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기와 나> 릴레이 연재 : 네번째 - by 손태겸 감독
1. 우리 영화 <아기와 나>의 촬영 첫 날.
아기 배우 손예준 군이 그 날의 촬영 분량을 소화하고 귀가 하려는 참이었다. 프로듀서의 사촌이었던 손예준 군은 피곤한 기색으로 아버지의 품에 안겼고 나는 아버님 곁으로 조용히 다가갔다. 종일 이어진 촬영 동안 대기 하시던 예준이 아버님 역시 피곤하신 건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오늘 정말 수고 많으셨구요. 제가 너무 아이를 … “
인사를 드리다가 아버님과 눈이 마주친 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왈칵 눈물을 쏟았다. 평소 좀처럼 눈물이 없는지라, 아버님은 물론 수년을 보아온 프로듀서와 스탭들도 놀란 얼굴들이 되었다. 사실 가장 놀란 건 나였다. 그냥 예준이와 아버지를 바라보는 것 뿐인데 눈물이 나올 줄은, 그것도 참을 수 없는 통곡일 줄은 정말 몰랐기 때문에.
궁상맞은 눈물의 인사도 잠시. 어서 다음 분량 촬영을 위해 이동해야 했다. 나는 한동안 가만히 생각했다. 이 밤에 우리 스탭들과 동네 일대 주민들의 휴식을 방해하고, 부모님의 안락한 보금자리를 빼앗아 오픈세트를 만들며, 배우들에게 예민함을 모질게 종용하고 마는 이 의지는 대체 어디서 생겨난 것일까. 무수히 많은 타인들의 희생과 배려 그리고 인내를 통해 완성되는 영화를, 나는 어쩌면 그렇게 원하고 오래 전부터 몹시도 갈망해 왔나. 생각할수록 불가사의다.
2. 1999년 1월 누나가 집에 잡지를 한 권 들고 왔다.
월간 영화 잡지 스크린이었다. 커버 사진에는 배우 심은하씨가 백합을 들고 있다. 누나가 왜 그 책을 사가지고 왔는지 모르지만 우연히 펼쳐 본 그 책은 대단히 재미있었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글들을 읽고 또 읽었다. 어느 평론가의 글에 ‘내러티브’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도대체 ‘내러티브’란게 뭔지 궁금해서 학교 국어선생님께 물어보고 그랬었다.
영화라는 것이 참으로 흥미롭다는 것을 시나브로 알게 되고 난 뒤, 학교에서 실시한 장래 진로 희망 조사 설문 시간에 난생 처음 고민을 했다. 뭐가 됐든 영화라는 글자가 들어가는 말을 적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영화 감독이라는 말은 차마 쓸 수가 없었다. 감독이라는 글자는 좀 무서웠다. 아주 거대한 벽 같은 느낌이 들었고 매우 용감한 사람이어야 할 수 있는 일 같았다. 소심한 나는 영화 감독이라는 단어에 겁을 먹고 영화 평론가가 되고 싶다고 썼다. 물론 영화 평론가라는 단어 역시 무섭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여러 시간들이 지나고 대학교에서 영화를 전공하던 중에도 감독이라는 단어는 친숙 하거나 쉽지 않은 느낌이었다. 의심이 많은 성격 탓에 스스로를 믿지 못하거나 능력 부족을 핑계로 대면서 정작 노력은 태만히 했다. 단편을 하나씩 완성하고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은 맹세코 주변 사람들의 헌신적인 도움과 노력 없이 이루어질 수 없었던 일이다. 하물며 단편이 아닌 장편 영화의 경우는 오죽했으랴. 단편 영화를 하나씩 만들면서 내 목표의 끝은 장편영화라고 생각해왔고 그것은 어린 시절 영화감독이라는 말에서 느낀 무서움이나 그 어떤 벽이 주는 장대함 보다 거대한 이미지였으니, 내가 많은 이들에게 빚쟁이가 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참혹히 우는 아기를 카메라에 담으며 오케이를 외칠 때나, 바쁜 스케쥴에 시달리는 주연 배우들에게 독촉 전화를 할 때,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를 가까스로 면해가면서도 내 요구에 따라 다음날 현장에 나오는 스탭들을 볼 때. 나라는 사람이 바라보는 비전을 공유하기 위해 애쓰던 모든 이들과 아닌 밤 중에 홍두깨처럼, 우르르 모여 무거운 장비를 옮겨가며 영화를 찍는 집단의 소란함을 바로 옆에서 감내해야 했을, 모든 애꿎은 이들에게 이 자리를 빌어 감사와 사과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나에게 그 많은 것들을 책임질 만한 넓은 그릇이 있는지를 생각하고, 결과물이 모든 이들의 수고를 탕감해줄 만큼 훌륭한 것인지를 고민한다. 뒤늦게 생각해보면 내가 아이와 아이 아버지 앞에서 울게 되었던 것은, 이에 대한 미안함이나 뭐라 수식하기 어려운 복합적이고 깊은 마음 어딘가에서 끌어올려진 고마움 아니면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두려움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3. 고마운 사람들
자취방 화장실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우리 영화 <아기와 나>의 시나리오를 쓰던 때로 기억을 되돌려본다. 이 영화를 위해 자신의 많은 것을 희생한 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그 소중한 마음씨에대해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서이다. 특히 이것은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자리가 모두 특별하지만 지면 관계상 전체를 대표해 두 분만을 언급하는 점 용서 바란다. 이이경 배우와 정연주 배우. 고맙다는 말 한마디로 마음을 다 표현할 수 없는 이들이다.
시나리오 2고를 수정 하고 있던 어느 날 영화의 남자 주인공 ‘도일’을 상상하는데 이이경 배우를 생각했다. 이미지는 그야말로 안성맞춤이었다. 한 번 생각을 하고 난 뒤로는 도일을 그려볼 때 다른 사람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를 실제로 처음 본 것은 이송희일 감독님의 영화 <백야>시사회 현장이었다. <백야>에는 여러 배우 분들이 출연하셨고 그 가운데는 나와 같은 학교를 다닌 친한 형도 있었다(배우 전신환님으로 <아기와 나>에서는 작은 역할을 부탁드렸는데 선뜻 출연해주셨다). 나는 무대인사를 위해 감독님들과 배우분들이 모두 오신 그 자리에서 이이경 배우를 처음 보았다. 여러가지 감정과 드라마가 스며들어있는 인상이었다. 그 이미지는 오랫동안 선명하게 기억되었고 당연히 복잡 다난한 사건을 겪는 도일이라는 캐릭터를 표현하기에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시나리오 수정이 막바지로 흘러갈 즈음.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고 생각했던 이이경 배우와 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줄 만한 지인이 있음을 알게 되었고, 상상 속에만 존재하던 캐스팅 보드를 현실에서 만들어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가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개인적인 연락과 공적인 연락, 만남의 자리를 몇 차례 가진 후에 우리는 함께 하게 되었다. 최종 만남이 있었던 성북동의 그 카페를 이이경 배우가 기억할지 모르겠다. 그 공간은 기억한다 해도, 그가 떠나고 난 뒤 내가 스탭들에게 연락하며 함박웃음 짓고 또 소리 질렀던 것은 모를 것이다.
내가 얼마나 서툰 게 많았는지 그도 영화를 찍으면서 느꼈을 것이다. 특히 난생 처음 하는 사전 전체 리딩 자리에서 내가 무슨 역할을 해야하는지 전혀 알지 못한 채 그저 무게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모두가 모인 가운데 그에게 핀잔 준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영화를 상영하는, 아니 기억할 수 있는 그 순간까지 여러 일정 속에서 그가 배우로써나 인간으로써 희생해야 했던 것들, 술자리에서 허심탄회 하게 나눈 대화들을 기억할 것이다. 결과에 상관없이 그 과정 속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4. 배우 이이경
그는 현장에서 여러 아이디어와 생각을 편하게 제시했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가운데 내가 취하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생기게 된다. 작업의 특성상 편집에서 여러가지 것들이 뒤바뀌는 경우도 물론 있다. 하지만 이이경 배우가 제시하고 보여준 것들 가운데 정말 긴요한 역할을 하게 된 부분들이 여럿 있다.
도일과 순영, 예준이 어린이 대공원에 놀러 가서 즐거운 한 때를 보내는 몽타주 시퀀스를 촬영할 때였다. 동선과 촬영 장소 및 장면에 대한 계획을 하긴 했으나 최대한 여러가지 상황을 촬영해 놓자는 생각에 약간은 즉흥적이고 비조직적인 방식으로 현장이 운영되었다. 촬영을 이어가다 보니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들이 대개 비슷한 느낌이었고, 무언가 새로운 그림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눈부신 아이디어들이 전혀 떠오르지 않고 있었다. 그 때 이이경 배우가 가족들이 항상 돌아다니며 구경하고 먹고 하는 순간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딘가에 누워서 쉬고 잠이 들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순간도 있지 않겠느냐며 순영의 무릎을 베고 벤치에서 잠드는 장면을 생각해냈다. 촬영감독님이 신속히 그 장면을 한 번 촬영해보자고 제안 하셨고 때마침 아기 배우 예준이가 낮잠이 들어 활동적인 가족들의 모습을 담아낼 수 없는 상황 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즉흥적으로 그가 제안한 그림을 촬영했다.
편집과정에서 다시 본 이 그림은 대단히 좋고 쓰임새가 많은 장면이었다. 편집을 도와준 기사님은 ‘아기와 도일이 잠들고 순영만 홀로 깨어있는 모습’이 텍스트와 결부되어 의미부여 하기에 알맞다며 흡족해 하셨다. 실제로 가족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는 설정에 있어서 스테레오 타입에 가까운 생각만을 하던 내가 혼자 만들어내기엔 불가능한 그림이었다.
엔딩씬에서 이이경 배우가 즉흥적으로 내뱉은 한 마디의 대사도 예상치 못한 순간을 빚어냈다. 중요한 장면이다보니 이 자리에서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시나리오에 없던 한 마디를 덧붙인 것이었는데 나중에 영화제에서 영화를 접한 관객들이 그 대사가 좋았고 기억에 남는다, 혹은 그 말 한 마디에 이 영화에 대한 애정이 생겼다고까지 말하는 것을 듣고 나니 새삼 영화라는 것이 나 혼자만의 의견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배우 및 스탭들, 그 외 고마운 사람들의 집단 노력과 지성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특히나 이이경 배우의 헌신이 빛을 발한 순간들은 이 외에도 더 있지만 쓰다보면 한없이 길어질 것 같아 여기까지 언급하려 한다. 그 외의 비하인드나 영화를 더욱 궁금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만든 일화들은 언젠가 또 이야기할 기회가 생기길 바란다.
5. 다음 연재
영화를 찍으면서 발생하는 기억할 만한 순간들이나 내 인생을 돌아보게 될 만큼 반성하게 되고 놀라운 깨달음을 얻게 되는 상황들이 얼마나 많은지 헤아릴 수가 없다. 다른 배우들이나 스탭들이 내 부족함을 채운 그 여러가지 이야기는 다음 장에 쓰려 한다. 궁금하신 분들이 계시다면 이어서 읽어주십사 하는 바람이고 모든 관심들이 저예산 독립영화이자 치열하게 고민하며 완성한 <아기와 나>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지길 기도한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하고도 힘들었던, 마침내 거대한 장벽을 기어오르던 시간에 우리가 가졌던 열정들이 모두에게 전해지길. 그리고 내가 장벽을 기어오를 수 있도록 도와준 사람들, 그 때나 지금이나, 아니 <아기와 나>를 시작하기 전부터 이미 내게 너무 고마운 사람들이었던 이들에게 여러분들은 고마운 사람이었다고 말하고 뒤늦게나마 전한다. 조금 낯간지럽지만서도 이 고백이 기만처럼 들리지 않도록 앞으로 매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해 본다.
* 영화 <아기와 나> 다음 화에는 손태겸 감독님의 두번째 연재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