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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Apr 29. 2021

초능력, 비운의 재능

위아더능력자!(2012)/손하기/네이버 웹툰

초능력은 흔히 선망이나 공포의 대상이 된다. 그래서 초능력을 지닌 자는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는 영웅이 되거나, 힘을 과시하는 악의 화신으로 묘사되곤 한다. 따라서 초능력자가 등장하면 액션이나 추격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위아더 능력자!'에서는 다르다. 지상최강고 능력자 특별반에 다니는 학생들은 제각각 신기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그것이 너무 소소해서 전혀 위력적이지 않다. 작가는 초능력에서 공격성을 쏙 빼내고 그 자리에 개그를 채워 넣는데 그게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주인공 북극성의 태몽은 크고 잘생긴 별이 쫓아오는 꿈이었다. 분명 비범한 꿈이었기에 북극성의 부모님은 아들이 큰 인물이 될 거라는 기대에 부푼다. 그러나 북극성은 단지 머리카락이 별 모양으로 자랄 뿐 특출 난 면모는 하나도 없었다. 이건 약과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독자의 기대를 배반해나간다. 한 마디로 '대단한 걸 바라지 마'라는 게 작가의 지론이다. 하지만 독자는 계속해서 기대를 품고 배신당하기를 반복한다. 핵심은 그 기대가 작가의 치밀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독자 내면에서 자연 발생한다는 점이다. 독자가 번번이 반전의 개그에 걸려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의미를 찾으려고 하는 건 이성의 본능이니까.


7화를 살펴보면 특별반 학생들이 '왜 이 학교는 능력자들을 모아놓은 걸까?' 하고 의문을 품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다 싸워서 최강자를 가리는 것 아닐까 하는 그럴듯한 의견이 나온다. 하지만 그들의 능력은 대결에 매우 부적합했다. 기껏 위협한다는 소리가 "내 머리는 별 모양이다!" 이거나 "나랑 붙는 녀석은 누구든... 신선한 제주 감귤 맛을 알게 될 테니....!"등 이었다. 결국 학생들은 담임 선생님에게 특별반의 의미를 묻게 되는데, 돌아온 대답은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다'였다. 허망할 정도로 불성실한 대답에 학생들은 할 말을 잃고 그렇게 에피소드가 끝난다.


허무함이 웃음을 유발하는 원리는 무엇일까? 그 답은 현실 속에 있다. 인생을 구성하는 수많은 경험을 살펴보면 기대 이상을 충족하는 것보다는 그 반대의 경우가 훨씬 많다. 성공보다 실패가 더 흔하다는 뜻이다. 허무함은 무엇을 하든 상상 그 이하의 결론을 얻었을 때 겪는 감정이다. 그리고 이 경험이 웃음과 연결된다는 건 많은 사람이 그 경험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허무 개그에 반응하는 웃음 속에는 또 다른 실패자를 발견한 '반가움'의 의미가 담겨 있다.


이상과 현실의 간극이 클수록, 작중 인물의 실패 규모가 클수록 웃음의 강도는 커지기 마련이다. 작가는 최대한 무의미한 결론을 찾아내어 독자의 예측을 벗어나야 한다. 이성의 경로에서 최대한 이탈해야만 독자는 긴장을 해소하고 편안히 웃을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이성이 꼭 웃음의 장애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애초에 이성의 사고 작용이 없다면 예상이 존재하지 않고 그렇게 되면 반전 자체가 성립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웃음이 무가치하고 경박한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웃음은 분명 이성의 산물이다. 참고로 움베르트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희극이라고 하는 것은 (중략) 실재보다 못한, 우리가 실재라고 믿던 것보다 열등한 인간과 세계를 그림으로써, 성인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 주는 것보다, 서사시보다, 비극보다 더 열등한 것을 그림으로써 진리에 도달하는 하나의 방법을 제시한다는 것입니다.」


반전의 장치를 이용할 때는 주의할 점이 있다. 소심하기보다는 과감해야 한다. 이른바 '정도'를 넘는 대담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만약 도출된 결론 속에 의미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독자는 인물에게 감정을 이입하며 오히려 슬픔을 느끼게 된다. 당연한 결과다. 실패 자체가 즐거운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희극적으로 보이게 하려면 확 거리를 둬서 독자를 객관적인 위치까지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희극과 비극이 밀접하게 연관된 사실은 어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를 찬양하는 축제 때 불리던 노래 코모스(comos)는 코미디(comedie)로 발전했고, 디오니소스에게 양을 바치며 부르던 노래 트라고스(tragos)는 비극을 뜻하는 트라제디(tragedie)로 발전했다.


한편 앞서 언급한 7화에서는 담임 선생님의 중요한 대사가 등장한다. "사실 나도 이 반에 대해 자세한 건 알지 못한다. 그저 일반 학급과 다름없이 지도하라고 했을 뿐." 그리고 9화에서는 특별반 학생들이 이렇게 불만을 토로한다. "특별반이라고 해서 기대하고 들어왔는데 딴 반이랑 별다른 게 없잖아요." 특별반을 특별하게 취급하지 않는 것은 이 학교 교장의 신념과 관련이 있다. 특별반을 맡은 박 선생은 초능력을 무척 싫어해서 심하다 싶을 정도로 학생들에게 무관심한데 교장이 번번이 사직서를 거절하는 바람에 교직에서 물러나지 못한다. 그런데 교장이 그를 붙잡아두는 이유가 바로 그 무관심이었다.


특별반 개설이 결정된 후 담임을 정하기 위한 회의가 있던 날, 그날도 다과로 송편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기억하십니까? 대부분의 선생님들이 한 개뿐인 분홍색 송편에 먼저 손을 가져가더군. 그리고 마지막까지 분홍색 송편이 남아 있던 접시는 박 선생님의 것뿐이었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특이하고 신기한 것을 보면 괜히 한 번 더 눈길을 주고 손을 뻗게 되지.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오. 하지만 송편은 이쑤시개에 찔리면 구멍이 뚫려버린다네. 아이들의 마음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오. -16화 중


생각해보면 특별반 학생들의 능력은 없느니만 못할 만큼 사람들에게 비웃음을 사기 딱 좋다. 별 모양의 머리에서 빛이 난다거나, 수염이 자라나서 자유자재로 움직인다거나, 방귀로 순간이동을 한다거나, 머리에 독수리가 달려 있다거나, 모든 음식에서 귤 맛이 나도록 만들 수 있다거나, 손이 닿으면 옷이 꽃무늬로 변한다거나, 딱히 '멋있다'라고 말하기 민망한 능력뿐이다. 누구도 그들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일이 없다. 심지어 일반 학생들은 그들에게 멸시의 시선을 보내기도 한다.


일반 학생들은 왜 그렇게 특별반 학생들을 싫어하는 걸까? 특별반 학생들이 눈에 띄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피해를 주거나 위협적인 것도 아닌데 말이다. 잘못은 특별반 학생들이 아니라 일반 학생들에게 있다. 일반 학생들은 특별반 학생들의 능력이 자신들의 기대에 훨씬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즉 모두에게 유익하게 쓰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을 못마땅해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초능력'에 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데, 초능력을 종종 훌륭함 또는 위대함과 결부시키는 것이다. 적어도 보기 좋지 않아야 한다는 이상한 기준을 갖고 있다. 초능력은 그 자체로 타자화하는 조건이 되고, 동질감을 나눌 수 없는 초능력자들은 또 다른 쾌감을 충족시켜야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받는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가차 없이 무리 밖으로 내던져진다.


특별반의 의미는 초능력을 가진 학생들을 특별하다고 불러주는 그 자체에 있다. 특별반이 없었다면 그들은 그저 이상한 아이들로 불렸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필요한 관용이 바로 이것 아닐까? 나에게 무익하다고 해서 이질적인 존재를 배척할 것이 아니라 특별한 존재로 받아들이는 것. 누군가 보통과 다르다고 해서 그자가 보통이 되어야 할 필요는 없는 법이다. '내' 눈이 편하게 하자고 그들이 바뀔 의무는 더더욱 없다. 그리고 세밀히 들여다보면 보통이 어디 있겠는가? 우리 모두 마음 한구석에 '이상함'을 감추고 있지 않은가?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화에 나온 교장 선생님의 대사는 꽤 의미심장하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흩어진 초능력 에너지는 세상을 떠돌다가 능력이 필요한 사람을 찾아갈 것이오." 그리고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토록 초능력을 혐오하던 박 선생에게 '수염력'이 생기면서 작품은 끝을 맺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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