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리언반스_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주의※
본 독후감에는 책의 스포일러가 있으니 완독 후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슬프게도 토니의 예감은 대부분이 틀렸다.
[진실을 찾는 행위]
"너 나 싫어해? 이유가 뭔데?"
학창 시절, 누군가가 나에게 "OO가 너 싫어하는 거 같은데?" 라고 말한다면 그 당사자에게 가서 내가 물어봤던 질문이다.
지금과 별반 차이 없이 그때도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닌지라 주변에 적이 많아서 저런 질문을 꽤나 자주 하고 다녔다.(이런 질문으로 인한 원인인지 결과인지는 모르지만)
알다시피 나를 싫어하는 사람에게 저런 질문을 하면 대부분의 관계는 끝장이 난다. 그럼에도 나는 내버려 두면 자연스레 아물 상처도 다시 뜯어보고 헤쳐봐서 파편이 박히지는 않았는지 고름이 맺히지는 않았는지 만신창이로 만든 다음 그 위에 대충 연고를 발라놓고 무책임하게 돌아섰다. 이런 식의 행위를 가족들과의 케케묵은 감정에, 상처받은 연인에게, 돌아서는 친구에게 저지르며 다녔다.
그런 나도 지금은 기억이 흐릿한 일련의 사건들과 세월의 풍파를 맞으며 더 이상 진실을 탐구하는 행위는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이젠 오해를 사도 구태여 해명하려 들지 않고, 알 수 없는 짓을 저지른 인간에게 이유가 뭐냐고 추궁하는 것도 그만뒀다. 어렸을 때야 해명을 하거나 들으면 곧이곧대로 진심만을 얘기했으니 진실을 찾는 게 쉬었으나, 나와 같이 한 살 두 살 먹어가는 사이에서는 직접 해명을 한다고 해도 그게 진실일지는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결과와 같은 객관적 사실만 보고 그 이면이나 뒷배경에 대해서는 내 멋대로 상상하면서 결론짓는 아주 편한 방법을 선택해서 살아가고 있다.(마치 잭과 같은 모토 p.139)
진실을 탐구하는 게 인간의 본성이라서 그런지, 혹은 무료한 노년기를 달래려는 심상인지, 기어코 진실을 추적하는 토니는 내 입장에서는 이기적이기 그지없다.
40년도 훌쩍 지나 종결된 사건들을 뒤늦게 알아채고, 진실을 탐구하면서 상처 입힌 사람들이 도대체 몇 사람인가? 어찌 됐건 애인을 친엄마에게 뺏기고 심지어 임신까지 시킨 후 자살한 연인을 둔 베로니카를 할퀴고, 아이를 두고 기나긴 세월을 함께한 전 부인에게 철없는 시절 고작 1년 교제한 여자에 대해 집착을 표하여 마거릿을 걷어차고, 가뜩이나 성치 못한 몸으로 힘들게 살아가고 있는 에이드리언의 아들 앞에 알짱거리며 불쾌감을 줌으로서 펀치를 날리는 토니지만, "그런 건 상관없다! 난 궁금한 건 못 참아!". 토니가 이 모든 것을 몰랐으니 전개된 상황이었겠지만은, 완결된 소설 후의 스토리를 상상해 보자면, 진실에 닿기 위해 본인이 했던 행적들에 대해 후회하고 죽을 때까지 토니 영감은 본인 인생에 존재했던 풀지 못한 미스터리들을 기억 저편으로 보내고 그 공백을 쉽고 아름다운 생각들로 채우며 살아갔다 - 정도로 이어지진 않을지.
[결국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
단시간에 2회독을 했다.
1회독과 달리 2회독에서는 토니의 기억이나 짐작을 배제하고, 객관적인 사건(실제로 적힌 편지의 내용이나 현시점 인물들의 대화, 제스처 등)을 기반으로 인물들의 행동 근거지에 대해 내 스스로 단서를 찾아가며 읽었다. (2회독째에서는 더 이상 토니를 믿지 않았다.) 결말에 치닫게 되기 전, 사전에 작가가 설치해놓은 몇 가지 단서들을 찾았고, 흩어진 조각들을 이어붙였지만 아직도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득하다. 예를 들어, 사라는 왜 하필 토니에게 유산을 남겼고, 그 돈은 하필 오백 파운드인가? 혹은 그렇게 똑똑하다던 에이드리언은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함으로써 결국 과학반 6학년 생이었던 롭슨과 동일한 일생의 종말을 맞게 된 것일까? 책을 읽고 요리조리 해석을 해봐도 저 두 의문을 풀기에는 사건의 개연성도 떨어지고, 설명도 불충분하다. 훌륭한 책이지만, 이런 면에서는 떡밥만 던져놓은 작가가 무책임하다고까지 느껴진다 .. (혹은 내 무지함으로 인해 위 질문을 결론짓지 못한 것일지)
작가가 친절하지 않으니, 나머지는 내 상상력을 이용하는 수밖에.
결국엔 토니가 알고 있는 에이드리언도 일련의 사건들(노년의 토니가 기억하는 에이드리언. 가령, 역사 시간에 조 헌트 영감의 질문에 스마트하게 맞받아치는 것)을 통해 토니가 정의한 인간일 뿐이다.
실제로 에이드리언은 마음은 몹시도 유약하나, 주변 사람들에게 진중하고 똑똑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인물일 수 있을까? 그래서 토니 뿐만 아니라 그 친구들까지 교묘하게 속여 자신은 어떤 세태에도 크게 동요하지 않는 고고한 인물임을 잘 연기하지 않았을지. 다만 그 내면을 들여다본다면 친구의 연인을 탐내고, 그것도 모자라 연인의 어머니에까지 욕정을 품고 덜컥 생겨버린 아이로 인해 망가진 본인의 미래에 대해 절망하고 도피를 위해 선택한 자살을 감행할 정도로 사실은 매우 가볍고, 철없는 인물이 아닐지.
인간이란 결국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제멋대로 판단하고 결론을 내리는 존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