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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청안 에세이작가 Nov 02. 2020

모두 널 응원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죽길 바라지도 않아

나는 제발,  당신이 죽지 말고 살아주었으면 좋겠다


  개그우먼 박지선이 오늘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어떤 연유로, 그것도 모친과 함께 세상을 등진 것인지 우리는 아직 알 수 없다. 많은 충격과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추모의 글만이 기사의 형태로 온라인 공간을 돌아다닌다. 죽음을 선택한 것이 스스로의 결정이었고 불행에 의한 것이었다면, 나는 다만 바란다. 저 너머에서 펼쳐질 그녀만의 온전한 세상이 이제 처음부터 다시 시작되는 것이라면, 거기서는 부디 원대로 뜻대로 모두 이루며 지냈으면 좋겠다고.


이미지 출처 :https://news.nate.com/view/20201102n36995






  몇 해 전에 사랑했던 그는 매일 죽고 싶다고 했다. 사는 게 귀찮다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언젠가 끝이 있을 텐데 뭘 위해 사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나는 위로의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섣부른 위로가 행여 독이 될까 봐 그에게 어떤 말로도 다가서지 못했다.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와 헤어진 지금. 이제는 누구보다 똑똑하게 자신의 삶을 잘 살아낼 그 사람을 믿는다. '죽고 싶다'는 그 말은 단지 입버릇처럼, 습관처럼 내뱉은 말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걸 한껏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이지. 내가 과거에 그랬으니까. 죽고 싶었으니까.


  내가 '죽음'에 대한 생각을 최초로 하게 된 것은 유치원 하교 길이었으며 그 생각이 심화되어 '죽고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6학년 때였다. 어떤 심각한 일이 있어서 그런 '특수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은 아니다. 나에게는 단지 이 세상이 너무 시시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충족되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나는 동화보다 만화보다 드라마가 재미있었고, 아이들과 하는 소꿉놀이보다 어른들이 서로서로 나누는 대화에 관심이 많았다. 정답만을 강요하고 뭐든 달달 외워 시험을 치르게 하는 학교가 이해되지 않았으며, 착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보상을 받고 악하고 무자비한 사람이 벌을 받는 구조로 현실 세계가 돌아가지 않는다는 점이 너무 싫었다. 교과서에서는 도덕군자를 추앙하고 있었지만 실재하는 현실은 매우 달랐다. 초등학교 6년 내내 나는 실망하고 또 실망했다. 뉴스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세상은 살만한 것'임을 보여주려 애썼지만 악인이 득세하는 것 같은 이 세상은 어쩐지 부조리해 보였다.


  무엇보다 나를 견딜 수 없게 한 것,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던 배경은 이거였다. 우리들에게는 끝이 정해져 있다는 것. 모든 인간은 언젠가 죽으며 최대한 많은 것을 가져 천운으로 부귀영화를 누리고 살더라도 늙고 병들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 그게 나를 죽고 싶게 했다. '어차피 죽을걸 왜 살아야 되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초등학교 6학년 때는 내내 자살하고 싶다고 일기에 썼다.


  그렇게 염세적인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어떻게 죽지 않고 지금까지 살았느냐고? 어느 날 갑자기 살기로 마음을 고쳐먹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죽지 못해 살았다. 내가 죽으면 분명히 슬퍼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좀 더 살다가 언제든지 죽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죽음의 시점은 계속해서 유예되었다. 그리고 죽을 용기가 없어서 죽지 못한 것도 맞다. 죽을 결심으로 살고자 한다면 못할 일이 없다.


  나는 차츰 내 삶에 익숙해졌다. 그리고 누군가 내 영혼의 처방전을 뒤집은 것처럼 계속 바뀌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링거의 약물 투여 후 상태가 호전되는 모양새마냥 나는 꽤나 밝고 감성적으로 내 주변 세계를 바꾸어가기 시작했다. 그건 살면서 좋은 사람들을 계속 만나게 되는 행운이 늘 뒷따랐기 때문일 것이다. 또 이십 대부터 지금까지 나를 아끼고 이끌어준 친구들, 회사의 선후배들, 그리고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어 스스로 짊어지고 태어난 '민감자의 고통'을 버티고 견뎌냈다 생각한다.


  어쩌면 민감하게 사람이나 사물을 관찰하는 것을 즐겨, 지금도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을 쓴다는 것이 한편으론 고통이나, 또 다른 쪽으로는 민감자의 고통을 벗어나 뭔가를 쓰고 있다는 몰입의 경지를 느끼게 해주기도 하고, 다른 시각을 획득하는 것이라 '살기 위한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살아있음을 느끼려고 쓰기도 한다. 이제는 죽기 싫은가보다. 아니, 나는 더 살고싶다. 건강하게 그리고 되도록이면 즐겁게.


  오늘 박지선의 사망 소식 이후 하루 종일 마음이 아팠다. 짧은 생이었지만 그녀는 평생 타인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었다. 더는 그녀처럼 아픔을 못 견뎌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과거의 나처럼 '왜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섣불리 죽음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없었으면 한다. 그래서 나의 책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에는 '제발 죽지 말아달라'고 권유하는 내용이 있다. 소제목은 '당신이 내게 살아서 뭐하냐고 묻거든'이다.  이 밤, 이 글을 보고 단 한 명이라도 더 생을 유예해서 '아무 의미 없는 삶'이라도 '시시한 삶'이라도, '살만하지 않은 삶'이라고 해도... 내일 아침을 함께보고 한 번만 더 웃어봤으면 좋겠다. 벌써 그리워진다. '박지선'의 웃는 얼굴.






[당신이 내게 살아서 뭐하냐고 묻거든]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아. 아픔을 이끌고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인지도. 아니, 내가 이렇게 당신을 안다고 주접을 떠는 것이, 당신에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도 알 것 같아.


  그런데 말이야. 모두가 당신의 삶을 응원할 순 없겠지만 모두가 당신이 죽기를 바라지도 않아. 어떤 사람들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누군가의 마음속에 평생토록 살아. 나도 언젠가 죽더라도,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뿌리내리고 살아갈 거야.


  그러니까 매일 밤 죽음의 문턱이 당신의 눈앞에 열리더라도, 누군가 당신을 부르는 것 같은 환영이 찾아오더라도, 혼자의 시간이 비참하게 느껴지더라도 내게 다시 물어봐줄래. 살아서 뭐하느냐고. 이 아픔은 언제 끝나는 것이냐고. 그럼 나는 처음부터 다시 대답할게. 쉽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 당신이 내게 살아서 뭐하냐고 묻거든 계속해서 다시 대답해줄게.


  우리의 삶이 그렇잖아. 어쩌면 다람쥐 쳇바퀴 돌듯이 흘러가는 것이고 그 안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고. 의미가 없었대도 어때. 누구나 좋은 시절이 오기를 기다리며 살아. 마냥 좋아 사는 삶이 어디 있겠어. 그래도 삶이 꼭 죽음과 어둠으로만 뒤덮여있지는 않아. 혹시 알아? 당신이 웃을지. 웃으며 내일을 살아갈지. 기다리면 반드시 오는 것들이 있었어. 그러니 일단은 이 밤이 지나가기를 같이 기다려보면 안 될까.      







***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제목의 책을 썼습니다.


http://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linkClass=&barcode=9791185257945






***  불면증 오디오클립 '책 읽다가 스르륵'을 연재 중입니다.


https://audioclip.naver.com/channels/5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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