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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Jul 25. 2021

내가 아닌 나를 꿈꾸다

라일락 200%(2019)/아니영/네이버웹툰

살다보면 누군가를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기서 자연스럽게 뒤따라오는 행동이 있으니 바로 모방이다. 그렇게라도 욕망을 대신 채우는 것이다. 물론 완벽히 만족하는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모방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특징이지 그 사람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되는 것과 가지는 것은 엄연히 다르기에 모방의 끝은 언제나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끝을 안다고 해서 어디 욕망이 좌절되던가? 이렇듯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로망을 대신 채워주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 영혼 바꾸기라는 설정이다. 영혼이 뒤바뀐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상대의 몸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완벽한 모방 아닌가?


알다시피 영혼 바꾸기 서사에서 결말은 원래대로 되돌아오는 것으로 끝난다. 여기서 ‘원래대로’의 표현을 조심할 필요가 있다. 이는 원래의 몸으로 돌아온다는 것이지 모든 것이 원래의 상태와 동일하다는 뜻은 아니다. 일단 이 얘기는 뒤로 미뤄두고 어째서 바뀐 몸의 새로운 주인이 되지 못하는지부터 생각해보자. 《라일락 200%》에서는 연하늘이 진분홍이라는 몸을 얻음으로써 그토록 좋아하던 아이돌 로빈과 연애를 시작한다. 전부터 진분홍을 좋아하던 로빈은 갑자기 태도가 바뀐 진분홍에게 위화감을 느끼지만, 그녀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는 행복에 빠져 애써 의심을 잠재운다. 만약 연하늘이 진분홍의 인생을 완벽히 빼앗을 작정이었다면 그녀는 로빈에게 자신의 마음을 표현해서는 안 됐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연하늘이 진분홍으로 살아가는 데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애초 연하늘이 ‘내가 진분홍이었으면’이라고 생각한 계기는 로빈과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연하늘은 완벽한 진분홍이 되기보다 본인의 방식대로 행동해나가고 결과적으로 진분홍을 연기하는 데에 실패한다.


여기서 알 수 있는 점은 내가 아닌 존재가 되고 싶다는 욕망은 설사 그것이 충족된다 하더라도 긍극적으로는 주체가 원하는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연하늘이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진분홍의 행동을 그대로 답습했다고 생각해보자. 아니 더 나아가 본인이 연하늘이라는 것도 잊고 진분홍 그 자체가 되었다고 해보자. 그렇게 되면 ‘진분홍이 되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지워지기 때문에 연하늘은 진분홍이 되었다는 사실에 어떠한 만족도 경험할 수 없다. 반대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연하늘이 자신의 욕망을 충실히 따르며 로빈과 연애를 했을 때, 그녀는 로빈이 진분홍을 좋아하는 것이지 진짜 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씁쓸함을 느낀다.


영혼이 바뀌기 전 연하늘과 진분홍은 둘 다 ‘내’가 아닌 존재를 꿈꿨다. 연하늘에겐 로빈이라는 동경의 대상으로부터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진분홍에겐 현실의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욕구가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영혼이 바뀐 걸 알게 된 후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바뀐 몸으로 얻은 새로운 자아는 그들의 꿈을 현실로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두 사람은 별 다른 혼란 없이 새로운 환경과 역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특히 연하늘은 ‘진분홍보다 나은 진분홍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을 품으며, 진짜 진분홍은 그저 운이 좋았기에 지금껏 인기를 누려왔다고 생각한다. 연하늘이 이렇게 자신만만한 이유는 그녀가 봤을 때 진분홍의 성격은 최악이었기 때문이다. 연하늘과 진분홍은 중학교 동창으로 한 때는 더없이 가까운 친구였다가 서로에게 상처만 남긴 채 사이가 틀어지고 말았는데, 연하늘은 이를 진분홍의 성격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진분홍의 외모와 인기에 본인의 성격을 더하면 더없이 완벽한 진분홍이 될 거라고 여긴다.


이 지점에서 연하늘이 진분홍을 얼마나 피상적으로 바라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연하늘에게 진분홍은 타고난 외모와 이에 자연스럽게 따라붙는 인기가 아니면 별다른 게 없는 사람이었다. 진분홍보다 노래 실력이 뛰어났음에도 가수 데뷔에 실패한 경험이 그러한 인식에 일조했을 것이다. 연하늘은 진분홍의 불행한 가정사를 다 이해하지 못했고, 그러다보니 진분홍이 왜 그렇게 욕심을 부려 성공하고자 하는지, 어떤 것들을 감당하며 아이돌 생활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연하늘의 생각과 반대로 진분홍은 스스로 ‘노력으로 얻은 거 외엔 하나도 없’다고 여겼다. 그녀가 보기엔 연하늘이야말로 ‘노력으로 만든 건 하나도 없’고, ‘운 밖에 없는’ 인생의 주인공이었다. 연하늘의 어머니는 주식 천재에, 사업가이자 건물주였고, 아버지는 다정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다. 24살이라는 나이에 경제관념 없는 백수임에도 연하늘이 좋아하는 아이돌을 마음껏 덕질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이 부유하고 화목한 가정이 있기에 가능했다. 비록 연하늘 본인은 백수라는 것에 자격지심을 느꼈을지언정 진분홍이 보기에 그것은 배부른 투정일 뿐이었다.


이렇게 나란히 상황을 놓고 보면 연하늘과 진분홍의 사이가 멀어진 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연하늘은 본인보다 실력도 떨어지고 준비 기간도 짧은 진분홍이 먼저 가수로 데뷔하는 것을 보며 좌절했고, 진분홍은 연하늘의 집에 놀러가서 그녀의 부모님을 만난 후 자신의 가족이 얼마나 어그러진 사람들인지를 깨닫는다. 한 마디로 둘에게 상대는 나의 결핍을 깨닫게 해주는 사람이었다.


다만 결핍을 대하는 태도는 사뭇 달랐다. 먼저 연하늘은 로빈이라는 아이돌이 주는 사랑에 도취되어 당장의 고통을 회피했다. 그녀의 열렬한 동경심은 현실의 결핍을 뒤덮고도 남았다. 이런 방법은 진분홍에게 불가능했다. 그녀는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현실에 얽매어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을 초라하게 만드는 연하늘을 ‘짜증나게 구는 스타일’에 ‘찢어지게 부자에 나한테 열등감을 가진’ 사람으로 치부해버린다. 나의 결핍을 돋보이게 하는 상대를 끌어내림으로써 결핍의 크기가 줄어든 것처럼 자기 최면을 거는 셈이다.


이러한 방법이 영원히 유효할 수 없음을 깨닫는 건 두 사람이 몸이 바뀐 이후이다. 진분홍이 된 연하늘은 그토록 좋아하던 로빈으로부터 “지금까지 단 한 순간도 누나를 좋아하지 않은 적 없어요.”라는 고백을 듣는데, 이때 로빈은 진분홍의 몸속에 다른 사람이 들어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한 말이었다. 이를 너무도 잘 알고 있던 연하늘은 충격을 받고 그동안 자신이 로빈에게 바랐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되돌아본다. 그녀의 결론은 ‘그저 춤추고 랩하는 로빈을 보는 게 행복’했을 뿐 ‘이런 TMI는 모르고 싶었’음을 확인한다.


이번엔 진분홍의 변화를 살펴보자. 그녀는 연하늘의 단짝 친구 임찬의 도움을 받아 연하늘을 연기해나간다.(임찬은 거의 한눈에 연하늘이 전과 달라진 걸 눈치챈 인물이다.) 진분홍은 임찬이 연하늘을 대하는 모습을 보고 그가 연하늘을 짝사랑하고 있음을 단번에 눈치 챈다. 진분홍은 연하늘이 로빈과 붙어다니는데 불안하지 않느냐고 묻고, 임찬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연하늘 마음을 자신이 어떻게 할 수는 없다고 대답한다. 이 때 진분홍은 “너나 연하늘이나 물러터졌어. 의지라는 게 없어. 이래서 있는 집 자식들이랑,”하고 말을 하려다 삼킨다. 진분홍은 임찬을 통해 과거의 연하늘을 보고 있었다. 진분홍은 임찬과 연하늘의 관계를 통해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 연하늘이 얼마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줬는지 떠올린다. 그리고 단순히 부자라는 이유로 연하늘의 진심까지 외면해버린 과거의 못난 자신을 돌아본다.


진분홍이 깨닫는 것 중 또 하나 중요한 점은 몸이 바뀌기 전에도 진분홍은 ‘진분홍으로’ 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채 소속사에서 상품 취급을 받으며 정해진 컨셉을 따라야 했다. 그러다 몸이 바뀐 이후에는 연하늘을 연기하며 살아야 했는데 이는 이전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러한 깨달음이 중요한 이유는 후자의 경우 내가 다른 사람을 연기한다는 분명한 자각이 있었지만, 전자의 경우에는 본인이 연기를 하고 있다는 인식이 희미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연하늘이 됨으로써 꾸며진 진분홍에서 해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다른 사람을 연기하면서 비로소 내가 된다는 역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꼭 진분홍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연하늘은 진분홍이 되기 전까지는 ‘진분홍의 상품성’이 사람들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고, 중학생 때 포기한 줄 알았던 가수라는 꿈을 여전히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몰랐다. 왜 우리는 자신도 잘 모르면서 자꾸만 남이 되려고 할까. 아니 어쩌면 나를 모르기에 남이 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따지고 보면 남이 되어본다는 건 그렇게 특이한 일도 아니다. 사람의 일생이 그렇다. 누구나 살다보면 아이였다가, 어른이었다가, 늙은이가 된다. 후배였다가 선배가 되기도 하고, 자식이었다가 부모가 되기도 한다. 남에게 배우는 입장이었다가 남을 가르치는 입장이 되거나, 돈을 빌리는 입장이었다가 빌려주는 입장이 될 수도 있다. 손님이 되었다가 사장이 되고, 팬이었다가 가수가 되는 일도 생긴다. 몸이 바뀐다는 만화적 설정이 설득력을 얻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현실에서는 만화처럼 시간을 건너뛰어 곧바로 남의 자리를 차지할 수는 없지만, 인생을 길게 보면 예전에는 결코 알 수 없었던 상대방의 입장이 되는 날이 꼭 찾아온다. 그리고 뒤늦게 우리는 깨닫는다. 아, 그 때 내가 모르던 세상이 이런 거였구나.


그렇게 점점 자신을 찾아가던 연하늘과 진분홍은 주위 사람들로부터 다른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받게 된다. 아무리 두 사람이 철저히 연기를 하더라도 본래의 자신을 완전히 숨기기는 어려웠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특히 두 사람과 가장 가까운 사람들, 연하늘의 엄마나 소꿉친구인 임찬, 오랫동안 진분홍을 짝사랑해온 로빈은 직관적으로 당사자가 아님을 알아챈다. 그러나 정체가 탄로난 것을 위기라고 단정 지어서는 위험하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그 누군가 아무리 나를 잘 흉내 내어도 모방할 수 없는 나만의 것이 있다는 뜻이니까. 가장 나다운 것은 그 누구도 따라할 수 없고 뺏길 수도 없다면 얼마나 안심되는 일인가.


초반부만 하더라도 연하늘과 진분홍은 서로의 인생을 뺏는 것처럼 얘기했다. 분명 둘 다 상대방의 인생을 더 탐냈다. 하지만 위기가 닥쳤을 때 연하늘은 진분홍에게 끝까지 연기하면서 살자면서 “불행한 건 우리 둘로 충분하잖아.”라고 말한다. 그토록 원하던 진분홍이 되어놓고도 연하늘은 그렇게 말한 이유는 아무리 노력해도 영원히 나로 인정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녀는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한다. 그녀의 이러한 선택은 한 가지 중대한 사실을 우리에게 시사한다. 우리가 겪는 가장 큰 고통은 남처럼 될 수 없다는 게 아니라 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점이 있다. 《라일락 200%》는 남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가 가진 것을 소중히 하라는 고루한 교훈을 말하는 작품이 아니다. 만약 그랬다면 연하늘과 진분홍이 본래의 몸을 되찾은 뒤, 연하늘은 돈과 가족의 소중함을 아는 사람이, 진분홍은 대중에게 사랑받는 것에 감사하는 가수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연하늘은 부모님의 지원 없이 고시텔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진분홍은 솔로 앨범이 보장된 기존의 소속사를 나와 체리걸스 멤버들과 함께 하는 길을 선택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이 새로 갖게 된 소원이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연하늘은 실용음악학원에서 오디션 공고를 보고 2차 합격을 목표로 삼고(단지 백화점 상품권 10만원이 필요해서), 진분홍은 매니저가 이제 막 시작한 아담한 신생 회사에서 재기를 꿈꾼다. 몸이 바뀌기 전 그녀들을 떠올려보자. 진분홍은 연하늘의 부유하고 화목한 집안을, 연하늘은 진분홍의 예쁘장한 외모와 대중적인 인기를 부러워했다. 이러한 바람은 어떠한 노력으로도 이룰 수 없는 헛된 소망이었다. 하지만 결말에 이르러 두 사람이 품은 소망은 이전보다 훨씬 규모는 작아졌을지언정 노력 여하에 따라 얼마든지 달성할 수 있는 것으로 바뀌었다. 이 얼마나 뜻깊은 변화인가. 성공을 하든 실패를 하든 그 결과가 그녀들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이 이렇게 짜릿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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