 돈과 나와의 관계가 조금씩 수평을 맞추고 있다는 것을. 무엇보다 돈과 나의 관계가 조금씩 돈독해지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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