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나다 도요시_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보름간의 여행을 마치고 오늘 로마에서 인천행 비행기를 타고 왔다. 이런! 이륙 직전, 10시간의 지루함을 달랠만한 컨텐츠를 미리 다운 받아 놓지 않은 나는 부랴부랴 222분의 러닝타임 ‘벤허’를 가까스로 저장하고 출발했다. 222분, 무려 3시간 42분이다. 한 번의 일시 정지 없이 풀타임 러닝을 끝 맞췄다. 물론 작품이 재밌기도 했지만, 만약 내가 와이파이가 빵빵한 우리 집이었다면 이렇게 재밌게 볼 수 있었을까?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취미였다. 어릴 땐 오빠가 비디오로 빌려다줘서 시청했고, 어느 정도 크고 나서는 쉽게 구할 수 없는 작품이나 청불 작품은 토렌트 같은 사이트를 통해 다운로드 받기도 했다. 그때는 OTT나 IPTV 같이 쉽게 컨텐츠를 접할 수 없기 때문에 TV의 영화채널이나 불법 다운로드 사이트에서 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내가 보고 싶다고 방송국에서 틀어줄 일은 없고, 불법 사이트에서 다운로드 하려면 기본 5시간 이상은 잡아야 했다. 그것도 바이러스로 컴퓨터 하나는 날려먹을 각오를 하고 다운로드 해도 중간에 에러가 나서 다운이 안 되어 있거나 제목에 낚여서 다른 컨텐츠가 받아져 있는 일도 다반사였다. 그렇게 찾아본 영화 한 편이 소중했기에 애초에 빨리 감기라던가 끊어본다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본 작품들이 아직까지도 내 인생에 손꼽히는 명작들이고 나에게 많은 영향을 준 작품들이다.
오늘 본 벤허는 최근 몇 년 동안 끊고 보지 않은 유일한 영화였다. 단지 재밌어서 일까? 오늘 본 벤허는 네 번째 보는 것이고, 재미보다는 내가 아는 영화 중 가장 긴 러닝타임을 가진 영화 중 하나라 택했었다. 요즘은 안 끊고 보는 게 참 힘들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인지, 혹은 시간이 없어서 인지. 확실히 시간이 없어서는 아닐 것이다. 저렇게 열심히 찾아보던 학창 시절에는 더 바빴으니, 아마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컨텐츠들과 쉽게 접할 수 있는 만큼 가치가 낮다고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책에서 언급한 대로 요즘 개봉하는 영화들은 여운이 잘 남지 않는다. 저번달 트바 모임 영화였던 ‘톡투미’가 그렇다. 좋게 말하면 기승전결이 너무 탄탄하고 스토리 진행이 매끄러워서, 또 대사가 친절하기에 시청자들로 하여금 생각할 틈을 주지 않는다. 영화가 끝나면 재밌고 깔끔하다.
예전에는 좋은 작품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컨텐츠도 MZ스럽게 나와서 별로다. 라는 말을 하려는게 아니다 오히려 머리 시킬 수 있는 빠른 전개의 킬링타임용 컨텐츠는 대환영이다. 시대의 흐름에 맞춰서 컨텐츠를 만들고 소비하는 게 뭐가 나쁘겠는가, 컨텐츠 자체가 유행의 흐름인데. 뭐 이런 걸로 책을 쓰나 싶었으나, 읽다 보니 컨텐츠 소비 형태의 흐름을 되짚어 볼 수 있는 기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