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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Aug 11. 2021

막장까지 고속질주, 출구는 없다.

인생막장(2019)/방진호/카카오웹툰

수입도 변변찮은 날, 택시 기사 오진창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부산의 한 병원이었다. 병원에서는 그의 아버지가 곧 임종을 맞이할 거라고 했다. 오진창은 십 년 전 훌쩍 떠나버린 아버지를 찾아가야 하나 고민했다. 그 때 취한 여자가 조수석에 올라탔다. 오진창은 운영이 끝났다며 그녀를 물리쳤지만 그녀는 막무가내였다. 거기다 오진창이 부산에 갈 거라고 둘러대는 말을 듣고 그녀는 자신도 부산으로 가겠다며 우겼다. 그렇게 두 사람의 동행은 시작되었다.


오진창이 한서연을 손님으로 받지 않았다면 뒤이어 벌어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자기 앞날을 내다보는 사람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오진창에게 거부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인생을 망가뜨리는 불행이나 사고는 늘 그런 식으로 온다. 우리는 평소에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고 생각하고 살아가지만 그렇다고 '내'가 인생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주인의 허락 없이 쳐들어오는 불운만큼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도 없다. 그렇게 보면 인생 속에 불운이 끼어드는 것이 아니라, 불운 속에 우리가 어떻게든 자리잡고 '내 인생'이라는 영역을 마련하는 게 아닐까?


오진창과 한서연의 첫 번째 불행은 고속도로를 내달리다 만난 고라니였다. 택시의 바로 뒤와 양 옆에는 차가 달리고 있었다. 오진창은 못 피하겠다고 판단하고 그대로 달리지만 한서연은 동물을 칠 수 없다며 순식간에 핸들을 꺾어버린다. 결국 19중 추돌사고가 나고 피해를 입은 운전자들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달려들었다. 겁을 먹고 현장을 벗어난 둘은 그렇게 뺑소니범이 되었다.


그들은 곧바로 자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오진창이 아버지의 임종을 보려고 부산에 가려고 한다는 사연을 들은 서연이 마음을 바꿔 먹는다. 그녀는 자수는 언제든 할 수 있지만 아버지를 보는 건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며 그를 태우고 부산으로 차를 몰았다. 하지만 그들의 여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두 사람은 눈에 띄는 택시를 버리고 차를 얻어타게 되는데, 마침 나오던 뉴스에서 추돌 사고의 용의자로 오진창이 소개되고 있었다. 신분이 들통난 둘은 차가 멈춘 틈을 타 도망쳤고, 포상금을 노린 남자가 곧바로 쫓아왔다. 남자에게 붙잡힌 오진창은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했다. 그래서 한서연은 차를 몰아 남자를 쳤고 둘은 또다시 달아났다.


응급처치는 하고 떠났지만 하마터면 사람을 죽일 뻔한 행동이었다. 오진창은 한서연에게 따졌다. 꼭 그렇게 했어야 했냐고. 그러자 한서연은 대답했다. "그럼 그냥 멍청하게 당하고만 있어? 피해자는 우리라고!" 듣고 보면 틀린말이 아니다. 그대로 있었다간 속수무책으로 맞기만 했을 테니까. 그 상황에서 신체적으로 불리한 여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차로 치는 것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일로 경찰의 추적이 더 심각해진 것이 사실이다. 그들이 유일하게 취할 수 있는 구제 행위가 상황을 악화시켰다면 여기에 무슨 반성이 필요할까? 최선의 선택과 최악의 선택이 정확히 일치한다면 차라리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 것이 나은걸까? 그렇다면 사실상 두 사람에겐 아무런 선택권도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런 조건에서 두 사람이 저지른 일에 책임을 묻는다면 그 근거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


시련은 끊이지 않았다. 마침 한서연이 돈을 뽑으러 은행에 갔다가 이송차량에서 탈주한 수감자에게 인질로 붙잡혔다. 한서연이 기지를 발휘해 무사히 경찰들의 포위를 벗어나긴 했지만 이로서 동행자는 둘에서 셋이 되었다. 이용훈이 강도가 되기로 결심한 건 딸의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또한 궁지에 몰린 처지였기에 그런 극단적인 해결법 말고는 떠오르는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은행에 가기 전 그가 보여준 행동 중 눈에 띄는 것이 하나 있다. 그는 골목길에서 나오다 한서연과 부딪치는데 그 때 그녀의 지갑이 떨어졌고 한서연은 이를 눈치 채지 못하고 그냥 자리를 벗어나려 했다. 이용훈은 굳이 뒤돌아가는 그녀를 불러세워 지갑을 돌려주고 갔다. 은행을 털 계획을 세우면서 길에서 우연히 만난 여자의 지갑을 찾아주다니. 아무리 봐도 특이한 행동이다. 이 사소한 행동 때문에 독자는 그가 저지른 결과(강도짓)보다 그런 일을 저지른 계기에 초점을 맞춰 그를 바라보게 된다.


셋의 행적만 보면 앞뒤가 맞지 않지만, 역설적이게도 세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량하고 이타적인 성품의 소유자이다. 예를 들어 세 사람이 도주 중에 들른 여관에서 사이코패스에게 붙잡힌 할아버지와 손자를 구해주고 사이코패스와 몸싸움을 벌인다. 사실 그들이 누구를 도와줄 처지인가. 한시라도 경찰의 눈을 벗어나야지 목숨 걸고 사이코패스를 상대할 겨를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들은 눈앞에 당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외면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 오진창은 살인자가 되었다.


자신을 죽이려던 사이코패스에게 저항하다 저지른 살인이었다해도 오진창은 제 손으로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에 괴로워한다. 그리고 경찰은 그에게 살인죄라는 죄목을 추가했다. 그렇게 오진창은 온 국민의 질타를 받는, 아주 죄질 나쁜 범죄자 및 수배자가 되었다. 돌이켜보면 그가 범죄를 저지른 순간마다 그곳에는 선한 의지가 발동했다. 고라니를 살리기 위해 교통사고가 났으며, 한서연을 구하기 위해 남자와 몸싸움을 벌였고, 인질을 구하려다 사이코패스에게 칼을 내리꽂았다. 이처럼 〈인생막장〉이 보여주는 사건들은 제목에 걸맞게 과격하긴 하지만, 사실 잘해보려다 일을 망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다. 〈인생막장〉이 지닌 흡입력의 비결이 여기에 있지 않을까. 아무리 인물들을 극단적인 상황으로 내몰아도 그들은 늘 잘해보려고 했고, 만회하려고 했다. 그러한 마음만은 독자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만큼 더없이 일반적이다.


어느 순간부터 그들은 살기 위한 도주를 펼쳐야 했다. 한서연의 양부 한태수 회장이 그녀를 없애려고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했기 때문이다. 양부로서는 그녀가 없어져야 회사를 장악할 수 있었다. 그는 그 전부터 자신의 야욕을 감추지 않았다. 한서연을 정신병원에 감금한 적도 있었다. 한서연이 오진창과 처음 만난 날만 하더라도 그녀는 도망치는 신세였다. 거기다 부패한 경찰은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오진창에게 경찰을 죽였다는 누명을 씌우고, 모든 비난의 화살이 그에게 쏟아지도록 거짓으로 조사 결과를 발표한다. 이렇게 상황을 비교하고 보면 선을 넘지 않은 사람들이 없다. 오진창, 한서연, 이용훈, 차라리 이 셋이 가장 정상적으로 보일 지경이다. 우리 사회를 봤을 때도 그렇다. 누군가 선을 넘었다면, 이미 다른 사람들도 선을 넘었을 가능성이 크다. 선을 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오진창은 여자처자하여 아버지가 있는 병실에 도착한다. 거기서 오진창과 아버지의 감동적인 재회가 연출되었다면 이 작품의 매력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오진창은 생이 얼마 남지 않는 아버지 앞에서도 똑똑히 말한다.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생각해봤는데 아빠가 제게 해준 게 하나 있더라고요. 아빠같이 살지 말자. 아빠같은 인간은 되지 말자. 저 사실 이 말 하려고 왔거든요. 제 인생에서 당신이 있고 없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 없이도 지금껏 잘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거니까. 이제 와서 당신 편하자고 후회하는 척, 인정하는 척. 토 나옵니다. 되돌리고 싶어? 웃기지 마세요. 난 되돌리고 싶지 않아요. 당신과 달리, 모두 책임지고 죗값 받을 겁니다."


막장까지 다다른 인생을 보여주면서도 오진창을 막장이라고 부를 수 없는 건 실제로 그는 막장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으로서 갱생할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를 극한의 상황에서도 놓지 않았다. 그건 바로 인정이었다. 오진창의 아버지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야 과거의 행실을 후회했고 그것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했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잘못을 반성했다면 그래서는 안 됐다. 오진창처럼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하나도 빠짐없이 인정하고 그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했다. 


오진창은 갈 데까지 간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이 오진창의 자의였냐, 생각하면 쉽게 답하기 어렵다. 그는 막장까지 질주하며 쾌감을 느끼지 않았다. 매 순간 불안해했고 두려워했다. 되돌아보면 그는 누구보다 멈추고 싶은 사람이었다. 이러한 마음은 결말을 통해 잘 드러난다. 비리에서 떨어져 있는 유일한 경찰이었던 현 반장은 사건의 모든 진상을 밝히고 도주 중인 그들에게 자수를 권장한다. 너희가 한 일만 책임지면 된다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오진창은 한서연에게 이렇게 말한다. "우리 이제 멈춰도 된대."


한 단어로 그의 질주를 정의하자면 '도망'이 가장 잘 어울릴 것이다. 그는 잘못을 책임질 의지가 있었어도 계속 도망쳤다. 그의 잘못이 아닌 부분까지 책임지기가 겁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위협한 건 세상이었다. 부패한 경찰도, 악랄한 한 회장도, 그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이 그가 달아나도록 부추겼다. 그리하여 그는 추돌사고를 일으킨 순간부터 눈깜짝할 새 막장까지 다다랐다. 아무리 생각해도 추락의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은가? 왜 중간에 그를 구제해줄 바리케이트 하나 없었을까? 그런 점에서〈인생막장〉의 진정한 주인공은 오진창이나 한서연이 아니라, 그들을 구제하는 데에 실패한 사회라고 생각한다. 오진창, 한서연, 이용훈은 막장으로 향하면서도 위험한 순간마다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몸을 던져 서로를 구했다. 왜 막장 안에 있는 사람들끼리 위험을 감수하고 고통을 분담해야 한단 말인가. 누군가 막장 안에 갇혀 있다면 막장 밖에서 도움의 손길을 뻗쳐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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