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내 괴롭힘 속에서 신고하고 싶었지만 용기가 없었던 나를 위로한 시간
퇴사한지 4년이 지났다.
그 사이에 나는 아이를 낳았고, 핸드폰을 두 번이나 바꿨다.
요즘은 폰을 바꾸면 전 핸드폰의 데이터를 그대로 옮길 수 있는데 핸드폰이 아주 박살이 나서 옮길 수 없게 되었다.
노트북을 통해 옮기는 과정이 있었는데 그 덕에 갖고 있던 데이터를 샅샅이 뒤져보는 시간이 있었다.
내게 의미 없는 날짜와 모르는 핸드폰 번호.
고민하다가 틀어보았다.
재생한지 10초도 되지 않아서, 누군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그 목소리로부터 강렬한 분노를 느꼈다.
그 분노에 당황한 내 목소리가 중간 중간 들렸다.
나는 '왜 그러시나요?'라는 말조차 내뱉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분노에 가득찬 상대의 한숨 소리에 파뭍혀 고작 '왜요?'라는 말도 못 내뱉고 있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무언가 퍼뜩 떠올랐다.
전 직장에서 나를 참 많이 괴롭혔던 그 사람.
본인의 상사에게 아주 잘하고 부하직원이 그렇게 해주길 바라던 사람.
집단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직원을 교묘하게 따돌리던 사람.
사람 좋은 척하는 미소 뒤에서 온갖 평가로 부하직원을 괴롭히던 사람.
상황을 들어보니 내가 그 사람의 행동에 불편함을 표현했고, 그게 사내 직원들 사이에 돌고 돌아 그 사람의 귀에 들어가 나한테 따지는 것 같았다.
이 사람은 미안하다는 말의 의미를 알고는 있는걸까?
그는 참고 있다고 말했지만 전혀 참고 있지 않았다.
너같은 부하직원이 감히 상사를 비난할 수 있냐는 분노.
참고 있는 척하면서 상대를 찍어 누르는 오만함.
어른인 척 하지만 분해 죽겠는 것을 숨길 수 없는 위선.
텍스트가 아닌 것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 많았다.
그의 목소리와 말투는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지금 와서 그 때 사건의 잘잘못은 중요하지 않다.
그가 본인의 지위를 이용해 나에게 위협을 가했다는 것.
아무것도 모르는 부하 직원에게 본인의 부정적인 감정을 쏟아냈다는 것.
팩트는 직장 내에서 상사가 부하 직원에게 고통을 주었다는 것이다.
너무 슬펐던 것은...
그의 전화에 당황해서 단 한마디도 하지 못하던, 고작 28살이었던, 매우 떨리던.
두려움과 당황함이 버무려진 나의 목소리였다.
아마 그 때 그의 대우가 너무 부당하여 신고하려고 녹음해놓은 녹음본이 남아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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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사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서도 그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내자마자 심장이 벌렁거렸다.
아니, 누군지 몰랐을 때도 이미 한숨 속에 담긴 분노에 공포를 느끼며 불편했다.
한숨만으로 사람을 이렇게 불안하게 만들다니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잠시 진정하는데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 뒤에 생각을 했다.
예전에 그가 나를 따로 불러내 복도에서 혼난 적이 있다.
그 때 눈 앞이 깜깜해지고 쓰러져버릴 것 같은 공포를 느꼈던 것이 기억난다.
그 시절의 나는 우울증약을 복용하면서 직장 생활을 버티고 있었다.
다들 이러고 산다면서, 이만큼 힘들고 괴로운 건 모두가 이겨내는 거라면서.
이걸 못 이겨내는 내가 '사회 부적응자'라면서 채찍질했다.
나조차 내 편이 아니었던 시절이 있었다.
참 안쓰러웠다.
지금의 나라면 어땠을까.
부모가 되어 누군가를 진심으로 사랑해보니 알겠더라.
그 시절의 내가 얼마나 안쓰럽고 불쌍했는지를.
나조차 나를 사랑해주지 않았던 것이 얼마나 가혹했는지를.
학창 시절 학교 안이 전부였던 것 처럼, 그 시절의 나는 그 직장이 전부인 줄 알았다.
퇴사해도 되는데.
그냥 나오면 되는건데.
무분별한 언어적 폭력과 상황적 폭력 속에서 불편하다고 말해도 되는데.
그곳을 나온다고 내 삶이 무너져버리는 게 아닌데.
아무도 내 편이 아닌 줄 알아서 그렇게 버티고 버티가가 스스로를 갉아 먹었다.
참 예쁘고 즐거울 나이, 행복함을 더 많이 느껴도 될 20대 때에.
안타깝고 미안했다.
요즘은 나 스스로가 괜찮은 사람이라 믿게 되었고, 조금 더 어른스러운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시간들을 보내고 있다.
조금 더 단단해졌기 때문에 조금 더 당당하게 대꾸하지 않았을까?
"지금 화 내고 계신데 뭘 참고 계시다는 겁니까?"
"상황을 설명 해주시고 화를 내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부하직원에게 분노 담은 한숨으로 공격하는 질 나쁜 상사를 그냥 참아내고만 있지 않을 것 같다.
분노에 휩쓸리지 않고 침착하게 상황을 볼 것이다.
부당한 상황에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직장 생활은 내 삶의 한 부분이지 전부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나를 소진하며 버티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나 스스로에게 해줘야할 최소한의 것들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나는 '그 사람 참 별로인 어른이었지... 상대할 필요가 없었어.'라고 말할 수 있다.
상대하기를 피하고 나를 지키는 법도 안다.
여차하면 법적인 도움을 받을수도 있다.
그곳을 벗어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나는 이미 떠났고, 이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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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솔직하게 소망한다.
그가 그때처럼 별로인 사람이기를.
본인의 잘못을 상대에게 빌지 않고 신에게 용서를 구하는 비겁자이기를.
당신의 아이에게 장애가 있는 것이 우연이라 믿기를.
아주 오랫동안 그 집단에 속해있기를.
영원히 그 지옥 속에서 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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