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10년 차에도 아직까지 완벽히 고치지 못한 ENTJ의 특성 중 하나는 '할 말을 하지 못하면 아프다'는 점이다.
사회초년생 때는 아무 생각 없이 할 말을 했다면, 3~4년 차 때는 할 말을 꾹꾹 참다가 밤새도록 생각나서 결국 새벽같이 회사에 달려가 당사자를 붙들고 얘기하거나, 운동이나 취미 활동 등으로 관심사를 돌려서 어떻게든 잊어보려고 노력하거나, 그래도 안되면 즉시즉시 할 말을 하면서 그렇게 직장 생활을 버텼다.
당연히 이런 고질병(?)이 있으니, 직장 내에서 승승장구하다가도 여러 번 위기가 찾아왔다.
1. ENTJ 고질병으로 인한 첫 번째 위기
직장인 3년 차 정도 되었을 때, 회사에 여러 가지 사건들이 생기면서 나를 인정해 주던 대표님에서 새로운 대표님으로 바뀌었다. 새로운 대표님은 대리 직급인 내게 의견을 물어보는 일은 없었으니, 다행인지 불행인지 대표님을 대면할 기회가 한동안 전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프로젝트에 합류하게 됐는데, 프로젝트 주제는 신제품을 홈쇼핑에 론칭하는 일이었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아무 문제없는 프로젝트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니 신제품 자체가 문제였다. 홈쇼핑은 보통 4,50대 여성이 주요 고객인데, 회사에서 개발하려는 신제품은 남성, 그것도 운동에 관심이 많은 2030 남성 타깃 제품이었던 것이다.
프로젝트 내용을 파악하게 된 순간부터 입이 근질거리기 시작하더니,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대표님과 여러 팀장님 앞에서 입을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홈쇼핑은 4050 여성 타깃인데 출시하는 제품은 2030 남성 타깃이라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홈쇼핑에 꼭 론칭을 해야 한다면, 4050 여성에 맞도록 원재료와 콘셉트를 무조건 변경해야 하고, 신제품을 그대로 유지할 거면 채널을 바꾸는 게 맞습니다."
그렇게 입을 나불거리고 몇 분이나 흘렀을까. 새로운 대표님이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이름과 직급이 뭐라고 했지?"
"OOO 대리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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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즉시, 대표님이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얼굴에 인상을 팍 쓰시면서, 내가 아닌 마케팅 팀장님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 OO 팀장, 내가 오늘 미팅 무슨 자리라고 했지? 랩업 미팅이라고 했지! 랩업 미팅 뜻 몰라? 랩업 뭐야? 무슨 뜻이야. 말 그대로 정리하는 미팅, 최종 미팅. 내가 대리한테 이런 얘기 들을 군번이야? 직원 관리 안 해?..."
차라리 내게 화를 내줬으면 좋았을 텐데, 잘못은 내가 하고 마케팅 팀장님이 당하니 입을 나불거린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크게 밀려왔다. 이 일로 인해 함부로 입을 놀리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본다는 것을 깨달았고, 입을 놀리면 안 되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ENTJ 성격이 하루아침에 바뀌겠는가?!
2. ENTJ 고질병으로 인한 두 번째 위기
이 사건 이후로 한동안 입이 근질거려도 잘 참았다. 하지만 또 위기가 찾아왔다.
갑자기 대표님이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대표실에 나를 단독으로 부른 것이다. 그때 하신 질문은 정말 세월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잊히지도 않는다.
"OO대리는 김(먹는 김)이 저관여라고 생각해요, 고관여 제품이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저관여 제품이죠. 김 하나 사는데 자동차, 집 구매하는 것처럼 하나하나 따지고 고민하고 사지는 않잖아요? 일반적으로 옆에서 1~200원이라도 할인하면 그거 샀다가, 행사하는 거 샀다가 그렇게 생각 없이 사는 제품은 저관여라고 알고 있습니다."
"... 내가 하나 알려줄게요. 김은 고관여 제품이에요. 어떻게 생산하느냐에 따라 중금속에 오염될 수도 있어서 브랜드도 보고, 하나하나 따져서 사야 하는 고관여 제품."
대표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면 "네, 알겠습니다"라고 할 법도 한데, 나는 당시에도 고질병을 완벽히 고치진 못한 상태였기에, 대표님이 식품회사에서 오셔서 그렇게 생각하실 수는 있으나, 김은 저관여 제품이라고 다시 한번 강조하고야 말았다.
갑자기 소리를 또 고래고래 지르시는 대표님.
"마케팅을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해. OO대리는 기본이 안되어 있어, 기본이. 나가, 빨리 나가!!!"
난 그날 쫓기듯이 대표실을 나와, 나를 아끼는 여러 팀장님들께 불려 가 10분 동안 아래와 같이 말하는 법을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