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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May 06. 2024

#7. 문밖의 손님

    내가 네 번째로 일한 편의점은 주택가 골목에 있었다. 오전이 되면 맞은편 주민센터 직원들이 와서 원두커피를 사갔고, 초등학교 아이들은 하굣길에 들러서 컵라면이나 소시지 따위를 사먹었다. 오후 시쯤 되면 공업사에서 일하는 분들이 담배를 사갔고, 저녁 일곱시 되면 술집 직원이 출근 길에 들러 핫식스 같은 에너지드링크를 사갔다. 여기까진 아무 문제가 없었다. 저녁 여덟 시가 가까워지면 어쩔 수 없이 예민해졌는데 어김없이 찾아오는 한 취객 때문이었다.


    편의점은 24시간 열려 있는 곳이다. 이런 특성상 취객을 심심찮게 보게 된다. 어차피 한 번 보고 말 사이에 뭐라고 하든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이지만 같은 손님이 주기적으로 찾아온다면? 일을 관둬야 하나 심각하게 고민할 정도로 스트레스가 커진다. 이 취객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에게 하이파이브를 하자며 손을 들어올렸다. 나도 참 어리숙했던 게 처음엔 뭣도 모르고 어정쩡한 웃음과 동작으로 허공에 하이파이브를 해주었다. 이런 미적지근한 대처가 화근이었다. 다음 날은 나에게 이름을 물었고 그 다음 날은 전화번호를 달라며 휴대전화를 내밀었다. 내가 안 된다고 하자 "아, 여기는 술집이랑은 또 다른가?" 하고 혼잣말을 했다.


    내가 점원으로서의 친절을 걷어내고 무표정으로 대하자 어느 날부터는 나에게 먹을 걸 사주며 환심을 사려 들었다. 맛살, 핫바, 요거트 등을 하나씩 집어올리며 "이거 좋아해?" 하고 물어보면 나는 다 싫다고 일관했다. 내 대답과 상관없이 그는 자기가 집은 걸 계산대로 가져왔고 내가 안 먹는다고 하면 자기가 먹을 거라고 했다. 하지만 계산이 끝나고 나면 꼭 두고 갔다. 안 받겠다고 가져가시라고 해도 막무가내였다. 가까이 가기도 싫은 사람인데 살까지 부비며 억지로 그 사람 주머니에 넣어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손님이 돌아가면 나는 그가 남기고 간 것을 다 버렸다. 그러다 마음먹고 단호하게 "어차피 놓고 가셔도 다 버려요."라고 말했더니 그제야 말귀를 알아듣고 사주는 걸 멈췄다.


    나는 내심 그가 그만 오기를 바랐지만 아무리 냉랭하게 대해도 그가 발길을 끊는 일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돌발 행동을 보였다. 갑자기 계산대 안으로 들어와서 내 옆에 바짝 붙어 서는 게 아닌가. 나는 뒷걸음질치며 나가라고 경고했다. 급한 마음에 "여기 CCTV로 점장님이 다 보고 계세요."라는 말까지 튀어나왔다. 그 말 때문인지 마침 들어온 다른 손님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아쉬운 듯 뒤돌아섰다. 그 이후로도 실랑이는 계속되었고 나는 바짝 긴장한 채 긴급신고 버튼 위치를 수시로 확인했다. 새로 들어온 손님도 심상찮은 분위기를 눈치채고 곁눈질로 상황을 살폈다. 마음 같아선 대놓고 도움을 요청하고 싶었지만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술냄새를 풍기긴 했어도 그가 나에게 직접 해코지를 한 것도 아니고 욕설을 내뱉은 것도 아니라 3자가 끼어들기 어정쩡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20대에 선량해 보이는 남성이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겐 힘이 되었다.


    하지만 안심은 오래 가지 않았다. 새로 들어온 손님은 볼일을 마치고 편의점을 나갔다. 또 취객과 단 둘이 매장에 남는 상황이 되자 온몸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상상은 점점 최악으로 치달았고 당장 경찰에 신고를 해야 하나 갈등이 계속되었다. 그러다 문밖을 봤는데 좀 전에 나간 손님이 그대로 서 있는 게 아닌가. 누군가 기다린다기보다는 계속 이쪽 상황을 지켜보는 것 같았다. 나와도 눈이 두어 번 마주쳤다. 나는 취객을 상대하면서 밖을 힐끗거렸고 그는 문밖을 서성대며 한참 고민하다가 어느 순간 사라지고 없었다. 다행히 취객도 지속되는 냉대에 지쳤는지 내일 보자는 달갑지 않은 인사를 남기고 매장을 나갔다.


    드라마나 영화였다면 남자 손님이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하고 바로 끼어들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에서 나와 아무 상관 없는 사람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런 오지랖을 부리기란 무척 힘든 일이다. 더구나 신체적인 추행 없이 시덥잖은 농담만 던지는 상황이라면 나설지 말지 고민이 더 깊어질 수밖에. 나는 그 손님이 머뭇거리며 상황을 지켜본 것만으로도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내가 엿본 망설임만으로도 그는 충분히 선량한 시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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