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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Feb 28. 2021

이보다 화통할 순 없다

열불 로맨스(2019)/홍치/네이버 웹툰

17세 소녀 불화자는 몸에 열이 많아 일 년 내내 불쾌지수 100에 달하는 조건에서 살고 있다. 한겨울에도 반팔, 반바지 차림으로 다니면서 땀을 흘릴 정도다. 이런 저주받은 체질 탓에 그녀는 성격이 불 같다. 늘 짜증을이 나 있고, 걸핏하면 성질을 부리며, 심기를 거슬리는 것에는 폭력으로 응수한다.


그녀의 인성은 말 그대로 최악이다. 싸가지없다는 소리를 밥 먹듯이 들으며 일단 시비가 붙으면 인정사정 보지 않고 응징해버린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성격 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한 요소가 전혀 없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밉지 않은 호감형이다. 작가가 코믹 요소를 잘 버무려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그녀의 난폭함이 어느 정도 무마된 것도 있지만, 근본적으로 그녀의 단순하고 직선적인 성격에서 기인한 부분이 더 크다. 그녀는 숨기거나 감추는 것이 없고 순간의 감정에 솔직하다. 한마디로 그녀는 위선이 없다. 열이 펄펄 끓는 고통 속에서는 그런 걸 부릴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인물들의 노골적인 적대 관계가 펼쳐진다. 양아치들이 이유 없이 내보이는 멸시부터 연적을 향한 질투, 사연 깊은 앙심까지 종류도 다양한 각종 다툼들이 주축이 되어 서사가 진행된다. 일단 주인공인 불화자의 파탄난 성격 자체가 화근이라서 원한 관계가 생기는 건 식은 죽 먹기다.


이런 직관적인 대립 구도 덕에 작품의 인상은 전반적으로 강렬하면서도 개운하다. 어떠한 비유나 위조 없이 미운 걸 밉다고 온 힘을 다해 표출해내는 에너지가 어찌나 시원시원한지 부정적인 감정조차 상쾌하게 느껴질 지경이다. 그 누구도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섣불리 인내하지도 않으며 직설적으로  증오를 드러낸다. 이 내숭 없는 화끈함 앞에서 독자는 무장해제된 채 깔깔 웃음을 터트리게 된다.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타고난 기질이나 이름에 따라 성격과 개성이 부여된다. 그리고 이 기질 사이에는 우열이 따로 없다. 궁합이 존재할 뿐이다. 따지고 보면 좋은 성격, 나쁜 성격이라는 건 사회가 정해놓은 가장 이상적인 구성원의 모습에 얼마나 부합하느냐에 따라 구분될 뿐이고 이 구분은 꼭 개인 대 개인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되진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다 맘에 들어해도 내 맘엔 안 드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다 배척해도 나에겐 더없이 잘 맞는 사람일 수도 있다. 솔직히 때와 경우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화를 내서 사이코 소리를 듣는 불화자나, 만인에게 친절하고 유순하여 누군가에겐 만만하게 보이기까지 하는 차한서의 성격을 비하하자면 한없이 비하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두 사람에겐 그런 성격이 서로에게 반하게 되는 매력으로 작동했으니 좋은 사람이란 결국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줄임말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 작품은 상식 밖의 진행과 표현으로 명백히 병맛 코드를 발동시킨다. 하지만 그 안에 맥락이 있다. 황당함을 선사하면서도 중심은 지키고 엄숙함을 파괴하면서도 진심은 충분히 전달한다. 어쩌면 정통 병맛을 즐기는 사람에겐 병맛을 첨가한 짝퉁으로 보일 수도, 정통 서사를 즐기는 사람에겐 감상을 방해하는 상식 밖의 전개로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어느 정도 정제된 병맛을 병맛 만화의 후퇴가 아니라 진보인 이유는 단 하나로도 충분하다. 완전 날것이 아닌 어느 정도 질서를 입혀놓아도, 병맛은 여전히 재미있다.


2010년대에 병맛 만화가 인기를 끌며 엄연히 한 장르로 자리 잡을 때 많은 전문가들이 이에 대한 비평을 내놓았다. 예를 들어 이중석 대중문화평론가는 "드라마·만화 등 웰메이드 문화가 쌓여가는 요즘, 반대로 어설픈 낙서나 그림을 보며 웰메이드가 주는 완전무결함에서 해방된 재미와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 같다."며 "경기침체로 젊은이들에게 패배자라는 정서가 강해졌는데, 스스로를 병맛으로 규정하는 이들이 늘고 있다는 증거"라고 평가했다. 초기 병맛 만화들은 기승전결의 형식적인 틀을 거부하고 상당히 과격한 변주로 독자들의 웃음을 유발했다. 거기에 타협은 없었다. 갈 데까지 간다는 식으로 극한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최근 등장한 병맛 만화들은 어느 정도 기존의 서사구조를 따르며 안정성을 추구하고 있다. 이를 기성세대의 질서에의 항복이나 구식으로의 회귀로 볼 수는 없다. 나태한 정신에서 비롯된 타협은 더욱 아니다. 오히려 병맛이 논리조차 포용할 수 있음을 과시하는 쪽에 가깝다. 이는 단순히 병맛의 색채를 옅게 한다고 얻어지는 결과물이 아니다. 병맛이 일으키는 재미의 효과와 작동 원리를 직관적으로 이해하고 통제할 줄 알아야 한다. 이제 병맛은 자기 비하가 체화된 패배자들의 어두운 향유물이 아니다. 패배자들이 기존의 잣대에 정면으로 대들면서 자신이 이길 수 있는 게임의 규칙을 새로이 주창하는 떳떳한 외침이다. 기성세대가 이룩해놓은 전통에서, 전형성이 가져다주는 지루함은 거부하면서 인과율이 가져다주는 안정성만 차용하는 선택적 취합으로, 이제 우리는 병맛에서도 완성도를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불화자의 화끈한 성격 덕에 이 작품 속엔 독자가 애써 참아줘야 하는 답답한 서사가 없다. 가장 빠른 길이 빤히 보이는데 오로지 극적인 절정을 위해 돌고 돌아가며 밑그림을 그려나가는 단계가 통으로 생략되어 있다. 불화자는 참는 법을 모르는 듯 모든 상황을 정면 돌파해버린다. 다소 난폭한 방식 때문에 주변 인물들과 잦은 갈등이 생기긴 하지만 대신 빠르고 간단하게 풀린다.


겉으로는 불화자가 모든 불화의 원흉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꽤 안전한 사람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그녀는 순간의 화를 억누르지 않고 그때 그때 터트리기 때문에 성질은 더러울지 몰라도 악독한 수준으로 진화하진 않는다. 가장 위험한 인물은 자신의 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흉악한 저주를 거는 지훈의 할머니와 보살 루시퍼, 그리고 저주를 사주한 목금란이다. 이들 때문에 애먼 불화자만 타들어가는 고통 속에 시달리게 되고 덩달아 주변 인물들까지 피해를 겪는다.


화라는 것이 삭힌다고 삭힐 수만 있다면 마음속에 꽁꽁 감추는 것이 맞다. 그러나 풀리지 않은 화는 방치하면 할수록 독해지고 위험해진다. 그럴 바엔 잠깐 미친 X 소리를 듣더라도 체신이나 위신 따위 벗어던지고 불화자처럼 염X도 해보고 지X을 부리는 게 더 건강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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