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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봄 Jan 27. 2024

하찮은 상담심리사의 사적인 일기 _ 네 번째 기록

내가 상담을 시작하게 된 건 part 2

지옥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곳일까.

누구나 괴롭고 고통스러운 일은 경험하기 마련일 테지만

아빠의 사망선고가 내려진  일주일은 

지옥에 있는 느낌이었다.


아빠의 전신화상은 심각하지 않았다.

온몸의 화상은 시간이 걸리겠지만 치료가 가능한 정도였다.

문제는 겉으로 드러난 상처가 아니라

열기가 입안으로 들어가 입 속부터 시작해 식도와 몸속의 장기들이 녹아버린 것이었다.


아빠와 함께 있던 다른 직원은 팔 한쪽에만 화상을 입었다.

왜 그랬을까... 아빠는 온몸을 열기로 뒤덮였는데 왜 동료직원은 가벼운 화상이었을까.


엄마는 직장생활을 오래 한 워킹맘이었다.

때문에 회사는 직원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계셨다.

아빠의 사고는 산재였으므로 우리는 회사와 싸워야 했다.

회사는 사고의 원인을 아빠의 부주의로 몰아갔고, 우리는 납득하지 못했다. 가스가 세는 줄 모르고 아빠가 용접을 하려고 하다가 폭발을 했다는데 애초에 아빠는 현장직이 아닌 사무직이었으며, 가스가 샜다면 회사 책임이지 왜 그것이 아빠의 책임이란 말인가.


엄마는 장례식장에 조문을 와서 아빠의 부주의를 은근슬쩍 강조하는 회사 직원들에게 나가라고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엄마의 울부짖음은 너무나 애처롭고 안타까웠다.

애초에 엄마는 언니와 나에게 회사 사람들이 와서 이상한 얘길 해도 귀담아듣지 말라며, 오랜 기간 월급쟁이로 살아온 짬밥으로 이런 경우 회사가 어떤 액션을 취하는지 예상하셨음에도 엄마는... 남편을 잃은 여자는 악을 쓰며 애처롭게 울부짖었다.


잘은 알지 못하지만 3일장이 끝날 무렵 한 직원의 양심고백으로 우리는 보상을 받을 수 있었고, 언니와 나의 남은 대학 등록금을 모두 지원받았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뉴스로 접한 소식이지만

그 회사는 몇 년 후 작은 폭발사고가 또 발생했다.


고통스러운 건 단지 회사사람들과의 싸움만이 아니었다.

아빠의 장례기간 동안 우리는 죄인이었다.

우리 가족이 왜 떨어져 살았는지 자세한 내막을 알지 못했던 친가 식구들, 즉 아빠의 형제들은 아빠의 죽음이 마치 엄마가

곁에서 잘 보필하지 못해서 인 것처럼 엄마를 대했다.

아빠를 기러기 생활을 하게 하더니 지금은 보상금을 타내려고 혈안이 된... 그런 여자 취급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큰아버지는 부조금을 직접 관리하겠다며 내놓으라 셨다. 우리는 그런 큰돈을 관리하기에 너무 어리단다.

세상에

핑계에 성의가 없다.


언제나 주변에 사람이 모여들었던 아빠의 부조금 금액은 꽤나 컸던 데다 회사에서도 직원들 개인뿐 아니라 공식적으로 낸 부조금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도박을 즐겨하던 큰아버지는 평소 막내인 아빠에게... 제일 만만한 우리 아빠에게 돈을 수없이 꿔갔던 것을 알고 있기에 언니는 당당하게 말했다.

'아빠를 위한 돈이니 제가 관리할게요. 제가 이제 가장이니까요,


그리고 언니는

큰아버지에게서 온갖 욕을 들어야만 했다.

구석에서 웅크려 자던 중 들린 큰아버지와 언니의 싸우는 소리에 난 조용히 일어나 언니 옆에 앉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냥 언니 옆에 앉아 큰아버지의 욕을 함께 들어주었다.

내가 옆에 있으니 언니 하고 싶은 말 다 해.

여차하면 내가 미친년처럼 난리 칠 테니...


장례기간 3일 내내 너무 울어 탈수 증상이 온 나에게... 하염없이 울고 있는 언니에게 물 한잔 떠다 주는 어른은, 친인척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언니와 나의 친구들의 우리의 식사와 물을 어른들의 눈치를 봐가며 챙겨줬을 뿐, 정작 가족을 잃은 우리 세 모녀는 아빠를 타지에서 외롭게 보낸 죄인 취급을 받아야만 했다.


서른 후반이 된 지금도 나는 어느 것 하나 이해되는 것이 없다. 모두가 아빠이자 남편, 그리고 형제이자 남동생, 직장 동료이자 친구의 죽음을 갑작스럽게 받아들여야만 했으며

더군다나 그 죽음이 고통스럽고 처참했다는 것을 인정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분명 모두가 슬펐다.


아마도...

아마도 어쩌면 비난의 대상이 있어야 슬픔을 견딜 수 있었을 테고 그 대상이 우리 세 모녀가 아니었을까...

하고 그들을 이해해 보려 애쓰는 것이 내가 그때의 기억들을 견디는 방법이다.


그리고 또 하나.

해결되지 않은 그때의 감정과 상처들이 자꾸 나를 과거로 끌어들이려 할 때, 아빠의 사망선고를 해 준 얼굴이 새하얀 그 의사에게서 위로를 받는다.


아빠의 위독함을 알리면서도, 사망선고를 하면서도

눈빛 하나 말투 하나에서 배려받고 있는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 함께 마음 아파해 줘서 너무나 고마웠다.

그 의사는 딱 필요한 말들만 했다.

우리와 사담을 나누지도 나누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분의 태도는 내 기억 속에 꾸준하게 머물러 있었다.


일상으로 돌아와 대학3학년을 앞둔 어느 날,

아빠를 보내고 남은 세 모녀가 각자의 방식으로 슬픔을 견디고 꾸역꾸역 살아내고 있던 그 어느 날.


나는 전공을 바꿔야겠다 다짐했다.

고민도 아니고 계획도 아니었다. 다짐이었다.

아빠의 죽음으로 받는 대학 등록금인데 어영부영 아무 공부나 할 순 없었다.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고 그 길을 심리학, 그중 상담심리학을 통해 찾고자 했다.


그렇게 나는 상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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