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by 남정은

달력을 보고 문득 흘러간 시간을 인식할 때면

"그동안 난 뭘 했지?"라는 질문이 가슴을 옥죈다.

그때마다 나는 휴대전화 사진첩을 둘러본다.

친절하게도 사진을 찍은 연, 월, 일, 시각까지 나와 있으니까.

이를 단서로 특별하지 않은 사소한 추억을 하나둘 되짚다 보면

생각보다 꽤 알차게 시간을 보냈다는 생각이 들고 이내 불안이 잠잠해진다.

그래서 길을 걷다가도 별 이유 없이 풍경 사진을 찍는 습관이 생겼다.

언젠가 불안에 떨 나에게 남기는 선물이다.

다만 내 얼굴을 찍을 일은 거의 없다.

스스로 내 모습을 찍는 게 너무 어색하다.

렌즈에 잘 보이려고 애쓰는 내 모습이 간사해 보이고, 알량해 보이고,

한심하고, 심한 날은 가증스럽기까지 하다.

'실없이 웃긴 왜 웃어.'

분명 20대 초반엔 어딜 가든 툭하면 카메라 앞에 섰고 낯가림 없이 방실방실 잘 웃었다.

그런데 그때 찍었던 사진이 지금 한 장도 없다.

20대 중반의 내가 저지른 만행이다.

한때는 지나간 모든 순간을 소중히 여기고 간직하려 했고

한때는 지나간 모든 순간을 한 톨도 남김 없이 지우려고 했다.

한때는 모든 순간이 내 존재를 증명한다고 여겼고

한때는 모든 순간이 내 실수를 보여준다고 여겼다.

아무리 그래도 분서갱유도 아니고 사진을 죄다 삭제해버리다니.

20대 중반에 대단한 각오, 그러니까 지난 날은 모두 잊고 새 출발을 하겠다고

다짐한 모양인데 왜 그렇게 거창한 의식을 치렀을까.

어차피 또 삐끗할걸 사진은 좀 내버려두고 출발하지. 그렇게 무거운 것도 아닌데.

그러다 처음으로 연애다운 연애를 시작했고 나는 또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인화한 사진을 사진첩에 정성스럽게 모아놓고서 뿌듯함에 도취되었다.

하지만 연애가 끝나면서 사진첩은 그대로 쓰레기통에 처 박혔다.

그렇게 내 역사가 또 한 번 사라졌다.

나는 왜 자꾸 사진을 없애려는 걸까.

어렴풋이 의도를 떠올려 보면 사진이 나를 조롱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한치 앞도 모르고 해맑게 웃고 있는 내가,

기껏 그 감정은 순간인데 영원에 갇혀 버린 내가

어지간히 억울하고 불쌍했다.

그렇게 행복하지 않았으면서 애써 조짐을 무시하고

사진 때문에 웃고 있는 내가 보기 싫었다.

가짜. 그래. 가짜와 거짓에 세찬 거부감이 일었다.

한번은 여권 사진을 찍으러 갔는데 새삼 내 얼굴이 못나 보였다.

생김새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있으니 절대 무표정으로 지내면 안 되겠다,

헤픈 웃음으로 못난 얼굴을 가려야겠다는 다짐이 더욱 강해졌다.

웃으면 그나마 인상 좋다는 얘길 들었으니까.

그러다 사진 기사님이 손본 최종 사진을 봤는데 헛웃음이 나왔다.

눈에 띄게 비뚤었던 입매는 수평을 이루었고

선크림을 바르지 않은 형벌로 무수히 생긴 잡티와 주근깨는 흔적을 감췄다.

이래서 사진이 싫었다.

적나라하게 나를 마주하기도 싫고, 조작하는 건 그것대로 싫고,

이러나저러나 내가 싫어지니까.

그런데 약 이 년 전부터 의무적으로 내 모습을 남겨야 할 일이 생겼다.

아동센터에 봉사를 나가면서 봉사 활동 기록을 사진으로 남겨야 했다.

처음엔 사진을 찍는 게 부담스럽고 귀찮았는데 나중에 사진을 쭉 몰아보니까

이렇게라도 찍힌 기록이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속 나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과 다를 때가 많았다.

나조차 오해하고 있던 내 얼굴을 사진은 단번에 바로잡아 주었다.

때로는 사진 속 내가 낯설어서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어떤 표정 안에서 나는 사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자 사진에 강퍅하게 굴었던 내 태도가 좀 머쓱해졌다.

카메라 앞에서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웃음에 그토록 치를 떨었건만

이제 와서 그 웃음에 위로 받고 있다니.

어쩌면 그 웃음은 예쁘게 찍히려고 카메라에 아양 떠는 게 아니라

미래의 나를 알아보고 짓는 반가움의 표시 아니였을까.

그렇다면 나도 할 일이 있다.

언젠가 이 순간을 뒤적일 미래의 나를 위해 너그러이 카메라 앞에 서는 것.

'나 잘 지내고 있어. 너도 그러고 있지?'하고 안부를 건넬 수 있다면

어색함 따위 무시하고 얼마든지 웃어주리라.

추억 보정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전에 무척 마음에 들었던 사진이 떠오른다.

해질녘 갈대밭인지 억새밭인지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이다.

스물둘, 셋 그때만의 풋풋하고 수줍은 눈웃음이 나중에 봤을 때도 참 예뻤는데

앞서 말했던 그 분서갱유로 지금은 전혀 볼 길이 없다.

어쩐지 나이를 먹을수록 그 사진이 그리워지는데

갈수록 더 어슴푸레 떠오르니 하릴없는 노릇이다.

이젠 사진 속 나와 겉으로나 속으로나 너무 달라져서

사진 속 나를 너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만약 다시 볼 수 있다면 너에게 사과하고 싶다.

좋아하는 일을 찾겠다고 홀로 서울로 떠난 너를,

아무 두려움 없이 순간을 즐기며 젊음을 누렸던 너를,

조금만 호의를 보여도 쉽게 마음을 내주어서 위험했지만 정작 본인은 태평했던 너를,

이제는 정확한 장소와 날짜도 모르는 곳에 홀로 내버려온 기분이다.

넌 그렇게나 예쁘게 웃었는데.

일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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