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시대, 나의 시대

by 남정은

도서관에서 책을 대출하고 돌아서는데 걸걸하면서 나이 지긋한 목소리가 날 멈춰세웠다.

"방금 그거 뭘로 한 거예요?"

키가 크고 살집이 거의 없는 남자 분이셨다. 억실억실한 인상에 밤빛 옷차림이 깨끔했다.

내가 모바일 대출증을 쓰는 걸 보신 모양이었다.

"아, 그건 도서관 앱을 설치해서…."

그분은 내 설명을 듣고 곧장 휴대전화를 꺼내시더니 앱 스토어를 찾아 이리저리 화면을 밀었다.

"미안한데 대신 좀 찾아줄 수 있어요?"

나는 휴대전화를 받아 들고 화면을 훑어보았다.

아이콘이 크기도 하고 앱 가짓수가 많아서 페이지가 여럿이었다. 나조차 몇 번 헤맨 다음 스토어를 찾았다.

앱을 내려받은 다음엔 계정을 등록할 차례였다. 그 과정에서 대출증의 일련번호를 입력해야 했다.

"혹시 대출증 갖고 계세요? 바코드 보시면 밑에 작은 숫자가 있는데 그걸 여기다 쓰시면 돼요."

그분은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망설임 없이 열네 자리 숫자를 입력했다.

나도 모르게 "우와"하는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이걸 어떻게 외우고 계세요?"

그분은 별일 아니라는 듯 성그레 웃더니 "그 다음은요?"하고 물었다.

그렇게 순조로이 모든 절차를 마친 뒤 대출 현황, 대출 이력 등을 확인하는 기본적인 사용법을 알려드렸다.

그분은 틈틈이 나에게 건넸던 말을 또 한 번 꺼내셨다.

"고마워요."

인사를 드리고 돌아오는 길에 나는 누군가를 도와줬다는 뿌듯함을 느낄 새도 없이

먼 앞날의 나를 막연히 그려보았다.

내가 언젠가 나이 들어서 처음 보는 젊은이에게

자네가 누리는 편리함을 나에게도 알려달라고 부탁할 수 있을까.

혹시나 필요할까 봐 내게 주어진 무작위 숫자들을 다 외우고 다닐 수 있을까.

아니, 앞날까지 갈 필요도 없었다.

지금의 난 어떤가. 새로운 기술이 나오면 못 본 척 고개부터 틀어버리지 않는가.

어찌된 영문인지 나는 10대부터 최신이라는 말이 전혀 반갑지 않고 피곤하기만 했다.

오죽하면 카카오톡조차 버티고 버티다 친구들의 성화에 등떠밀려 가입했다.

숨가쁜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가긴커녕 대놓고 뻗댄 꼴이다.

솔직히 말하면 새로운 것에 우르르 쏠리는 사람들의 관심이 못마땅했다.

무턱대고 남들을 따라하자니 세상에 휩쓸리는 기분이었다.

난 그냥 나만의 속도로 가면 그만이라고 꿋꿋이 덤덤한 태도로 세상의 변화를 지켜보았다.

그런데 언뜻 고고해 보이는 이런 태도가 전에 없던 이상한 말버릇를 불러왔다.

제꺽하면 '요즘'으로 말꼬를 시작하는 것이다.

특히 '요즘 사람들'이 자주 튀어나왔다. 요즘 사람들은 이러쿵저러쿵. 나는 꼭 남의 시대를 사는 것처럼.

그러다 초등학생한테 '옛날 사람'이라는 소릴 듣고 왈칵 울기가 솟았다.

아닌데. 나도 요즘 사람인데.

열 살이든, 스무 살이든, 마흔 살이든, 일흔 살이든,

이 순간 삶을 꾸려가고 있다면 엄연히 요즘 사람 아닌가?

우스웠다. 아등아등 시대의 변화를 거부해놓고 옛날 사람이라는 소리는 듣기 싫어서

속으로 변명하는 꼬락서니가.

세상의 변화에 무심한 건 자랑이 아니었다.

나를 둘러싼 세상과 언제고 서름하게 지낼 순 없었다.

나이 들어 낯선 기계 앞에서 절절매다가 마음씨 좋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누구도 도와주지 않아 허탈하게 돌아서는 안쓰러운 늙은이가 되는 것도 원하는 바가 아니었다.

모든 일에 능숙하진 않아도 일상이 덜컹거리지 않게 살아가려면 내가 먼저 알아봐야 했다.

질문하는 어른이 되어야 했다.

지난날은 망각으로 덮이고 앞날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이래저래 잘 모른다는 변명이 통하지만

내가 몸담은 현재를 잘 모른다는 건 어떤 말을 대어도 다 핑계였다.

호기심으로 가득한 아이의 눈망울이 똘망똘망하듯 세상을 궁금해하는 사람은 눈빛부터 달랐다.

내 수수한 눈에는 왜 이리 개맹이를 엿볼 수 없는지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세상을 나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설보는데 무슨 힘이 실릴까.

실망했던 기억은 잠시 밀어두고 설렘을 품은 채 새로 올 날을 맞이하는 마음만 간직한다면

나이드는 모습이 그렇게 초라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리 나약한 나라지만 끝까지 업혀가지 않겠다.

여긴 남의 시대가 아니라 나의 시대니까.

일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