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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May 21. 2024

#10. 쿵짝 손님

    계산원으로 일하다 보면 유독 긴장되는 손님이 있고 마음이 편한 손님이 있다. 단순히 인상이나 옷차림 때문이 아니다. 내 생각엔 계산할 때 건네는 일련의 질문에 대답하는 방식과 속도에 달려있다. 처음엔 그 차이를 인식하지 못했다. 하지만 경험이 쌓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깨달았다. 결국 계산대도 의사소통의 자리라는 걸. 아무리 짧은 대화라도 서로 맞춰가는 노력과 눈치가 필요하다는 걸.


    어떤 손님은 시간이 금이라는 듯 내 말을 낚아채듯 대답하며 얼른 마트를 나가고 싶어했고 어떤 손님은 시시한 농담을 던지거나 엊그제 사간 단호박이 맛이 좋다면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전자의 손님 앞에서는 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져 허둥거리게 되고 후자의 손님 앞에서는 얘기를 언제까지 들어드려야 하나 고민에 빠지게 된다. 만약 모든 손님을 이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면 각각 적당히 대처하면 될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이 양극단 사이에 수많은 유형이 등장한다.


    한때는 계산원으로서 무조건 빠르게 계산을 끝내야 한다고 생각해서 쫓기듯 바코드를 찍고 다 찍자마자 회원 번호를 묻고, 수량이 많으면 담아갈 종량제 봉지가 필요한지 묻고, 카드, 현금, 상품권, 카카오페이, 계좌이체 등 손님이 고르신 결제 방식대로 계산을 마쳤다. 내가 봐도 좀 서두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 속도를 편안해 하시는 손님 비율이 꽤 높았기 때문에 굳이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이 시기 내가 간과한 점이 있었다. 내가 말하는 속도나 손놀림이 빨라지면 손님도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다는 것이다. 내가 계산을 빨리 끝낼수록 만족하는 손님이 있는가 하면 꼼꼼하게 산 물건을 확인하고 차분히 장바구니에 담고 싶어하는 손님도 있다. 그런데 계산원이 번갯불에 콩 볶아먹듯 계산을 끝내고 다음 손님 물건을 찍기 시작한다? 어쩔 수 없이 밀려나듯 계산대를 떠나야 한다. 계산은 돈을 다루는 행위이다. 부랴부랴 해치우면 누군가는 불안함이 생긴다. '제대로 계산한 거 맞나?'


    손님은 차근차근 상품별 가격을 화면하며 물건을 담고 있는데 재촉하듯 회원 번호를 묻고, 어서 지갑을 꺼내라는 듯 총 금액을 말하는 나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니 뒤늦게 낯뜨거워졌다. 손님을 해치워야 할 귀찮은 일거리 즈음으로 여긴다고 오해를 사도 할 말이 없는 태도였다. 사실 이런 반성을 하게 된 계기가 있다. 한 번은 동작이 굼뜨고 자그마한 손님이 오셨다. 아침에 잠깐 비가 왔다가 그친 상태라 한 손엔 접힌 우산이 들려 있었다. 나는 여느 때와 같이 재빨리 계산을 마치고 손님이 물건을 다 담을 때까지 기다렸다. 손님은 우산 손잡이를 계산대에 걸쳐놓고 주섬주섬 접힌 장바구니를 꺼내 천천히 펼치셨다. 그런데 가벼운 천 재질인 장바구니가 엉켜서 잘 펴지지 않았다. 나는 도와준답시고 손을 보탰는데 손님은 멋쩍게 웃으면서 "괜찮아요. 제가 할게요."라고 연달아 말씀하셨다. 그 말을 듣고 손을 떼면 됐는데 무슨 생각이었는지 난 도움의 손길을 거두지 않았다.


    급한 성질은 제동이 잘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상대방이 부담스러워하는 걸 눈치도 못 채고 '얼른 담아서 시간을 아껴 드려야지.'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끝끝내 내 손으로 장바구니를 다 펼쳤다. 손님이 가시고 십 분쯤 있다가 옆에 있던 점원이 전화를 받았다. 우산을 놓고 갔는데 나중에 찾으러 갈 테니 잘 챙겨달라는 내용이었다.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그 손님의 우산이 그대로 걸려 있는 걸. 나 때문에 정신이 사나워져서 우산도 놓고 가셨구나 생각하니 뒤늦게 죄송한 마음이 밀려왔다. 이어서 내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왜 그랬지?'


    이제 손님이 계산대에 물건을 놓는 것만 봐도 그 사람의 성향이 짐작이 간다. 이 손님은 좀 빠르게 계산해야지, 혹은 좀 천천히 해야지. 이런 예상은 거의 빗나가지 않는다. 또 달라진 점은 전에는 POS기 화면만 보면서 이것저것 물었다면 이제는 손님이 뭘 하는지 보면서 질문을 던진다. 지갑에서 카드가 빠지지 않아 낑낑대고 있으면 일부러 주변을 정리하는 여유를 부리며 손님의 조급함을 덜어드리고, 정차해 놓은 차가 신경 쓰여서 자꾸 밖을 돌아보면 민첩함을 최대한 끌어올려 단숨에 계산을 끝낸다.


    우리는 다 다른 속도로 살아간다. 생각하는 속도, 움직이는 속도가 저마다 다르다. 주변은 살피지도 않고 제 속도로만 밀어붙이면 누군가 마음 상할 일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상대의 속도를 감지하고 거기에 맞추다 보면 즐거운 박자가 생긴다. 내가 하루에 손님 이백여 명을 상대하며 얻은 교훈이다. 미리 약속한 듯 쿵짝쿵짝 제때 질문과 대답이 오가고, 카드를 주고 받는 타이밍까지 손발이 척척 맞는 손님을 만나면 그렇게 보람차고 기분 좋을 수가 없다. 그게 우연이 아니라 서로를 살뜰히 관찰하며 만들어낸 결과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손님도 같은 걸 느끼시는지 나가실 때 "인상이 참 좋으세요."라거나 "좋은 하루 보내세요."라는 말을 해주신다. 이러니 내가 계산원을 그만둘 수 없다. 같은 말을 수백 번 반복하는 일인데도 자꾸 새로움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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