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구름 May 12. 2024

#9. 익명의 손님

    드라마나 영화를 보면 너무한다 싶은 진상 손님이 등장인물로 종종 등장한다.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미세한 불쾌함을 선사한 손님은 흔했지만, 작품에서 묘사하듯 경악할 정도로 상식 밖의 행동을 하는 손님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중 가장 전형적인 진상에 가까운 손님을 소개하자면 이렇다. 때는 테마파크 기념품점에서 일할 때였다. 머리숱 빈약하고 통통한 몸집의 중년 남성과 늘씬한 몸매에 화장품 냄새를 진하게 풍기는 이십대 중반 여성이 팔짱을 끼고 매장 안을 둘러보고 있었다. 남성은 양복 차림, 여자는 딱 붙는 원피스에 하이힐 차림이었다. 테마파크에 영 어울리지 않는 옷차림은 물론 연인이나 할 법한 다정한 둘의 행동에 매장 안 직원이 다들 힐끔거리며 둘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이내 여자 손님이 자기 몸만한 곰 인형을 골랐고 어쩌다 보니 계산대 근처에 있던 내가 계산을 맡게 되었다. 남자가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나에게 건넸는데 두세 번 해봐도 결제가 되지 않았다. 잔액이 부족한 건 아니었고 카드 회사 전산상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매뉴얼 대로 정중하게 다른 결제 방법을 권유해 드렸다. 그런데 남자는 이게 안 될리 없다며 대뜸 언성을 높였다. 강성한 태도에 다시 시도하는 시늉이라도 해봐야 할 것 같아서 재차 결제해봤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정확한 해결방법을 알아보고자 손님에게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재빨리 점장님을 찾으러 갔다.


    점장님에게 대답을 듣고 나서 다시 계산대로 돌아왔을 때, 일이 터졌다. 자리를 비운 건 겨우 이삼 분 남짓이었는데 남자 손님은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사람을 왜 이렇게 기다리게 하느냐고 매장이 다 울리도록 고함을 쳤다. 거기에 이어서 하는 행동이 가관이었다. "내가 이깟 인형도 못 살 것 같아? 현금으로 주면 될 거 아니야!"라면서 지갑에서 지폐 뭉치를 꺼내 계산대에 집어던지는 게 아닌가. 그 순간 남자의 행동이 너무도 비상식적이고 비현실적이어서 나는 말문이 막힌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남자는 그런 나에게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아느냐며 쉴 새 없이 쏘아붙였다. 결국 점장님이 나오셔서 사태를 마무리했고 그 날의 장면은 시간이 지나도 좀처럼 잊히지 않았다. 당시 동료들은 분명 졸부라서 인정 욕구가 과한 거라고 우스갯소리를 하며 날 위로했지만 그날을 생각하면 여전히 답답하다. 그 남자는 어디서 자신이 무시당했다고 느낀 걸까? 내가 어떻게 했어야 그런 상황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그밖에 나에게 인격 모독 같은 막말을 한 손님, 자신의 잘못을 내 무능으로 뒤집어 씌운 손님, 계산원을 손님에게 봉사하는 하인쯤으로 생각하는 손님 등 크고 작은 상처를 남긴 사람들은 하나같이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런 사람들의 언행은 아무리 오래 고민해도 이해할 수 없었고 그래서 억울함은 깊어만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결심했다. 더는 안 좋은 기억을 곱씹지 말자.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들은 백 분의 일, 아니 천 분의 일에 지나지 않는다. 왜 한낱 점에 지나지 않은 사람들을 끝없는 밤하늘만큼 머리에 이고 있었을까. 내가 진정 생각해야 할 손님들은 어떤 인상도 남기지 않고 떠난 손님들이었다. 아니 온 듯 다녀가소서라는 금언을 실천하듯 나에게 바람처럼 스쳐간 수많은 손님들이야말로 매일매일 되새기며 감사해야 할 분들 아닌가.


    계산원은 누구나 알바로 도전할 수 있는 일이어서 개인적인 경험을 공개했을 때 공감을 쉽게 얻는 편이다. 그래서 그런지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글이나 만화 같은 창작물을 공유하는 분들이 많은데 참새가 방앗간 못 지나간다고 나도 종종 찾아 보곤 한다. 그런데 씁쓸하면서도 아쉬운 점이 있다. 대부분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사례를 소재로 삼고 다같이 누군가를 욕하게 만든다. 물론 사례 속 진상으로 등장한 인물 대개가 욕 먹어도 지당한 사람이라는 점은 나도 동의한다. 속상한 마음에 사람들의 위로를 받고 싶어하는 마음도 십분 이해한다. 


    하지만 정작 진상들은 그런 작품을 보며 자기 행동을 반성하지 않고, 일반적인 공감 능력과 사회성을 갖춘 선량한 사람들만 사연을 보고 열받아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런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내 욕심 같아선 평범해서 기억에도 안 남는 익명의 손님들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작품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다. 진정한 배려는 상대방이 모르게 하는 것이라는 말도 있다. 그러니 나 또한 손님들이 해주는 배려를 무심코 받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리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라고 해도 대부분 사람들은 기본적인 양심을 장착한 보통의 범주 안에 들어간다는 점을 매일 되새기다 보면 우리 마음이 더 튼튼해지지 않을까. 나 또한 어디서든 손님이 되었을 때는 존재감 없는 익명이 되어야지 그렇게 다짐해 본다. 


매거진의 이전글 #8. 괜찮은 손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