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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May 09. 2024

#8. 괜찮은 손님

    계산원으로 일하면서 입에 붙은 말이 있으니 바로 "감사합니다."이다. 행복해지려면 감사 일기를 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일기 쓰는 게 귀찮다면 계산원으로 일하는 걸 추천한다. 내가 일하면서 한 말만 다 세어도 나는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행복한 사람이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신할 수 없는 이유는 자연스럽게 우러나와 한 말이 아니라 업무 중 하나로 반사적으로 내뱉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입에 붙었는지 상황에 맞지도 않는데 나도 모르게 "감사합니다."라고 말해놓고 손님도 나도 어색했던 적이 있다.


    시쳇말로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고 하는데 감사하다는 말도 똑같다. 솔직히 손님이라고 모르지 않을 것이다. 직원이 으레 하는 말이라는 걸. 그래도 형식적으로라도 하는 게 안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계산하는 시간이 아무리 짧다 해도 감사하다는 말이 있을 때와 없을 때 그 순간 분위기는 아예 달라진다. 계산원으로서 생각해봐도 감사하다는 말을 내뱉음으로써 저 분은 돈을 내고 상품을 사가는 손님이라는 점을 다시금 상기하게 되어 일하는 마음가짐에 영향을 준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은 "감사합니다."와 또 다르다. "감사합니다."는 계산이 끝나고 모든 손님에게 건네는 말이지만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일은 애초에 많지 않다. 사실 죄송하다고 말하는 상황이 아예 없는 게 가장 낫다. 감사하다는 말을 할 때는 의식적으로 상냥하고 친절한 말투를 쓰는 편인데, 죄송하다는 말은 그런 계산 없이도 미안함과 난처한 감정이 실린다. 예를 들어 상품 불량으로 환불이나 반품을 하러 오신 분이라면 번거롭게 재방문한 손님의 기분을 헤아려 죄송하다는 말과 같이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 드린다. 이때는 죄송하다는 말이 한 번으로 끝난다. 반면 내 잘못으로 직접 손님에게 피해를 끼치면 나도 모르게 "죄송해요."라는 말이 여러 번 튀어나온다.


    마트에서 일하면 무거운 물건을 들어올 일이 잦아서 수시로 팔에 힘이 쑥 빠진다. 하루는 어떤 손님이 다른 물건과 같이 초밥을 두 줄 들고 오셨는데 각각 바코드가 붙어 있었다. 나는 별 생각 없이 바코드를 다 찍었는데 화면에 뜬 가격을 보던 손님이 이상한 걸 느끼고는 두 개 사면 할인되는 거 아니냐고 물었다. 나도 대강 알고 있던 내용이지만 확실히 하기 위해 손님에게 양해를 구한 뒤 초밥을 들고 수산 코너에 가서 물어봤다. 손님의 말이 맞았다. 수산 담당자님이 할인가가 적용된 바코드를 새로 붙여 주셨고 나는 서둘러 계산대로 돌아왔다.


    마음이 급한 게 탈이었을까. 바코드를 찍으려고 초밥 용기를 들어올렸는데 하필 그 때 팔힘이 빠져서 들고 있던 걸 놓치고 말았다. 초밥 용기는 정확히 위아래가 바뀐 채 떨어졌고 나는 재빨리 원상복귀를 시키며 사과부터 드렸다. 그리고 다른 걸로 가져가시라고 권해 드렸다. 하지만 손님은 별 표정 변화 없이 이렇게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먹으면 다 똑같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다 똑같겠는가. 애초에 그 상태로 진열되어 있다면 누구도 고르지 않았을 초밥인데. 손님이 화난 기색 없이 담담한 어조로 말하니 오히려 죄송한 마음이 커졌다. "그래도…."라고 말끝을 흐리며 다시 초밥을 확인해 보니 연어초밥 위에 있던 크림이 뚜껑에 묻어 지저분해 보였다. 나는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내뱉었고 손님은 그때마다 "괜찮아요."라는 말로 오히려 나를 위로하셨다. 애초에 자신이 지적하지 않았다면 할인가로 사지 못했을 상황에 계산원이 초밥을 망가뜨렸는데도 그분은 시종일관 차분했다. 


    누군가 죄송하다고 했을 때 괜찮다고 대답해야 상대 마음이 편하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 의례적인 말도 듣기 어려운 요즘이다. 빈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다들 지쳐 있는 걸까. 예의상 하는 말이라고 하면 어딘가 가식적이라고 여기는 분위기인데 다르게 보면 말 그대로 예의를 지키는 말이다. 좀 의례적이면 어떠랴.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는 그 노력이 누군가에게는 감동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데. 솔직히 내가 그랬다. 그 손님이 정말 무던한 성격이라 초밥 좀 망가져도 상관 없었는지, 딸뻘인 나를 가엽게 여겨서 다독이고 싶었는지 모르겠지만 괜찮다고 말한 그 손님이 나에겐 참 괜찮은 어른으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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