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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화 아기와 나 Nov 07. 2017

시시콜콜한 이야기

영화 <아기와 나> 릴레이 연재 : 다섯번째 - by 손태겸 감독

1. 


단편영화 <손님>의 해외포스터


<우리들>을 만드신 윤가은 감독님의 단편 가운데 <손님>이라는 작품이 있다. 참 좋아하는 작품이다. 시나리오,연출, 연기 등 각종 요소들이 나무랄 데가 없다. <아기와 나>에서 순영 역할을 맡아준 정연주 배우는 <손님>의 주인공이었다. 정연주 배우는 그 작품에서 복잡한 가정사를 지닌 여학생 ‘자경’을 연기했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 해 지는 시간에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는 장면에서 ‘자경’의표정은 그야말로 압권이었다. 아주 많은 것이 표정 하나에 담겨있었다. 나는 그 작품을 보면서 정연주 배우가 가진 이미지와 마스크에 큰 힘이 있다는 생각을 했다. 여러가지 감정과 드라마를 표현해 낼 수 있는 힘. 복잡하고 미묘한 정서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 <아기와 나>의 ‘순영’이라는 캐릭터도 많은 씬에 등장하거나 대사가 풍부하지는 않지만 복잡하고 미묘한 정서를 담고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고 내심 정연주 배우가 역할을 맡아준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순영' 역의 배우 정연주


하지만 역할을 제안하기에 고민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순영은 이이경 배우가 맡은 ‘도일’ 다음으로 중요한 캐릭터이지만 출연 분량 자체가 많지 않고, 반면에 많은 것을 쏟아 부어야 하는, 어려운 씬들에 등장해야 했기 때문이다. 떨리는 마음으로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나 대화를 나눈 뒤 출연 승낙을 받아낸 것은 내게는 행운과도 같은 일이었다. 현장에서 모니터로 정연주 배우의 연기를 볼 때의 만족감은 역시 기대했던 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충분했다. 편집 과정에서도 여러 스탭들이 중요한 순간마다 드라마를 살려주는 정연주 배우의 연기에 한 마디씩 감탄을 내뱉곤 했다.


'도일' 母,  박순천 배우 


도일 모(母)를 연기한 박순천 선생님의 내공은 두말할 필요 없는 부분이다. 몹시 감정적이고 긴 대사를 소화해야 하는 클로즈업 쇼트 촬영 때 선생님은 원 테이크 오케이를 이끌어내셨다. 너무 훌륭하셨다는 나의 인사에 ‘나 더 잘 할 수 있는데?’ 라고 천진하게 말씀하셨던 선생님의 모습 역시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오희준 배우, 성도현 배우, 윤소미 배우, 류경수 배우, 그 외에 이 영화를 위해 애써 주신 모든 배우분들. 이 글을 쓰고 있자니 고생하신 모든 배우분들의 얼굴이 스쳐 지나간다. 출연이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길었던 오디션 기간 동안 자신들의 많은 것들을 보여주시며 최선을 다하셨던 분들께도 이 지면을 통해 감사의 마음과 죄송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다.  내가 다음 작품을 한다면 꼭 다시 만나 행복한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서투른 연출 방식으로 갖은 고생을 하시는 바람에 다시 만나기 싫어하실 가능성이 또한 농후하지만, 어쨌든 나의 희망사항이다.


한 컷 두 컷 출연을 위해 이틀 밤을 고생하셨지만 출연씬이 끝내 편집에서 삭제되어 미안함을 감출 수 없는 배우분들도 계신다. 오만가지 상황이 생기는 것이 영화 작업의 숙명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소심한 연출자로써 그 불편감을 감내하는 일은 풀지 못하는 어려운 숙제를 떠안은 것처럼 답답하고 쉽지 않은 일이다. 조금 더 부지런히 작업해서 그분들께 온당한 자리를 마련해드리는 것이 앞으로의 과제임을 알면서도 게으른 천성에 차기작 작업을 태만히 하고 있으니 언제나 그 숙제를 풀 수 있을까. 모든 것이 참 요원하기만 하다.



2.


우리 주변에 언제나 존재하지만 주의 깊게 들여다보지 않으면 잘 보이지 않는 삶들이 있다. 학교를 다니고 사랑을 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처럼 나 같은 보통 사람들이 보통의 형태로 산다고 할 때 생각하는 삶, 혹은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삶을 추구하지만 어쩐지 다른 사람들처럼 보통의 삶을 살기 위해서는 몇 겹의 장애물을 넘어야만 하는 사람들의 삶. 그들의 삶 속에는 어떤 사건들이 존재할까. 때로는 스스로의 실수로, 혹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진 일들로 ‘남들과 같이’라는 말 자체가 사치가 되어버린 어떤 이들의 삶. 나는 그런 삶을 관찰하는 것에 흥미를 느낀다.

그러다 보면 우리가 보통의 삶이나 온전한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정말 보통의 것이고 온전한 것일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고 이 세상의 그 무엇이 그들이 원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보장해 줄 수 있을까에 대한 생각도 하게 된다.  상념의 가지가 뻗어나가다 보면 사람들의 삶은 모두 각자의 방향과 이유가 있고 고정된 관념에 기반해 잣대를 들이댈 수만은 없다는 것, 우리가 일반적이라 생각했던 가치들이 누군가에게는 전혀 다른 의미의 가치들로 다가올 수 있다는 생각에 이른다. 거장의 말을 빌려오자면 가치 전복적인 상황. 나는 그런 상황들에 집중하길 좋아한다. (가치 전복적인 상황에 흥분한다는 것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의 말이다)


영화 <아기와 나> 촬영장에서 


영화 <아기와 나> 중에서


<아기와 나> 속의 도일이나 순영의 삶도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흐름 속에 있다고 느낀다. 그를 표현하기 위해 도일에게 험난한 사건들이 많이 부여되었고 거친 행동이나 대사들이 입혀지게 되었다. 이이경 배우는 아마 이 작품을 하면서 너무나 많은 욕설과 흡연에 힘들었을지 모른다. 어떤 씬에서는 누군가에게 함부로 행동하는 인물을 보여주기 위해 도를 넘은 비난과 거친 표현을 일삼는 캐릭터를 그리기도 했다. 보여주고자 하는 상황 속에 꼭 필요한 설정이었고, 상대방의 심연을 바라보기보다 돌을 먼저 던지는 함부로의 행동이 적나라하게 표현되길 바랐다. 몇몇 캐릭터들의 폭력을 통해 바라보는 이들이 객관적인 사고를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판단과, 이보다 더 잔인하고 생각 없이 상대를 힐난하는 경우가 많은 현실의 일면을 나타내려 했다고 할까.


하지만 영화를 다 만들고 생각해보니, 관객으로써의 나는 평소 모종의 불편함을 관객이 너무 무겁게 하고 져야 하는 영화들을 불편해하는데, 감독으로써의 내가 정확히 약간의 불편함을 줄 수 있는 묘사를 했다는 것에 신경이 쓰이고 심란했다. 사실 영화에서 필요한 표현인 것은 맞지만 좀 더 현명하게 표현할 방법은 없었을까 뒤늦게 반성을 한 셈이다. 후반작업 과정에서 많은 이들에게 보여주고 평가를 받으며 영화를 다듬었지만 만일 내게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하고자 하는 것을 오롯이 하면서도 보다 불편 없이 납득할 수 있는 똑똑한 방법을 강구하리라 다짐했다.


그 모든 거친 세계를 함께 완성해가며 육체적으로 힘든 현장을 버티고, 불안해하는 나를 붙들어준 가족과 스탭들게도 낯간지러운 감사를 건넬 수밖에 없다. 그들이야말로 내가 가장 큰 빚을 진 이들이다. 왜냐하면 이들의 수고는 사실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3.


영화 <아기와 나>  제작 현장


장편 영화 연출이 처음임에도 불구하고 긴장한 연출팀을 위해 ‘저만 믿고 따라오세요!’ 라고 호기롭게 이야기했지만, 덕분에 우리 연출팀은 어마어마한 고생을 하고 말았다. 연출팀뿐 아니라, 촬영팀, 조명팀, 제작팀, 미술팀, 녹음 및 분장/의상 팀 등 모두의 고생 역시 매한가지였다.


제작 중 특히 기억에 남는 사건은 우리 연출팀과 이보림 PD가 목숨을 잃을 뻔한 아찔했던 순간이다.  도일이 ‘예준’을 유모차에 태운 채 한강 다리를 건너는 장면을 촬영하던 날이었다. 우리는 한강대교 양방향 1차로 사이에 있는 인도, 다시 말해 다리의 중앙 부분에 놓인 인도에서 촬영을 하기로 했었다. 사실 나는 그 날 그 장면을 찍기 전부터 이상하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여러 스탭들이 교량 가장 자리 인도에서 4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중앙 인도까지 건너야 했는데 이게 생각보다 매우 위험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한강 대교는 북단과 남단에 신호등이 있어 중간에 잠시 주행 차량이 없는 시간이 있지만 그래도 다리를 주행하는 차량들의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굉장히 조심해야 했다. 그런데 하필 나와 연출팀, 이보림 PD가 타이밍을 맞춰 차도를 가로지르는 순간 저만치서 신호를 무시한 채 과속질주 하며 우리 쪽으로 다가오는 차량이 있었던 거다. 다리를 건너는 다섯 사람 중 내가 가장 앞장서고 있었는데 내가 건널 때 이미 그 차가 나를 향해 매우 근접해 오고 있던 터라, 자칫하면 내 뒤를 따라오고 있는 나머지 스탭들이 차량과 충분히 충돌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천우신조로 스탭들이 차에 치이는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지만 조금의 과장도 없이 설명하자면, 해당 차량은 정말 종이 한 장 차이로 우리 스탭들 사이를 스쳐 지나갔다. 너무놀라 서로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아찔한 순간이었고, 하늘이 도와서 사고가 나지 않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사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후 이어진 촬영과 몇 달 뒤 이어진 소스 촬영 때까지 함께 해준 스탭들의 노고는 감사하다는말로 부족할 지경이다.


<아기와 나> 한만욱 촬영 감독


모든 이들을 대표해서 특별히 언급하고 싶은 한 사람은 <아기와 나>를 위해 먼저 좋은 글을 써준 한만욱 촬영감독이다. (아직 한만욱 촬영감독의 글을 못 보신 분들은 브런치를 통해 찾아 보시라!)  한만욱 촬영감독은 나의 대학교 졸업작품이자 나를 이 자리까지 올 수 있게 만든 단편 <야간비행>의 촬영감독이었다.  그는 그때부터 금과옥조 같은 조언들로 내게 상당한 도움을 주고 또 영향을 끼쳤다.  학부 입학 동기로 시작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 동기를 거쳐 웹 무비/드라마 <미생 프리퀄> 시리즈, <아기와 나> 까지 여러 작품을 같이한 만큼 한만욱 촬영감독과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이따금 작품들이 좋은 평가를 얻거나 영화제에 갈 수 있었던 것도 한만욱 촬영감독의 공이 누구보다 크다.  하지만 그 동안 그의 공에 상당하는 보답을 한 적이 잘 없는 것 같다. 영광을 함께 나누어야 하는 순간에도 제대로 챙기질 못하여 지나고 난 뒤 항상 미안했다. 이 지면을 빌어 그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싶고 또 보시는 많은 분들께도 영화를 완성하는데 여러 스탭들, 특히 한만욱 촬영감독의 역할이 너무나도 중요했음을 말씀드리고 싶다.



4.


영화의 내용에 대한 부분이나 가볍게 웃을 수 있는 비하인드 스토리들로 지면을 채우지 못해 아쉽고 죄송하다. 누군가 어느 한 분이라도 영화를 찍는 과정 속에서 만든 이가 생각하고 고민했던 부분들이나 참회의 이야기를 통해, 이런 사람들이 그린 <아기와 나>가 어떤 모습일까 흥미를 가지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적어 내려갔다.


<아기와 나> 메인포스터


영화를 처음 시작한 이래로 나는 내가 만든 작품을 바라볼 때마다 아쉬운 부분들이나 실수한 부분들만 눈에 보여 대단히 괴로웠다. 창작을 하는 이들이라면 대개 자신이 이루어 낼 결과물에 대해 박한 평가를 내리는 게 일반적일 것이다.  <아기와 나>를 처음 완성하고 감상했을 때도 그랬다. 거창한 경력도 타고난 재능도 없는 내가 어렵게 완성한 이 작품이 충분히 만족스러웠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운 좋게 각종 영화제에서 <아기와 나>를 상영할 때도 나는 언제나 움츠러들고 땅만 쳐다보고 그랬던 것 같다. 그런 나에게 서울독립영화제에서 일하시는 한 선생님께서 어떤 말씀을 해주셨다.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들은 언제나 부족함에 대해 생각한다고. 

그러나 관객들을 만나고 세상과 만나는 순간에도 부족함 만을 생각한다면 그 부정적인 기운이 대중들에게 전달되어 좋지 않은 결과를 낼 거라고. 나는 이후에 그 말씀을 여러 번 머릿속으로 곱씹으며 생각했고, 점검하는 차원에서 <아기와 나>를 한 번 더 감상했다. 그 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우리가 좋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함께 최선을 다했던 모든 순간들은 정말이지 진심이었다는 것, 말 그대로 최선의 노력을 쏟아부었던 나날들이었다는 것이었다.


새삼스레 나의 첫 장편영화 <아기와 나>를 거짓 없이 사랑하고 관객분들께 자신있게 보여 드려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직 자식은 없지만 마치 자식이 있다면 그 소중한 존재를 대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그리고 영화를 보신 관객분들이 작은 영화를 만들며 모든 스탭/배우가 함께 이루고자 했던, 모두가 같이 바라본 그 비전을 같이 바라보실 수 있게 되기를. 기쁜 마음으로 바라고 기도해 본다.


끝.


영화 <아기와 나> 브런치 손태겸 감독님 편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화부터는 주연배우 이이경의 연재가 이어질 예정입니다. 많은 기대 부탁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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