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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Aug 09. 2021

자신이 물고기인 줄 알았던 인어공주

고래별-경성의 인어공주(2019)/나윤희/네이버웹툰

〈고래별〉의 배경은 1926년 일제강점기이다. 하지만 이러한 암울한 시대 아래 살아가면서도 수아는 아무런 불만이 없다.  친일 세력인 여가의 몸종인 그녀는 ‘그저 삼시 세끼 밥이나 먹고, 지붕 아래 잘 수만 있으면 그만’이었다.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그녀가 모시는 아가씨 윤화이다. 5살에 여가네로 팔려온 수아는 또래인 아가씨가 없었다면 다른 곳으로 팔려갔을지도 모르는 신세였다. 그렇기에 수아에게 아가씨는 자신이 필요한 유일한 존재, 물고기인 자신이 떠날 수 없는 물과 같은 존재였다.


수아는 우연히 독립운동단체 결사단의 일원인 의현의 목숨을 구해준다. 의현은 그런 수아에게 인어공주 같다는 말을 한다. 까막눈이었던 수아는 인어공주가 무엇인지 알아듣지 못했고 의현은 그것이 반은 사람이고 반은 물고기인 공주라고 알려준다. 수아는 나 같은 공주가 어디 있어, 라고 생각하면서도 그의 말을 잊지 못한다. 수아에게 의현과의 만남은 여기서 의미가 있다. 지금껏 자신이 물고기라고 생각했던 그녀는 의현으로 인해 처음으로 자신을 인어공주에 대입해본다. 인어공주는 완벽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게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였다. 인어가 아닌 물고기 공주였다면 아예 사람이 되고자 하는 꿈도 꾸지 않았을 것이다.


이후 수아는 의현의 부탁을 받고 쪽지를 해수에게 전하려다 의거 계획을 엿듣게 된다. 해수는 수아가 일본군에게 신고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녀에게 조달(양잿물)을 먹이고 그 일로 수아는 목소리를 잃게 된다. 인어공주 서사와 비교했을 때 이 사건은 큰 차이가 있다. 인어공주는 사람의 다리라는 확실한 대가를 위해 자의로 목소리를 잃었지만, 수아는 온전히 타의에 의해 그것도 아무 보상도 보장받지 못한 채 목소리를 잃었다. 하지만 이 경험은 수아가 군산을 벗어나 경성으로 향하는 동기가 된다. 인어공주로 치면 바다에서 육지로 나가는 셈이다.


수아는 자신의 목소리를 앗아간 해수 원망하며 복수를 꿈꾼다. 이 감정은 의현을 향한 그리움과 대등한 크기로 그녀의 마음에 자리 잡는다. 의현과 해수는 결사단 동지로 광복이라는 공동의 목표를 갖고 있었다. 다만 성향은 달랐다. 의현은 자신의 신분을 감춰야 하는 상황에서도 일단 조선인을 만나면 신뢰를 보냈고, 해수는 의거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에 조금이라도 위협이 되는 사람은 곧바로 적으로 돌렸다. 수아가 결사단의 은신처 고래별에 합류하게 되면서 두 사람을 향한 수아의 감정은 차츰 뒤섞인다. 그녀는 의현을 통해 해수를 보고, 해수를 통해 의현을 본다. 두 사람 모두 목숨을 내걸 만큼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은 똑같았기 때문이다.


해수는 일본을 향한 분노, 조선인으로서의 무력감을 원동력으로 삼아 앞으로 나아가는 인물이다. 그에 반면 의현은 조선을 향한 사랑이 원동력이었다. 흥미로운 점은 두 사람의 원동력이 상대에겐 무용하거나 해로운 요인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해수에게 조선인을 향한 애정은 의거를 방해하는 요소에 지나지 않고, 의현에게 조선인으로서의 무력감은 현실에 굴복하여 좌절하게 만드는 원인이다. 이 두 인물이 합일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수아이다. 앞서 말했듯 수아는 해수를 향한 분노, 의현을 향한 사랑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해수와 의현을 대표하는 두 가지 감정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곧 의현과 해수가 결국 해방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다. 수아라는 통로를 통해 두 사람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동지가 아니라 서로를 보완하는 동지로 거듭난다.


그렇다고 수아가 경성으로 향하는 데 두 사람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다. 그 역할을 한 사람은 바로 그녀가 모시던 아가씨 윤화였다. 윤화는 아버지가 강요하는 정략결혼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그녀는 죽기 전 수아에게 떠나라는 말을 남긴다. “꼭 멀리 가. 그래야 돼. 네가 뭔지 잊을 수 있을 만큼 멀리.” 이러한 그녀의 당부 덕에 수아는 물고기라 믿었던 자신을 잊고,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후기에서 나윤희 작가는 고래별에 담긴 은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수아=인어공주, 의현=왕자, 이웃나라 공주=조선, 고래=조선의 독립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 혹은 수탈당한 조선 그 자체’ 여기서 고래는 찻집 이름으로 쓰이기도 했으며, 의현이 바닷가에서 발견되기 전 수아가 발견한 죽은 고래를 가리킨다. 그 장면을 보면 자연스레 고래를 의현의 비유로 생각하게 되는데 의현이 바다 생물에 비유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그래야 결말에 드러난 수아의 운명이 특별한 의미로 읽히기 때문이다. 작품 후반 수아는 의현을 대신해서 의거를 치르며 ‘당신은 언젠가 애달픈 이의 품에 안기시오.’라고 생각한다. 여기서 애달픈 이는 해방된 조선을 뜻한다. 즉 수아는 자신의 몸을 던져 왕자와 이웃나라 공주를 연결시켜준 셈이다.


그렇다면 수아는 한낱 물거품이 되어 의미 없이 생을 마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그녀가 의사를 대신 치르지 않았다면 그 일로 의현이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수아의 궁극적인 목표는 독립운동보다는 의현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었다. 바다 생물이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 당연히 바다, 그러니까 물이다. 다시 말해서 수아는 물거품으로 사라진 것이 아니라 바다 그 자체가 되었다고 봐야 옳다. 수아와 의현이 함께 물속에서 헤엄치는 꿈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의현이 헤엄칠 수 있는 바다가 되어준 수아의 사랑은 그 어떤 사랑보다 고귀하고 아름다우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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