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줘서 고마워

방백남녀(2018)/고태호/네이버웹툰

by 남정은

여주혜와 민남주는 서로 첫인상이 좋지 않았다. 작은 오해는 또 다른 오해로 이어졌다. 만약 두 사람이 상대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면 오해는 없었을 것이다. 오해의 원인은 생각을 생각으로 남겨둔 것이었다. 회차마다 여자와 남자의 시선을 번갈아서 보여주는 진행 또한 두 사람의 소통이 막혀 있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


회차는 남자, 여자, 남녀 이렇게 세 가지 소주제로 나뉜다. 이러한 분류는 일종의 칸막이 역할을 한다. '남자' 회차에서는 민남주의 속마음만, '여자' 회차에서는 여주혜의 속마음만 보여준다. 그리고 '남녀'에서는 두 사람의 속마음을 모두 보여준다. 이렇게 순차적으로 인물의 내면을 확인하면서 독자는 속마음이라는 정보가 있을 때와 없을 때 상대를 이해하는 정도의 차이가 얼마나 다른지 깨닫게 된다. 다행히도 두 주인공은 차츰 대화를 나누며 상대를 이해하게 되는데 이를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장치가 바로 말풍선이다. 초반에는 생각을 보여주는 말풍선이 많이 등장하고, 후반으로 갈수록 말을 담는 말풍선이 늘어난다.


대화를 시작했다고 해서 두 사람의 소통이 늘 원활했던 것은 아니다. 왜 그랬을까? 대화는 이해의 도구일 뿐이다. 대화를 나눴다고 꼭 이해에 도달하란 법은 없다. 여주혜에게 집적대었던 학원 남자를 보면 그는 누구보다 말이 많았지만 여주혜와 가까워지긴커녕 강하게 밀려난다. 그가 여주혜에게 말을 건 이유는 그녀를 알고 싶어서가 아니라 환심을 사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민남주는 달랐다. 그는 여주혜와 오해를 풀고 화해하고 싶어 했다. 이런 태도에도 소통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은 민남주나 여주혜나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한다. 똑같은 한국어라도 어떤 인생을 살아왔느냐에 따라 어감과 의미가 달라진다. 예를 들어 화목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과 불화가 있는 가정에서 자란 사람에게 '집'이 갖는 이미지는 전혀 다르다. 앞사람은 '집에 가기 싫어'라는 말을, 뒷사람은 '집에 가고 싶어'라는 말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이처럼 똑같은 '한국어'를 사용한다고 모든 말에 같은 뜻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사전적 의미는 말 그대로 사전적 의미일 뿐이다. 그러니 두 주인공이 이해에 어려움을 겪은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전혀 접점이 없던 두 삶이 처음으로 한 지점에서 만났는데, 어떻게 상대의 선과 면까지 알 수 있을까.


민남주는 여주혜가 왜 성형수술을 했는지, 어쩌다 자기 얼굴에서 혐오의 감정을 느꼈는지 전혀 알지 못했기에 그녀 앞에서 연예인의 성형 수술을 두고 경솔히 발언했고, 여주혜는 민남주가 왜 축구 선수를 포기했는지, 그렇게 되기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몰랐기에 술자리에서 축구를 화제로 삼았다. 두 경우 모두 상대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한 반응을 보였다. 그리고 말을 꺼낸 사람은 상처를 받았다. 이럴 때 누구 잘못이라고 딱 잘라 말할 수 있을까? 사실 잘못한 사람은 없다. 사정을 알고 보면 양쪽 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입장이다.


두 사람은 상대의 과거를 알게 된 후에야 비로소 상대를 이해하게 된다. 상대의 표현을 내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해석하는 법을 배운다. 하지만 그렇게 되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다. 애초에 내 과거를 남에게 들려준다는 것은 무척 큰 용기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특히 과거에 깊은 상처를 받았다면 더욱이. 듣는 이가 내 말을 온전히 받아들일지, 듣고 나서 어떤 태도를 보일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치부를 드러낸다는 건 얼마나 큰 모험인가. 그런 의미에서 여주혜는 '진심을 말하는 것은 도박'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이 진심을 말하게 된 계기는 무엇이었을까.


결국엔 믿음이다.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싶다면 나는 널 다치게 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을 꾸준히 보여주고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 마음이 반드시 보답받으리란 보장은 없다. 판단은 상대의 몫이니까. 진심을 드러내는 것은 늘 어려운 문제이다. 그 속엔 상처받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 그렇기에 누구나 적당히 가식으로 자신을 보호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그것이 해결책은 아니다. 평생 진심을 숨기고 살아갈 수 있다면 인간관계는 한결 단순해질 것이다. 그 쉬운 길을 두고 굳이 누군가와 가까워지려 하는 까닭은, 사실은 나를 숨기기보다 있는 그대로 이해받고 싶은 마음이 더 크기 때문일 것이다.


두 사람이 상처받는 게 두려워서 상대가 자신을 오해하도록 내버려두었다면 관계는 거기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둘은 한 발 더 나아갔다. 상처가 꼭 약점이란 법은 없다. 상처는 타인을 이해하는 매개체가 되기도 하니까. 상처의 형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이해를 포기하는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나와 타인이 다르다는 건 소통의 기본 전제 아닌가.


흔히 우리는 잘 보이고 싶은 사람 앞에서 나를 꾸미곤 한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바라는 건 역시 꾸밈 없는 나를 인정해주는 것이다. 우리가 상처를 감추지 않고 드러낼 때부터 상처는 낫기 시작한다. 그러니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인생이라는 연극을 해나간다면 방백보다는 대화를 늘려보는 것이 어떨까. 나를 통해 남을 보고, 남을 통해 나를 보는 과정 속에서 누구나 조금씩 성장해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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