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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마디스트 Sep 07. 2023

Flow와 Flower

"거침없이 흐르는 곳에 꽃이 핀다."

‘flow’는 흐른다. ‘flower’는 꽃이다.

-er 은 행위자이다.

‘flower’는 ‘flow’하는 행위자이다.

막히지 않고 흐르는 자가 곧 꽃이다.   

  

칙센트미하이가 쓴 ‘flow’는 한국에서 ‘몰입의 즐거움’으로 출판되었다.

그의 flow는 몰입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왜 ‘흐른다’가 ‘몰입’으로 변환됐을까.     


물은 흐른다.

물은 흐르다 바위를 만나고, 굽이를 만나고, 낭떠러지를 만난다.

그러나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둑과 댐이 길을 막으면 땅속으로 스며들거나, 햇빛과 모의하여 하늘로 길을 튼다.  


칙센트미하이에게 몰입은 행복에 이르는 최선의 길이다.

그에게 몰입은 황홀경이고 무아지경이다.

‘Ecstasy’이다.     

왜?   

  

몰입할 때, 몰입이라는 ‘zone’에 진입한 자는 현재의 경험과 일에 완전히 빠져있다.

그는 그가 가진 잠재력을 그것에 모두 쏟아붓고 있다.

그의 뇌는 빈틈이 없다.

현재로 꽉 차 있다.

그에겐 자잘한 고민과 두려움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행복 그 자체이다.

그의 존재는 세상에 존재하는 것 중,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승화했다.  


어떻게 하면 ‘flow’ 해서 ‘flower’가 될까.     


삶을 의무가 아니라 ‘놀이’로 만들면 된다.     


의무의 삶은 목표가 주어진다.

놀이의 목표는 내가 정한 것이다.   

  

의무의 삶은 난이도가 주어진다.

어떨 땐 쉬워 보이나, 어떨 때 너무 힘들어 삶을 포기하고 싶어진다.   

  

놀이의 난이도는 내가 정한다.

나의 능력에 맞게 정한다. 더도 덜도 않게.

난이도와 능력이 균형을 이루었다.

     

의무의 삶은 피드백이 안개 속이다.

놀이의 피드백은 즉각적이다.


눈앞에 이정표가 길을 알려준다.

더 할 것인지, 멈춰도 될 것인지.

더 난이도를 높여 놀 것인지, 낮춰서 놀 것인지.  

   

남의 능력과 목표는 아무 의미가 없다.

그는 이미 또 다른 우주일 뿐이다.    

 

나의 순수한 욕망이 일러주는 것이 목표다.

목표의 난이도를 가늠한다.

너무 높으면 낮추고, 너무 싱거우면 높이면 된다.

누가?

바로 내가.


그리고 나타나는 행위의 결과는 선과 악, 게으름과 성실함의 열매가 아니다.

그저 방향 조정을 하라는 의미일 뿐이다.  

   

이것이 ‘flow’의 비밀이다.

그리고 이 세상 모든 ‘flower’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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