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 세이건_악령이 출몰하는 세상
얼마 전, 친구 따라 용하다는 사주집을 갔다.
과연 역술가가 일면식도 없는 내 친구에 대해 뭐라 할지 궁금해 약간 삐딱한 시선을 가지고 따라가 봤다. 참고로 내 친구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결단력이 약한 게 특징인데, 역술가 말로는 올해는 없던 결단력이 생기니 뭐든 간에 주저하지 말라고 했고, 꼽사리 낀 나에게는 그동안의 칼 같았던 성격이 유해진다고 했다. 그 길로 친구는 오래전부터 속앓이 하던 직장에 사표를 던졌고, 평소의 나라면 실업자가 100만 명이 육박하는 이 시국에 다음 직장도 구하지 않고 퇴사를 하냐고 구박했겠지만, 사주에 쓴 돈이 아까워 저 말들을 삼키고 격려와 응원을 해주었다. 안 하던 짓을 한 친구와 안 하던 말을 한 나 사이에는 20년 동안 처음 본 서로의 모습에 민망함과 서먹함이 감돌았지만, 뭐 썩 나쁘지 않았다. 사주는 우리 모임에서도 제법 화두가 된다. 듣고 있자면 그럴싸해서 만세력에 적혀있는 8글자에 정말 우리들의 운명이 새겨져 있나 라는 생각이 든다. 또, 역술인의 말만 듣고 갑자기 결단력이 생겨버린 내 친구와 다정한 말을 내뱉은 나는 운세의 흐름에 따라 변화된 건지, 올해는 좀 더 친절해보자는 내 결심이 반영된 건지.. 뭐가 됐든, 변화는 우리가 조금은 엉뚱한 것을 믿는 것에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싶다.
모임에서 이과 책의 난이도는 점점 높아지는 것 같다. 저번 시즌 마지막 책인 이기적 유전자는 부족한 상식과 난독증으로 읽기 어려웠지만, 이번 책은 담긴 내용이 너무 많으면서 중구난방이라 맥락 잡는 게 힘들었다. 아, 그래도 내용 자체는 흥미롭다. UFO 납치나 마녀사냥에 대해 다룬다든지 영화 오펜하이머로 흥미가 생긴 맨해튼 프로젝트나 텔러에 대한 평가라던가. 모쪼록 소재들은 흥미로운데 이건 뭐 그냥 저자의 의식의 흐름이다. 책의 초반은 미신이나 유사과학의 경계에 대해 말하다가 중간에는 본인이 존경하는 과학자의 이름을 나열하고 양자역학 같은 과학 이론에 대해 설명한다. 그 후에는 다시 유사과학으로 돌아왔다가 텔레비전에 과학이 더 많이 나오게 하는 방법에 대해 본인 나름대로 아이디어도 짜본다 (근데 아이디어가 모두 노잼이라 어차피 시청률 안 나왔을 듯). 그리곤 토머스 제퍼슨을 찬양하며 책은 끝난다.
코스모스를 읽을 때만 해도 저자의 문체가 감성적이고 따뜻하다 느꼈는데 이번 책은 어쩐지 날카롭다(번역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요..).1980년 발간한 코스모스에서는 분명 ‘외계 생물을 끊임없이 찾고, 찾게 되면 소통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라고 저술했는데 이 책에서는 UFO 주장하는 이들을 정신병자 취급하는 부분이 그렇다. 물론 코스모스에서 주장한 이 내용이 UFO 납치 같은 말도 안 되는 걸 옹호한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이 정신병자들에 대한 비난의 수위 조절에 꽤나 애쓴 티가 난다.
읽고 나니 느낀 건, 칼 세이건의 과학 사랑은 정말 대단하다는 점이다. 그에게 과학은 전지전능한 신이자, 케플러나 다윈의 이론은 바이블 같은 것이고, 상온 핵융합 같은 유사과학은 그에게 이단이며, 우리 같이 우매한 대중은 선교해야 할 대상인 듯하다. 일평생 과학의 대중화에 힘쓴 저자는 꽤나 아쉬운 소리를 이 유작에 담았는데, 그렇다면 이 목표는 현재 어떤 실정일까? 저자 사망 11년 후, 미국 CBS에서 방영한 시트콤은 칼텍의 천재 과학자 4명이 등장해 초끈이론이나 힉스입자 같은 이론을 대중들에게 익숙한 단어로 만들었다.(오히려 너드의 이미지를 강화한 부작용은 있지만) 또, 2014년 메가 히트를 친 이 영화는 UFO에 탑승해 외계인을 때려잡는 내용이 아니라 일반 상대성 이론을 바탕으로 한 SF 영화였고, 그다음 해에 개봉한 영화는 과학 이론을 통해 화성에서 생존한 남자의 이야기를 그려 흥행했다. 그리고 그 이전에 대한민국에서는 전 국민을 과학자로 만든 KBS 스펀지가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어렵게만 느껴졌던 과학 이론들은 점점 흥미로운 주제로 탈바꿈해 대중매체를 통해 스며들고 있다. 과학은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의 대중화에 힘쓰고 있고,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은 이게 또 돈이 되니 대중을 대상으로 여기저기서 열심히 팔아먹고 있다. 머지않아 저자가 염원한 대로 모두가 오류를 볼 수 있는 눈과 그 오류를 바로 잡을 수 있는 과학적 사고를 갖출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