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받고 존중하기 위한 가치<최소한의 선의>

문유석_최소한의 선의

by 해찌
출처 : 교보문고


아무리 생각해도 법이랑 엮여서 좋을 건 하나도 없다.

살면서 작은 바램이 있다면, '법대로 합시다!' 라던가 '당신 고소장 받을 준비나 해' 같은 말은 들어보고 싶지 않다. 물로 그런 말을 하고 싶지도 않고.


가만 보자, 살면서 내가 법에 대해 생각했던 적이 있던가?

작년 상반기 한참 집값이 치솟고 하루가 멀게 부동산 대책을 펴 낼 시기에 이사를 준비하고 있어서 그때에는 부동산 법에 대해 꽤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적이 있다. 또, 작년 가을쯤 주행 중 앞차를 후면 충돌했던 적도 있다. 정신없는 와중에 법에 대해 아는 게 없기에, '차 한대 값 물어줄 배상금은 없으니 징역 3년 정도만 살고 나오면 될까? 아니면 5년? 제발 판사님이 관대했으면 ..' 생각했던 기억이 있다. 부끄럽게도, 이처럼 나에게 직접 닥쳐온 사건과 연관이 있지 않으면 도통 법이란 건 내가 접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존엄한 것은 대한민국도 아니고, 한민족도 아니다. 인간이다"


아는 것이 힘이다.

특히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우리 사회에서는 법을 많이 아는 자가 곧 강한 자이다. '그래, 그렇다면 대한민국 헌법 전문부터 달달 외워야겠군' 과 같은 무지한 생각이 점점 나를 법과 분리시켜 놓았다. 이에 최소한의 선의는 그 근본에 대해 말한다. 왜 우리가 법에 대해 알아야 하는지, 그 법은 어디서 왔고 어떻게 나를 한 인간으로서 존엄하게 살아가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필요성을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스스로뿐만 아니라 관계 속에서도 존엄하기 위해 법을 알아야 한다. 작가는 인간의 존엄성은 칸트의 이론에 따라 '이성에 의해 인도되는 도덕적 자율성'을 근간으로 미래 과학 기술발전에 따라 새로운 약속이 성립되어야 하고, 동물권이나 소시오패스를 예시로 들며 그 외연이 확장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먼 옛날인 18세기부터 제창되었던 아니, 더 거슬러 올라 성경 구절의 창세기 1장 27절에서 언급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과 닮기에 존엄하다는 개념이 존재했던 것처럼 존엄이란 역사에 항상 존재하던 생각이다. 하지만, 불과 80년 전 유대인들은 열등한 존재로 취급되고 마땅히 지켜져야 할 존엄성의 바운더리에서 탈락되어 끔찍한 학살을 당했고 40년 전에는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에서도 과도한 공권력 행사로 대량 사상자가 발생했다. 멀리 갈 것도 없다. 몇 달째 일어나고 있는 출근길 지하철 장애인 단체 시위는 아침마다 시민들의 원성을 사고 있으며, 존엄성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의 투쟁은 제 3자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결과를 낳기에 이제는 이들의 존엄성이 지켜져야 하는 게 맞는지에 대해 의문이 들 정도다.


존엄성 자체는 절대적인 가치라고 해도 그 외연이 유동적이라면 우리는 더욱 경각심을 가지고 경계해야 하는 가치이며, 이 수단으로 사용하기 위해 우리는 법을 잘 알아야 하고 적절한 선에서 법의 이름으로 제약을 가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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