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 1440, 86,400, 이 숫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네. 하루입니다.
하루는 24시간이고, 1440분이고, 86,400초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전부입니다.
어느 누구도 이 숫자를 늘리거나 줄이지 못합니다.
물론 시간의 존재를 상대성 원리나 평행우주 이론에서 보면 절대적이지도, 순차적이지도 않겠죠.
하지만 지구상에 사는 평범한 인간으로서, 뜨는 해와 지는 해는 우리 하루의 기준이 됩니다.
어릴 때는 하루가 내일로 그리고 몇십 년 후로 연결되는 그저 무한한 점들 중 하나였습니다.
좀 더 커서 학교 다닐 때 하루는 빨리 가기를 바라거나 아주 늦게 가기를 바라는 소망의 대상이었습니다.
내일의 축제를 기다릴 때는 오늘이 빨리 가기를, 시험이 다가오면 하루가 아주 천천히 가기를 바랐습니다.
더 나이가 들면서 하루는 이제 나를 가혹할 정도로 뒤로하고 달려나갑니다.
따라가려 해도, 잡으려 해도 잡혀주지 않은 참 무심한 녀석입니다.
이 세상 살아 있는 자들에게 하루는 똑같이 주어지지만, 그 가치는 달리 다가갑니다.
무한정한 내일이 올 것 같지만, 어느 결정적인 순간이 오고 나면 그 가치는 절대적입니다.
멀쩡하던 사람이 시한부 인생의 선고를 받는 순간, 그에게는 하루의 개수가 정해집니다.
이제 무한한 하루라서 하루쯤은 낭비해도 되는 그런 하루가 아니게 됩니다.
프랑스 혁명 때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 마리 앙트아네트는 탕플탑 감옥에 갇힙니다.
혁명세력은 기요틴이라는 사형대를 만들어 반혁명 세력을 처단해 나갑니다.
드디어 단두대에 올라선 마리 앙트아네트의 모습은 주변에 몰려든 파리 사람들을 경악게 했습니다.
그녀의 상징인 금발이 백발로 변해버린 것입니다.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자 하루하루 쌓여온 죽음의 스트레스가 그렇게 만든 것이죠.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른다는 절망과 불안감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죠.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인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에서 사형장에 섭니다.
이제 사형집행 소총수들이 정렬을 하고 그의 가슴에 아주 크게 표시해 놓은 헝겊을 조준하고 있습니다.
그는 죽음이 곧 닥칠 그 짧은 시간을 나누어 과거를 정리하고 현재를 받아들이는 죽음의 의식을 치릅니다.
소총수들의 조준 소리를 들으면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려 할 때, 저 멀리서 황제의 전령이 도착합니다.
사형집행이 철회되었습니다.
그는 후에 삶이 그 짧은 시간에 얼마나 응축될 수 있는지를 글로 남겼습니다.
이들에게 결과는 달랐지만 그날이 마지막 하루였습니다.
우리도 어느 순간 저런 극적인 결말은 아닐지라도 결정적인 순간이 올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어릴 때, 젊었을 때는 모르고 살았지만, 나이 들면서 ‘하루를 산다는 것’의 의미는 생사의 질문입니다.
내일이 어떻게 될지를 신만이 안다면 우리는 그저 주어진 오늘을 잘 살아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이 늘 헛갈립니다.
어떻게 사는 것이 오늘을 잘 사는 것인지.
늘 거의 같은 하루를 보내고, 늘 거의 같은 사람들은 만나면서, 지지고 볶다 하루가 훌쩍 갑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하루가 흘러갑니다.
무슨 새로운 모험을 시도하려 해도 지금까지 해온 것이 정답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일과가 허튼짓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하루가 그냥 흘러갑니다.
이런 기계적인 하루의 흐름 속에서 ‘나’를 찾아 ‘나’로서 사는 것이 위대한 선지자들의 가르침입니다.
그것이 잘살다 잘 마감하는 최선의 알고리듬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혼자일 때는 잘 되다가도, 섞이고 복작거리다 보면 그 알고리듬에 오류가 생깁니다.
그래서 좀 더 구체적인 디버그의 매뉴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어릴 때 국어 시간에 배웠던 육하원칙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적 순서를 무작정 따라가지 말고 하루를 이러한 질문들로 시작해 보는 겁니다.
‘왜? 나는 오늘 새롭게 부팅된 것일까?’ ‘ 왜? 나는 오늘 존재하는가?’
‘무엇을? 나는 오늘 해야 하지?’ ‘무엇이 오늘 가장 중요한 일일까?’
‘’어떻게 그 일을 해야 할까?‘
’누구와?‘
’어디서?‘
’언제?‘
’왜?‘ 말고는 거의 정해진 것일 수 있습니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이미 정해진 하루의 무엇이 있으니까요.
어느 날 갑자기 ’초인‘이 되어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세상을 구하기 위하여 떠나기 전까지는요.
그러나 신이 준 자유 선택이 있으니 정해진 것들 속에서도 모든 것을 ’나‘로부터 리셋하면 될 것 같아요.
설령 매일 같은 ’무엇‘이라 하더라도 세부항목은 내가 정할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똑같은 하루는 없는 것 같습니다.
내가 선택하지 않으면 똑같지만, 내가 선택하면 매일의 결과치가 달라지니까요.
오늘의 일과는 정해져 있을지 몰라도, 그 안의 디테일은 내가 선택하면 그날은 내가 창조한 날입니다.
어차피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어요.
월요일은 월요일이고, 내 부서 일은 오늘도 정해져 있어요.
하지만 똑같은 하루라도 내가 어떻게 디테일을 선택했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오늘 업무상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기로 정해져 있다고 해보죠.
그 일정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닐 수 있으니 주어진 하루입니다.
그러나 아침에 일어나 ’이런 식으로 만나봐야겠어!‘는 내가 선택한 것입니다.
창조의 하루가 시작된 것이죠.
뭐 아주 운 좋은 날은 내가 ’무엇‘을 온전히 선택할 수도 있겠죠.
물론 그 반대도요.
그런 날은 아주 신바람 나는 날로 봐야 하는데, 대부분 ’왜‘의 질문을 해본 적이 없어서 불안해합니다.
그러니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질문은 ’왜 나는 오늘을 살아야 하는가?‘ 대한 것일 겁니다.
그 속에는 진정한 ’나‘를 물어보는 질문이 함께 있으니까요.
지금부터는 적어도 몇 가지 질문을 하면서 하루를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요.
그러면 86,400초가 초롱초롱 살아서 지나갈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