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가

18. 나는 여전히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by Hyunseok YOON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위한 18개의 노트

1부 - 경계에 머무는 사람

1.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가
2. 확신이 없는 사람의 세계
3. 나는 왜 자꾸 사라지려 하는가
4.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 사이에서
5. 내가 만든 것이 나를 만든다
6. 흔적은 때로 말보다 무겁다

Interlude - 머물렀던 자리로부터

2부 - 조용한 무게들

7. 결핍이라는 출발선
8.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해
9.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10. 응시와 침묵 사이의 나
11. 존재는 때로 아주 작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12. 무응답이라는 대화

Interlude - 조용한 무게들을 향해

3부 - 나를 지나가는 감정들

13. 나는 나를 의심한다
14. 사라지지 않기 위한 방식
15. 무언가를 만들지 않아도 괜찮은 날
16. 조각난 하루들을 꿰매는 일
17. 감정은 늘 조금 늦게 도착한다
18. 나는 여전히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18. 나는 여전히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예술 학교를 졸업하고 당신은 무엇을 할껀가요? 예술가가 될껀가요?”


이 질문 앞에서 나는 늘 망설였다. 무언가를 계속해서 만들고, 누군가에게 닿을지도 모르는 방식으로 세상에 내보내고, 누군가의 마음을 건드릴 수도 있는 일을 하고 있지만, 나는 끝끝내 스스로를 ‘예술가’라고 부르지 못하겠다. 아니, 어쩌면 애써 그렇게 부르지 않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내 생각에 ‘예술가’라는 단어는 너무 커서, 나는 그 안에 갇히고 싶지 않았다. 그 단어 안에 담긴 무게, 기대, 시선, 태도, 정체성 같은 것들이 어쩌면 나를 자꾸만 어떤 사람으로, 어떤 사람처럼 만들려 한다고 느꼈다. 세상을 변화시킬 만한 대단한 말을 해야 할 것 같고, 사람들의 기대감에 충족할 만한 무언가를 만들어야만 할 것 같고, 심지어 무언가를, 누군가를 ‘대변’해야만 하는 사람처럼… 현실의 고통을 이야기할 것, 사회적 메시지를 담을 것, 침묵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줄 것, 무언가를 상징하고, 입장을 분명히 하고, 시대를 반영해야 할 것처럼… 사진 하나, 영상 하나, 말 한 줄마다 어떤 정당성이나 의미가 증명되기를 바라는 듯한 시선들…









한 번은 어떤 작업을 발표한 뒤, 누군가 내게 이렇게 물었다. “그래서 이건 어떤 메시지인가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냥, 느낀 것을 만든 것뿐이었는데… 무엇을 ‘전달하려 했다’고 말하는 순간, 그 감정이 왜곡될 것 같았다. 때로는 그런 시선이 나를 ‘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말을 꺼내기 전에, 이게 충분히 가치 있는지, 충분히 중요한지 스스로 검열하게 만들었고, 그러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뒤로 물러선 적도 많았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대변하고 싶지 않았다. 다만, 내 앞에 놓인 작고 불완전한 감정들을, 흘러가 버릴 수도 있었던 조각들을, 그대로 들여다보고 싶었을 뿐이다.









어디선가 그런 말을 자주 들었다. 예술은 세상을 바꿔야 한다고, 시대를 반영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자꾸만 되묻게 되었다. 정말 그래야만 하는 걸까... 세상을 바꾸지 않아도 괜찮은 예술, 그저 누군가의 마음에 작은 쉼을 남기는 일, 혹은 아주 조용히 곁에 머물다 가는 일은 예술이 될 수 없는 걸까... 세상을 향한 말이 아니어도, 단지 자기 자신에게 묻는 말이어도, 그것이 누군가에게 도달할 수 있다면 그건 충분한 일이 아닐까...









나는 자주 멈췄고, 자주 흔들렸다. 어떤 날은 온종일 쏟아지는 감정의 파편을 붙잡지 못한 채, 책상 앞에 앉아 멍하니 바깥 풍경만 바라봤고, 어떤 날은 ‘도대체 왜 만드는 걸까’ 하는 질문 속에서 몇 시간을 맴돌다 하루를 흘려보냈다. 내가 만든 것을 스스로 의심하거나, 아무 의미도 없을까 봐 두려워했던 날도 있었고, 가끔은 ‘말하지 않는 용기’를 믿으며 침묵 속에 머무르기도 했다. 감정이 너무 늦게 도착해 헤매기도 했고, 조각난 하루를 꿰매듯 이어 붙이며 하루를 버틴 적도 있었다. 무언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아닌, ‘지금 이 마음을 지나칠 수 없어서’ 마주 앉은 순간들이 더 많았다.









어떤 날은 몇 초짜리 장면 하나에 며칠씩 매달리기도 했다. 한 문장을 어떻게 시작할지 몰라 여러 날을 고심하고,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을 끝내 화면으로 꺼내지 못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기도 했다. 가끔은 아이를 재우고 남은 아주 짧은 밤의 틈에서, 내가 누구인지조차 모호한 채 그저 조용히 무언가를 바라보다가, 아주 조용히 마음의 조각 하나를 꺼내놓기도 했다. 그 모든 순간들 속에서 나는 조금씩 알게 되었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라, 그저 ‘예술을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그 말이 훨씬 나를 편하게 했다. ‘예술가’라는 이름보다, 훨씬 덜 무겁고, 훨씬 더 진실하게 느껴졌으니까...









이 연재를 시작하며,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왜 이렇게 살아가는지, 왜 끝까지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하는지를 차근차근 들여다보고 싶었다. 어떤 날은 감정의 가장자리에서, 어떤 날은 기억의 가장 깊은 곳에서 말을 꺼내야 했다. 그 과정은 생각보다 길었고, 생각보다 더 솔직했다. 글을 쓰며 나는 계속해서 되묻고, 또 되물었다. ‘나는 왜 이 일을 계속하는가?’, ’내가 만드는 것들은 결국 무엇을 남기는가?’, ’나는 예술을 통해 무엇을 응시하고 싶은가?’, ’내가 만든 이 조각들은 정말 누군가에게 닿을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이 모든 것의 끝에서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 질문들은 지금도 여전히 답을 기다리고 있고, 아마 앞으로도 계속 열려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나는 오늘도 여전히 애쓴다. 예술가가 되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솔직해지기 위해. 누군가의 시선이 아닌, 내가 나에게 묻는 질문 앞에서, 계속해서 흔들리고 멈추고 다시 쓰기 위해… 나는 여전히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쓴다. 그 애씀이야말로, 내가 예술을 계속할 수 있는 방식이니까...









나는 누군가를 감동시키기 위해 글을 쓰지 않는다. 누군가의 시선을 얻기 위해 영상을 만들지도 않는다. 그런 욕망은 애초에 내 안에 없었다기보다는, 그것들 앞에서 스스로를 자꾸 작아지게 만들었던 것 같다. 오히려 나는, 사라져버릴지 모르는 어떤 마음들을 잊지 않기 위해 쓴다. 곁을 스쳐 지나가다 금세 희미해질 감정들을 붙잡아두기 위해 찍는다.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를 수도 있었던 문장, 그날이 지나면 다시는 떠오르지 않을지도 모를 장면… 그 흐릿한 조각들을 붙잡는 일은, 어쩌면 세상을 향한 말이 아니라, 내 안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한 몸짓에 더 가까웠다. 그리고 나는, 그렇게 만들어진 그 무엇 속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을, 어디선가 누군가가 아주 조용히, 알아채 주기를 바랄 뿐이다. 찬란하지 않아도 좋고, 눈에 띄지 않아도 괜찮다. 다만, 잊히지 않았으면 한다. 내가 살았던 이 시간들, 내 마음을 지나간 이 감정들이, 누군가의 마음에도 아주 작게, 한 번쯤은 닿을 수 있기를…









어쩌면 나는 끝까지 ‘예술가’가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만들 것이다. 쓰고, 지우고, 다시 꺼내 보고, 주저하다가도 조용히 다시 시작할 것이다. 무언가를 만들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마음, 말이 되기 전의 감정들을 붙잡고 싶은 마음, 그 마음이 나를 다시 이 자리로 데려올 것이다. 나는 그렇게,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존재할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그렇게 살아간다. 그것이면 충분하다. 이 글을 마지막으로, 당신과 나의 조용한 대화는 잠시 멈춘다. 하지만 언젠가 또, 어딘가에서 이 감정을 도저히 외면할 수 없어 다시 무언가를 만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날까지, 나는 이 마음을 품고 조용히 다시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