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얀 Mar 10. 2020

종잣돈을 말할 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

It's small and need a time 


때는 1995년에서 1999년. 엄마는 우리 가족이 "전세금으로 내 집 마련"이라는 캐치 프레가 걸린 울주군 외곽의 아파트로 이사를 가기 전까지 매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걸었다. 


오후 3시부터 새벽 2시까지. 엄마는 공업탑 로터리에 있는 세시봉이라는 노래주점 주방에서 일했다. 그렇게 하루의 반을 술 취한 사람들의 안주를 만들고 그릇을 닦았다. 한 달에 쉬는 날은 두 번. 그 두 번을 제외하곤 귀갓길 택시비로 나오는 2000원을 아끼려고 새벽 밤을 혼자 걸었다.


나는 당시 중학생이었고 많이 아팠다.


중 2병이었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중 2병은 정말로 약도 없다. 그때 나는 세상이 싫었고 아빠와 선생들이 싫었고 아무튼 누구든지 다 줘패버리고 싶었다. 같은 병을 앓던 친구들은 우리 집에 모여 몰래 화장을 한다거나, 담배를 피운다거나, 야한 비디오를 보는 등 만 15세가 하지 말아야 할 것들에 집중적으로 몰두했다. 울산에 처음 이사 왔던 초등학교 5학년 때는 아래로 푹 꺼진 방 두 칸짜리 좁은 반지하 집이 부끄러워 친구들을 초대해 본 적도 없지만, 우리만의 아지트가 간절해지는 나이가 되자 낮에 부모님이 안 계셨던 우리 집은 딱 안성맞춤, 부끄러울 것도 없었다.



엄마는 오후 3시가 되면 어김없이 내가 좋아하는 포도와 토마토를 냉장고에 채워놓고 세시봉으로 갔다. 그리고는 택시비로 받은 2000원을 주머니에 넣고 25분 가량 밤길을 걸어 집으로 왔다. 나도 몇 번쯤은 집 대문 앞에 언니와 함께 엄마를 기다렸던 적도 있었다. 그럴 때 엄마는 "추운데 왜 밖에 나와있냐고" 하면서도 내심 좋아했다. 그게 아니라 엄마는 나를 좋아했다. 공부도 못 하고 행실도 불량하고 말도 오지게 안 듣는 딸을 이상하게도 좋아했다. 그리고 그렇게 몇 년 동안 택시비를 아껴 모은 돈으로 내가 갖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컴퓨터를 사 주었다.


486 팬티엄 컴퓨터. 당시에도 200만 원이 넘는, 그 대단한 것이 나와 언니가 함께 쓰는 작은 방에 놓여 있다는 자체가 뭔가 비현실적이었다. 꼬깃꼬깃한 이천 원짜리를 모아서 저것을 샀다는 것도 그랬다.


하루 2000원 X 30일 =      60,000원

60,000원 X 12개월  =    720,000원

720,000원 X 3년     =  2,160,000원 


실로 작은 종잣돈이 이뤄낸 기적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과거의 행실을 참회하고 BASIC 자격증을 1급을 무난하게 패스하며 각종 컴퓨터 프로그래밍 대회에 나가 입상을 하며 어린 빌 게이츠로 추앙받기 시작했다-고 쓸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그때의 나에겐 그런 철딱서니와 공부 머리가 없었다. 엄마는 없는 살림에도 꾸준히 나에 대한 투자를 아끼지 않으며 몇 년째 컴퓨터 학원에 보냈지만, BASIC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프로그램이었고 수업은 들어도 들어도 이해가 가지 않아 그냥 매일 한메타자만 냅따 쳤다. 


한메타자는 어떠한 이해와 암기도 필요 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활자들을 따라 치며 베네치아 성을 구하고, 경쾌한 기계식 키보드의 감촉을 느끼며 알퐁스 도테의 단편을 따라 치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단 타자를 빨리 치면 왠지 컴퓨터를 잘하는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에 컴퓨터로 뭔가를 열심히 하는 척, 엄마를 속이기에도 좋았다. 그렇게 나의 타자 실력은 건반 위의 손열음이 되어가고, 500타의 놀라운 타자 실력은 빛처럼 빠른 486 컴퓨터를 만나 나를 PC통신의 세계로 데려갔다. 


하이텔, 나우누리, 천리안. 이름부터도 저 멀리 손에 닿을 수 없는 어떤 그리움을 표현하는 듯한 PC통신의 세계. 그중에서도 PC통신의 꽃으로 불리는 채팅방은 또 얼마나 신비한 세계인가. 이제는 아지트가 없어도 전국 각지의 중2병 환자들과 만나 밤새도록 선생 욕을 하고 야한 얘기도 할 수 있다! 새로운 세상을 만난 나는 그렇게 매일 밤 사이버 꾸러기들과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새벽 2시 튀김 냄새를 묻히고 돌아오는 엄마가 오면 뜨겁게 달아오른 모니터 본체를 끄며 마이크로 소프트의 신입 사원처럼 기지개를 켰다.


그런 사기 행각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가면서도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팬티엄 컴퓨터를 이용해 성적표를 위조하는 법을 개발하고는 학업과는 더욱 담을 쌓았다. 나의 일상이 달라지지 않았던 것처럼 엄마의 일상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엄마는 세시봉이 경영난으로 문을 닫게 되자 여자들이 나오는 노래방의 주방에서 아침 7시까지 일했다. 저녁 7시부터 아침 7시까지. 쉬는 날은 여전히 한 달에 두 번이었다. 그렇게 받은 월급 120만 원을 아껴 엄마는 다시 10만 원짜리, 15만 원짜리 적금을 들고 펀드를 들었다. 그렇게 모은 종잣돈은 다시 나와 언니의 대학 학비가 되었다. 그때쯤엔 나도 살짝 정신을 차려 "예술보다는 기술"이라는 부모님의 말에 치기공과로 입학했지만, 타지에서의 생애 첫 자취생활은 어린 날라리에게 더욱 큰 날개를 달아주었다.


나는 갑자기 주어진 육신의 자유를 정신없이 씹고 뜯고 맛보며 대학 생활 내내 남자랑 놀아났다. 3년 내내 캠퍼스 커플이었고, 자취방은 최고의 아지트였다. 학교는 도서관에 책 빌리러 갈 때나 팻트병에 정수기 물이나 담아올 때 들렸다. 결국 평점 3점을 못 넘기고 졸업했고 어찌어찌 사회인이 되었다. 그리곤 다시 병에 걸렸다. 일명 젠부이야다병. 한국말로 하면 "다 싫어 병" 되시겠다. 취직을 하면 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이건 내가 생각했던 일이 아니라고, 아니면 그냥 아침에 일어나기 싫다는 이유로 다 때려치웠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시간을 쓰던 이십 대를 보내고 나니 어느새 성큼 서른이 다가왔다. 서른. 이쯤 되면 잔치는 끝났다는 걸 알아야 했지만, 여전히 어딘가에 얼이 빠져있던 나는 "파티는 이제부터 시작"이라며 남들 시집가고, 아파트를 살 때 서울로 올라와 친구 집에 얹혀살며 글을 썼다. -살면서 글쓰기로 상을 받아 본 적은 전무하거니와 일기 조차 제대로 써 본 적 없는 주제에 왜 작가가 되고 싶었는지는 아직도 모를 일이지만-


글을 쓴다는 핑계로 백수로 지내다가 여러 사람의 도움과 하늘의 도움으로 내 이름으로 된 책을 냈지만, 작가 타이틀이 밥을 먹여 주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책을 내고 나니 생활은 더 힘들어졌다. 글만 써서 먹고살 수가 없으니 다시 직장을 다녀야 했고 쉬어야 할 시간에 글을 써야 하니 결국 이것도 저것도 안 되었다. 힘을 내어 글을 쓰고 책을 내고, 그렇지만 망하고, 다시 아르바이트를 구하고 그래도 포기가 안 되어 글을 쓰기를 반복하다 보니 결국 벌어놓은 돈을 까먹고 사는 연소득 480만 원의 가난한 예술가가 되어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핑계도 통하지 않는 나이 마흔. 이 상태로 고향으로 내려가자니 자존심이 상하고, 그렇다고 여기에 남아 있자니 대출 끼고 1억짜리 빌라 하나 사는 것도 내 힘으로 할 수 없는 처지.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을 때 엄마에게서 연락이 왔다. 이제는 나조차도 내가 싫어질 지경인데 여전히 내가 좋다는 엄마는 그래서 모자라는 돈이 얼마냐고 하셨다. 이쯤 되면 엄마도 부실한 기업에만 투자하는 실패한 투자자라는 깨달아야 할 텐데도 모아 둔 돈이 있으니 얼마나 필요한지 말을 해 보라고 했다. 그런데 아니, 엄마 잠깐만요. 


<아파트 경비원으로 일하는 아빠. 맞벌이 부부인 언니의 조카들을 봐주며 한 달에 받는 용돈 70만 원, 국민연금 33만 원이 소득의 전부인 엄마는 언제 또, 무슨 돈을, 어떻게 모았단 말인가>


그때 나는 종잣돈에 대해 확실히 깨달았다. 


종잣돈: 어떤 돈의 일부를 떼어 일정 기간 동안 모아 묵혀 둔 것으로, 더 나은 투자나 구매를 위해 밑천이 된다는 돈. 더 나은 투자나 구매라는 아리송한 주어 덕분에 뭘 좀 해보려면 그래도 한 달에 팔십은 모아야 1년에 천만 원인데, 한달에 200벌어 200 쓰는데 그 돈을 어떻게 모아,,, 하며 포기해버렸던 지난날.


종자 + 돈 = 종잣돈

종자(種子) = 씨앗


우리가 집중해야 할 것은 종잣돈의 돈이 아니라 작은 종자 그것이었음을. 


씨앗은 작고, 싹을 티우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하루 이천 원을 모으려 밤길을 걷던 그 마음으로 한 달에 십만 원, 이십만 원을 차곡차곡 모아 생애 첫 집을 사고 싶다는 딸에게 덜컥 3000만 원을 내어 주겠다는 엄마. 나는 그런 엄마의 씨앗 돈을 생각하며 다시 늦깎이 아르바이트생이 되었다. 그리고 아침 7시, 출근 전 시간을 아껴 책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며 이 글을 쓴다. 이 한 페이지의 글 하나가 언젠가는 싹을 띄우는 나만의 씨앗이 되길 바라며, 차곡차곡 소중하게. 














매거진의 이전글 돈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