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해
말해지지 않은 것들을 위한 18개의 노트
1부 - 경계에 머무는 사람
1. 예술가가 되지 않으려 애쓰는 예술가
2. 확신이 없는 사람의 세계
3. 나는 왜 자꾸 사라지려 하는가
4.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 사이에서
5. 내가 만든 것이 나를 만든다
6. 흔적은 때로 말보다 무겁다
Interlude - 머물렀던 자리로부터
2부 - 조용한 무게들
7. 결핍이라는 출발선
8.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해
9.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에 대해서
10. 응시와 침묵 사이의 나
11. 존재는 때로 아주 작고 조용하게 지나간다
12. 무응답이라는 대화
Interlude - 조용한 무게들을 향해
8. 말보다 오래 남는 것들에 대해
나는 말보다 다른 것들을 더 오래 기억한다. 그 말이 오가기 전후의 분위기, 상대의 표정, 방 안을 감싸던 공기의 결, 그날 스친 향기, 손끝에 닿은 감촉, 창문 너머로 들어오던 빛의 각도 같은 것들.
그런 감각들은 말보다 더 천천히, 더 깊게 남는다.
말은 지나간다. 때로는 너무 쉽게 잊히고, 때로는 다 닿기도 전에 어긋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의 시선, 스치듯 멈춘 동작,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던 그 순간의 향기 같은 것들은 더 오래, 더 깊이 남는다.
나는 종종 그런 순간들 앞에서 멈춘다. 무언가 말해지지 않은 감정들이 공기처럼 가만히 떠 있는 장면. 그 침묵이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작업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말을 줄이고, 이미지나 장면의 흐름으로 감정을 전하려 한다. 때로는 아무 말 없이, 빛과 그림자, 정적과 느린 움직임, 그리고 장면과 장면 사이에 남겨진 여백만으로 감정을 말하고 싶어진다.
누군가는 그것을 불친절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 여백과 정적이야말로 가장 정직한 표현일 때가 많았다.
설명하려는 순간 사라지는 감정이 있고, 붙잡으려 할수록 멀어지는 진심이 있다.
그래서 나는 가끔, 그 감정을 말로 붙잡으려 하지 않고 그저 바라본다. 조용히 곁에 두고, 오래 머문다. 그렇게 남겨진 감정들은 흔적처럼, 잔향처럼, 지워지지 않은 조각들처럼 말보다 오래 나를 흔든다.
나는 그런 것들에 대해 말하고 싶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감정들, 천천히 스며드는 장면들, 그 조용한 순간들이 나를 어떻게 조금씩 바꿔놓았는지를.
그리고 이제는 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그 순간이 어쩌면 가장 많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