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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옹알이 Sep 05. 2021

아버지에 대하여

열심히 살다 간 당신, 바람 되소서!

  그 얼굴은 본 적이 있다. 아버지가 딱 만취 하시고 잠이 든, 세상 평온하고 편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너무 곤히 잠든 얼굴이 가끔은 덜컥 겁이나 아버지의 인중에 손가락을 대보곤 했다. 그럴 때면 술 냄새가 섞인 뜨거운 숨이 내 손가락에 닿았다. 술을 많이 드시는 게 걱정 되면서도 곤히 잠든 아버지의 얼굴을 보는게 좋았다. 딱 그 시간만큼은 아빠의 얼굴에 한점 걱정도 맺혀 있지 않았으니까. 세상에서 가장 멋진 우리 아버지. 2020년 10월 25일 오전 9시 27분, 곤히 잠든 그 얼굴에는 더 이상 아빠의 숨이 없었다.





   는 아빠를 닮아 추위도 참 많이 타는데 하필 올해 들어 가장 춥다고 느꼈던 10월 24일, 아버지가 응급실에 실려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빠 소식에 놀래서인지 날이 추워서인지 계속 덜덜 떨었던 기억이 난다. 홍천에서 진주까지 급하게 달려갔으나 코로난지 나발인지 때문에 응급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대기실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는데 다행히 저녁쯤 괜찮아지셨다는 얘길 듣고 아빠와 영상통화를 했다. 문 두개만 건너면 아빠가 있는데 너무 멀게 느껴졌다. 다음 날 일반 병실로 옮기면 얼굴 보자며 아빠는 벽에 똥칠할 때까지 살거라고 했다. 그러나 그 날 밤이 아버지에게 너무 가혹했나보다. 이미 내가 응급실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는 의식이 없었다. 여기저기 흩뿌려진 피와 갈기갈기 찢어진 옷가지 위에 아빠가 누워있었다. 몸 여기저기에 설치된 알 수 없는 기계들이 아버지가 간신히 숨을 붙이고 있다는 걸 증명했다. 위험한 상황이라 빠른 대처를 위해 옷도 이불도 덮어주지 않는다는 걸 알았지만 나는 아빠가 너무 추울 것 같아서 자꾸 화가 났다. 내가 추우면 우리 아버지는 분명 더 추우실텐데. 엄마는 차가워지는 아버지의 발을 붙잡고 놓지 않았다. 놓지 않겠다고 했다. 몇 번의 심정지가 오고 나는 결국 이성을 놓아버렸다. 어린아이처럼 우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없었다. 더 이상의 심폐소생술이 의미 없다는 레지던트는, 우리 가족에게 심폐소생술을 하지 않는데 동의하라고 했다. 우리는 선택해야 했지만 쉽사리 결정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하면 살아나실 것 같은 미련에, 이렇게 갑자기 아빠를 잃을 수 없다는 당혹감에, 예상조차 하지 못했던 이별의 아픔에 울고만 있었고, 결국 엄마가 말했다.


"우리 신랑 너무 아플 것 같아요… 그만 하세요…"


  내가 누굴 닮아 속눈썹이 긴가 했더니 아빠였다. 편안한 얼굴로 영면에 든 아버지의 속눈썹을 바라보며 그걸 이제서야 깨닫는 게 죄스러운 마음 뿐이었다. 아직 체온도 따스하고 살결도 보드라운데. 멈춘 심장을 뛰게 하느라 가슴뼈가 내려앉은 자리엔 시퍼렇게 멍이 들고 있는데.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고 혼란스러워 떨리는 손을 아버지 인중에 가져다 댔다. 기어코 내손으로 직접 죽음을 확인하고서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무런 숨결도 느껴지지 않는 손 끝에서부터 무언가 무너져내렸다. 나의 큰 그늘이 사라졌다. 간호사는 아빠의 시신 위로 사망신고서를 두고 갔다. 촛점 없는 눈으로 겨우 바라본 종이에 쓰인 아버지의 연세, 만 나이로 53세. 숫자가 이리도 잔인할 수 있는걸까. 멍하니 그 숫자를 바라보다 내 나이를 헤아려보니 올해로 29살, 아버지는 자식이 30대가 되는 것도 보지 못한 채 떠나셨다. 아빠와 내가 함께한 시간은 30년이 채 되지 않는다. 더 이상 아버지는 나이 들지 않고 남겨진 자식들만 나이를 먹을 것이다. 언젠가는 자식들이 아버지 나이를 넘는 날도 올 것이다. 아버지는 영원히 53세의 모습으로 우리 마음 속에 계실거란 사실에 가슴이 미어지다 못해 바스라졌다. 춥고 시린 새벽이 지나간 흔적도 없이 밝아온 날은 햇살이 따뜻했다. 추위를 많이 타시는 우리 아버지. 아빠 가시는 길이 춥지 않을 것 같아 다행이었다.





  빠의 고향에 있는 장례식장으로 가는 길 창 밖으로 보이는 날이 참 좋았다. 어찌나 좋은지 세상이 반짝거리는 듯 했다. 하루만, 아니 반나절만 더 계셨으면 그렇게 추운 아침에 임종을 맞이하지 않으셨을텐데 우리 아버지는 성격도 참 급하시다. 안쓰러움과 안타까움이 마음대로 뒤엉켜 온 머릿 속을 헤집고 다녔다. 정말 갑작스럽고 예상 하지 못했던 일이라 남겨진 우리는 준비된 게 없었다. 장례식장에서 절차와 요금, 옵션에 대해 설명을 해줬지만 아무것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당연히 영정사진도 없었다. 갑자기 남편의 영정사진을 선택해야하는 엄마의 심정은 오죽했을까. 엄마는 아버지가 가장 기뻐하신 날, 막내의 졸업식 때 찍은 사진을 아버지 영정사진으로 뽑았다. 그 사진을 영정사진으로 쓰리라는 상상이나 해봤을까. 어처구니 없는 일이다. 상복을 입은 엄마와 동생들을 보고서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왜 그런 옷을 입고 있냐며 계속 거부했다. 이모들은 입어야 한다고 나를 달랬다. 결국 입을 수 밖에 없는 걸 알면서도 떼를 쓰고 싶었다.


  1층 엘리베이터 앞에서 장례식장 위치가 안내된 모니터를 보았다. 고인의 사진과 나이, 가족사항, 장례식장 호실 위치가 안내되고 있었다. 아버지 얼굴 위에는 어떤 할머니가 계셨는데 연세가 100세셨다. 그 절반에 겨우 미치는 아버지의 나이를 보고서 또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할머니의 가족사항에는 자식들과 며느리, 사위에 손주까지 빼곡히 적혀 있는데 우리 아버지의 가족사항은 너무도 조촐했다. 이제 채워나갈 일만 남아있었는데 뭐가 그리 급하셨는지. 아버지가 손주를 기다린걸 알면서도 나는 내 계획과 두려움으로 그 기대를 애써 무시했다. 그게 이렇게나 큰 불효로 평생 가슴에 두고 후회할 줄 알았다면 달라졌을까. 자식은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나만 생각했다. 시골 마당의 잔디 위에서 손주들과 축구할 거라 하셨고, 우리 어릴 적 읽던 책도 손주들 읽어줄거라며 모아두셨다. 그때 되면 더 재밌는 책이 나올거니까 버리라는 자식들 말에도 아버지는 고집을 피우셨다. 갑자기 사라진 아버지의 빈자리만큼 공허하게 느껴지는 가족사항을 보며 계속 눈물이 났다.


  나만 슬픈게 아니었다. 낯이 익은 사람들부터 처음 뵙는 분들까지 아버지를 애도하기 위해 와주셨다. 아버지 친구들인 중년의 아저씨가 아이처럼 엉엉 우는 모습을 보며 아빠가 많은 사람들의 가슴 속에 살아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어 감사했다. 아저씨들이 아버지에 대해 얘기해주셨는데 그게 어찌나 재밌던지. 왜 진즉 아빠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의문이 들 만큼 아버지의 이야기는 흥미로웠다. 우리는 '아버지'의 위치에 있는 아빠만 봤으니까 당연히 알 수 없었던 모습들을 들으며 나는 한 남자를 보았다. 나보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가 되었던 남자. 책임감에 자존심도 구기고 하고픈 일도 참았던 남자. 서툴어서 가족에게 표현하는 법을 몰랐던 남자. 그러면서도 친구들에게 가족 얘기만 한 남자. 그게 우리 아버지였다. 자신의 분야에서 전문가의 경지에 있었고, 그 경지를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일에 대한 프라이드와 열정을 가진 아버지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아빠가 이렇게나 멋진 사람인 것을 왜 알려고 하지 않았을까. 왜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아빠 주위 사람들이 다 아는데 왜 나는 몰랐을까. 궁금한게 너무도 많은데 대답해줄 아버지는 지금 어디 계신걸까. 평소에 전화하면 늘 내 얘기만 했던 것 같다. 나는 왜 아버지께 묻지 않았을까. 요즘 일은 어떠시냐, 가장 친한 친구분은 누구시냐, 회사 생활에 어려운건 없으신지, 아버지는 또 어떤 도전을 하고 계시는지. 술에 취하면 자식들에게 전화하시던 아버지는 어쩌면 들어줄 사람이 필요했던게 아니었을까. 그 마음도 모르고 밤늦은 전화를 받지 못하거나 귀찮아했다. 술 취한 아버지 목소리가 그리울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지나고서야 후회하는 자식의 어리석음은 너무도 크다.





  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며 물건을 하나하나 들여다 보았다. 아빠가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가방, 출장갈 때 메는 백팩 속 짐, 핸드폰 사진첩 속엔 어떤게 있는지, 메모장에는 뭘 쓰고 계셨는지 등등. 예전에는 그 안에 무엇이 들었나 알려한 적 없는 모든게 다 궁금했다. 작은 흔적이라도 찾고 좇으려는 모습이 또 죄스러웠다. 담배를 피우고 싶은데 못 피우는 상황에 무는 곰방대와 어디에 썼는지 알 수 없는 줄자, 내성발톱으로 때문에 갖고 다니던 손톱깎이, 늘 메모하던 습관을 보여주는 볼펜, 깔끔한 성격이 드러나는 양치 도구와 머리빗까지. 하나하나 애가 닳아서 하염없이 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아빠의 지갑 속에는 우리 삼남매의 증명사진이 빼곡히 들어있었고, 아빠의 백팩에는 내가 작년 겨울에 써준 편지가 들어있었다. 꼬깃꼬깃한 것으로 보아 몇번이나 꺼내 읽으신 것 같다. 나는 그 마음을 얼마나 헤아린 딸이었을까. 아빠한테 편지 쓰는 일이 이토록 어려운 일이 될 줄 알았다면 더 많이 표현할 것을. 얼마나 후회했는지, 앞으로 얼마나 후회할 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아마 자식으로서 평생을 후회하며 살지 않을까. 하지만 그 후회마저도 소중해서 간직하고 싶다면 이기적인 걸까.


  아버지의 유품 중 가장 먼저 술잔이 떠올랐다. 그리고 지난 추석 때 아버지께 '짠'해주지 못한 일이 자꾸 마음에 남아 괴로웠다. 금주하기로 한 기간이라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딸이 짠을 안해주니 아버지는 퍽 서운하셨나보다. "나~쁜 년~" 하시며 익살스런 표정으로 아쉬워하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자식들 중 유독 아버지를 많이 닮은 딸. 술을 좋아하는 것까지 쏙 빼닮아서 아버지는 딸이 오는 날을 기다렸을 것이다. 나도 아버지와 짠하는 것을 좋아했다. 술꾼끼리 죽이 맞았던 거다. 한 날은 아버지가 집에 있는 양주를 하나 하나 개봉하며 나와 술을 마신 적이 있다. 양주잔 하나에 한 잔씩 따라서 아빠와 나눠마셨는데 그게 참 재밌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 양주는 어떻고 저 양주는 어떻고 설명해주셨는데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잠드신 엄마 몰래 양주잔 하나로 아버지와 술을 나눠마시는게 참 깜찍하다 싶었다. 부녀가 죽이 잘 맞았으니 엄마는 속상하셨겠지만 나는 그 기억들이 소중하다. 아버지 유품으로 술잔을 챙기면서 아빠와 다시는 짠할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 속상했다. 속상해도 더이상 짠해줄 아버지가 없다.




  이제 아버지는 바람이 되셨다. 남겨진 가족들이 아버지가 바람이 되기를 빌었기 때문이다. 자유로이 날다가 쉬고 싶을 때 쉬고, 놀고 싶을 때 노는 바람. 해야할 일도, 책임져야 할 것도, 근심 걱정도 없는 바람.  더 이상 괴롭거나 슬프거나 아프지 않을 바람.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사위, 누군가의 오빠, 누군가의 친구가 아닌 '나'로만 존재해도 되는 자유로운 바람으로. 그렇게 아버지가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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