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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Mar 23. 2021

이별 후엔 누구나 추방자가 된다

냐한 남자(2018)/올소/네이버 웹툰

길가에 버려진 채 비를 맞고 있던 흰 고양이(의 모습을 한 김춘배)를 보고 한보미는 연민을 느낀다. 그리고 어릴 적 같은 상황에서 맞닥뜨린 검은 고양이 '나비'를 떠올린다. 그때에도 그러했듯 그녀는 고양이를 집에 들인다. 그것이 동거의 시작이었다.

올ㅇ소

김춘배의 매력에 누가 당해낼 수 있을까. 그는 한보미의 순종적인 추종자가 되고 한보미는 그의 사랑스러운 매력에 푹 빠져든다. 주목할 점은 이 사랑의 시작이 '연민'이었다는 점이다. 연민과 사랑이 얼마나 다른지 작정하고 따져보면 의외로 찾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어쨌든 연민이 사랑이 싹트기에 아주 훌륭한 양분이란 건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똑같이 연민이라는 시작점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결말을 맞이한 나비(김춘배의 동생)는 어떻게 된 걸까.


나비와 김춘배 사이에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나비는 한보미의 연민을 이용했고 김춘배는 그러지 않았다. 나비는 그녀의 동정심에 기대어 자신의 악행들을 정당화했다. 비열하고 비겁한 행동을 들키더라도 사랑받고 싶었다는 솔직한 고백만 있다면 용서받을 거라고 기대했다. 그의 일그러진 보상심리는 한보미를 실망시켰고 당연하게도 그는 그녀의 선택을 받지 못했다. 내가 상처 받았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데 주저하지 않는 태도는 이해받아 마땅한 게 아니라 그저 무서운 것이다. 반면 김춘배는 한보미를 '걱정'하는 입장이었다. 자신의 처지가 아무리 난처하더라도 바보 같을 정도로 보미의 입장을 먼저 생각했다. 그렇게 그는 차근차근 한보미의 믿음을 얻었고 결국 그녀가 의지할 수 있는 위치까지 올라섰다.


김춘배는 한보미가 관심이 있거나 그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남자들을 모두 경계해야 했다. 이미 냥국에서 한 번 추방당한 경험이 있는 그는 버림받는 것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그는 무려 냥국의 왕자였다. 그것도 왕위를 계승받을 적장자. 하지만 왕의 추방 명령 하나에 속수무책으로 쫓겨나고 말았다. 그렇기에 그는 인간 세상에 내려온 후 늘 상대의 눈치를 살피며 쉽게 겁을 먹는 성향을 보인다.


한보미는 그와 비슷한 듯 달랐다. 김춘배가 나가라는 말을 들을까 봐 걱정하는 쪽이라면 그녀는 누군가 말없이 나갈까 봐 걱정하는 인물이었다. 한 마디로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떠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그녀가 8살 때 갑자기 집을 나가버린 '나비'가 남긴 상실감 때문이었다. 그녀는 김춘배가 말없이 가출을 했을 때 모든 일을 제쳐두고 사방으로 그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냥인과 멍인들의 신체적 능력에 맞서 그를 지켜줄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끝까지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이것만 보더라도 김춘배와 한보미가 더없이 잘 어울리는 한 쌍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 둘은 상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행동을 할 수 없는, 배신이 불가능한 사이였다.


보통 이별은 두 사람이 동시에 등을 돌리기보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관계를 끊어버릴 때가 더 흔하다. 이별 상황에서 떠나는 사람이 더 아플까, 남겨진 사람이 더 아플까, 라는 부질없는 저울질을 누구나 해봤을 것이다. 좀 허무하더라도 정해진 답은 어차피 둘 다 아프다는 것 아닐까? 만약 둘 사이에 물리적인 아픔의 차이가 존재한다면 사람들은 덜 상처 받기 위해 먼저 떠나려 하거나 끝까지 버티려 할 것이다. 하지만 이걸 두고 어떻게 현명한 선택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성숙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별 후 겪을 아픔에 겁을 먹고 있다는 당연한 전제를 인지하고, 관계를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품고 있는 두려움을 상쇄할 수 있는 믿음을 매일매일 보여주는 것이리라.

놈은 흑염룡(2009)/혜진양/네이버웹툰

이 작품 속에는 다양한 냥인, 멍인, 인간이 등장하는데 등장인물들이 관계를 다루는 방식이 모두 제각각이다. 맨 처음 한보미가 짝사랑했던 나남훈을 살펴보자. 멍인인 그는 냥인인 최민수를 사랑했다. 그의 사랑은 어긋난 충성심으로 발현된다. 최민수가 좋아하는 사람에겐 무조건적으로 친절하게 대하고 그녀가 싫어하는 사람에게는 이유 없이 폭력을 행사했다. 그녀의 부탁이라면 맹목적으로 수행했다. 이러한 방식이 결국 최민수를 행복하게 했는가, 묻는다면 아니라고 단호하게 답할 수 있다.


최민수에겐 냥국과 얽힌 마음의 상처가 있었는데 나남훈은 그녀의 상처를 조금도 보듬어주지 못했다. 심지어 그는 한보미에게 멋대로 최민수의 진심을 전달해버린다. 냥국 왕자들에 대한 복수도 대행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최민수의 편에 서서 모든 것을 혼자 해치워버렸다. 그리하여 최민수가 직접 상처를 딛고 일어설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해버렸다. 비율로 따지자면 최민수를 향한 그의 의존도는 100%였다.


그렇다면 최민수는 왜 계속 그를 곁에 두었던 걸까. 그녀에게 나남훈은 일종의 방패였다. 그와의 교제는 진심을 감추기 위한 위장술에 불과했다. 그녀가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진심은 한보미를 좋아하는 마음이었다. 그녀는 한보미가 다가오려 하면 날 선 태도로 일관했다. 특히나 한보미가 냥국에 관한 얘기를 꺼내기만 하면 더없이 차갑게 굴었다. 당연히 한보미는 최민수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오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나남훈에게 최민수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게 된다.


그때 한보미는 중요한 사실을 깨닫는다. 사람에 따라서, 진심을 묻는 것 자체가 상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자신의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최민수에게 섣불리 던진 질문들을 후회한다. 실제로 최민수는 한보미에게 마음을 들키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한보미를 좋아하는 마음 자체가 그녀에게 부담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결과 한보미와 최민수 사이에는 의존도 0%라는 어색하고 불편한 관계가 만들어졌다.


작품 속에서 가장 눈여겨볼 만 관계의 성장을 이룬 사람은 역시 한보미와 김춘배다. 두 사람의 관계는 김춘배가 일방적으로 한보미에게 의존하는 심각한 불균형에서 출발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김춘배는 갈 곳 없는 고양이였고 누군가 거둬주기 전까지 한없이 기다리는 처지였으니까. 그가 구조자인 한보미에게 전적으로 기대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다 점차 쌍방이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는데, 김춘배가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것을 그 계기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김춘배는 그녀의 손길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생활을 하면서 그녀를 배려할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성장은 김춘배가 냥국으로의 귀국이 결정되었을 때 태도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한보미는 남은 시간을 최대한 그와 쓰려고 하지만 김춘배는 그녀가 나비의 일에 마음 쓰는 걸 알고 무리하지 말라고 말하며 약속을 뒤로 미룬다. 이보다 더 괄목할 만한 성장은 그의 고백이다. 처음에 그는 그녀에게 부담이 될까 봐 이별이 정해진 상황에서의 고백을 망설인다. 하지만 남은 시간이 얼마 없기에,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하는 쪽으로 마음을 바꾼다.


이것이 최민수와 그의 가장 큰 차이점이다. 상대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아서 진심을 숨기는 태도는 얼핏 이타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정밀히 해부해보면 이기심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마련이다. 상대에게 그 마음을 받을지 말지 고려할 기회조차 주지 않기 때문이다. 상대의 진심을 알게 된 그 순간은 부담을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상대의 솔직함은 자신의 솔직함을 이끌어내게 되고 그 순간 올바른 선택을 내리게 한다.


김춘배와 한보미는 주변 사람들까지 천천히 바꿔 나간다. 이 작품의 매력 중 하나가 악역으로 등장한 인물들이 후반에 갈수록 개그 캐릭터로 자리 잡으며 새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악역으로 남는 사람이 없다. 초반에 김춘배를 구타했던 나남훈은 나중에 그를 보호하는 입장이 되고, 불순한 의도로 한보미에게 접근한 강이지는 자신의 목적을 포기한 채 진심으로 그녀를 대하게 되고, 왕위에 오르기 위해 김춘배를 납치하려던 김영철은 어느새 나비에게서 그를 지키는 입장이 된다. 무엇보다 그토록 김춘배를 싫어했던 나비는 결말에서 '모두의 행복'을 빌며 자신의 존재를 지우는 선택을 내린다.


이들이 입체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순정 덕분이다. 그렇다. 등장인물 모두 사랑하는 대상이 있으며 다들 지극한 순정파이다. 그렇기에 어느 한 명 빼놓지 않고 주인공에 필적하는 매력과 존재감을 발휘한다. 그래도 김춘배와 한보미가 주인공의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누군가를 향한 강력한 적대감이나 뿌리 깊은 원한이 없기 때문이다. 설령 본인이 상처를 받은 상황에서도 섣불리 부정적인 감정을 품지 않는다. 게다가 상대의 진심 어린 사과를 받으면 금방 용서한다. 좋은 뜻으로 마음이 단순하다. 이것만 보아도 관계의 진리를 확실히 알 수 있다. 추방의 경험은 누구나 있지만 증오는 개인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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