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두려움의 형상

괴물아기(2021)/이상윤/다음웹툰

by 남정은

《괴물아기》는 괴물의 아기를 일컫는 것이 아니다. 작품을 보고 나면 그것이 괴물이라 불리는 아기를 뜻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핵심은 아기가 아니라 아기를 괴물이라 부르는 이들, 아기를 괴물로 만드는 사람들이다. 괴물 아기가 싸우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인위적인 유전자 조작으로 신체적 능력이 극대화된 강화 인간들이다. 괴물 아기와 강화 인간 모두 욕망의 폭발로 탄생한 결과물인데 한쪽은 괴물, 다른 한쪽은 강화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이 이야기의 고민은 거기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가족과 친구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한 채 갈 곳을 잃은 호는 현 박사 일당에게 속아 호순의 새로운 먹이로 감옥에 던져진다. 호는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 중 처음으로 아기인 모습의 호순을 발견하고, 그곳에 널린 사체 조각들이 호순의 짓이라는 걸 까맣게 모른 채 그녀를 안아 든다. 자신을 받아주는 곳이 없었던 호와 어디로도 도망치지 못했던 호순의 첫 만남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호순이는 현 박사의 지시 아래 감옥에 갇혀 하루하루 남자들을 살육하고 있었다. 현 박사의 목표는 호순이를 더 강력한 살인 무기로 키워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호순이는 괴물의 모습으로 사람을 먹었다가도 괴로워하며 속을 게워내기를 반복한다. 자신을 보고 기겁하며 무기를 휘두르는 사람들의 모습은 호순에게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호는 달랐다. 그는 호순을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안아 들었다. 그를 본 후 반사적으로 괴물로 변하려던 호순은 그의 순수한 선의로 인해 아기인 상태를 계속 유지하게 된다. 그러다 강화 인간이 호순을 죽이러 감옥에 들어오고 그가 호를 죽이려 하자 호순은 괴물로 변해 호를 보호한다. 처음엔 호가 호순을 보호의 대상 여겼다가 이번엔 그 반대가 된 것이다. 이렇듯 호와 호순은 현재 상황이 얼마나 끔찍하고 절망적이든 간에 자기보다 약한 사람을 보호하려는 공통된 태도를 보인다.


호와 호순은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산동네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중 ‘덩치’로 불리는 사람이 호순이 괴물로 변해서 누렁이를 죽이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는 언젠가 자신도 공격당할 거라는 두려움에 호순을 공격하게 되고 호순은 어쩔 수 없이 괴물로 변해 그 자를 죽인다. 그 일로 인해 마을 사람들이 호순의 정체를 알게 되고 호순은 도망치듯 마을을 떠난다. 주목할 점은 마을 사람들의 태도가 급변한 시점이다. 호순이 괴물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마을 사람들은 호순을 예뻐하며 친절하게 대했다. 호순 또한 마을 사람들을 해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호순은 상대로부터 살의를 비롯한 강력한 적대감을 느낄 때만 괴물의 모습을 드러내 왔다. 이런 점을 봤을 때 마을의 평화를 해친 것이 호순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오히려 마을 사람들의 두려움이 더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었을까?


사실 마을 사람들 중 가장 먼저 호순의 정체를 눈치챈 것은 마을의 수장 격인 눈먼 할머니였다. 그녀는 앞을 보지 못하지만 사람들의 과거를 꿰뚫어 보는 신묘한 인물이었다. 덩치가 호순을 죽이기 전 그는 할머니를 찾아가 왜 그런 괴물을 들여왔냐고 따진다. 그때 할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근데 괴물이면 뭐? 호순이가 괴물로 변한다고 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예뻐하던 그 아이가 뭐가 달라졌니? 호순이는 원래 그대로야. 네가 아느냐, 모르느냐,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의 차이일 뿐.”


마을 사람들이 겁을 먹게 된 이유는 언젠가 자신도 죽일 거라는 불안 때문이었다. 괴물 상태인 호순이 지닌 압도적인 물리적 힘 앞에서 강조되는 건 인간의 나약한 신체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유약한 정신이다. 이는 《괴물아기》의 핵심 주제와 맞닿아 있다. 이 작품은 ‘괴물 아기’라는 공포의 대상을 다 같이 무찌르자고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호순이를 괴물로 몰아가는 사람들의 내면을 들여다본다. 할머니가 말했듯 호순이는 ‘그 아이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 상태를 투영’한다. 그리고 연약한 정신의 끝에는 어쩔 수 없이 분노가 발산된다.


호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어릴 때 동생이 살해되는 현장에서 도망친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은 오래도록 그를 따라다녔고 그는 동생을 버린 오빠라고 놀리는 친구들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그는 과거로부터 끊임없이 도망쳐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는 세상을 향한 분노, 궁극적으로는 나약한 자신을 향해 강한 분노를 느낀다. 그가 학창 시절 경찰서를 들락거리며 가출을 반복하고 방황의 길에 빠진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마을 사람들이 호순의 정체를 알면 분명 꺼려할 것을 알면서도 할머니가 그녀를 받아들인 것은 희망을 보고 싶어서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두려움을 극복해주길 믿었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희망은 좌절되었지만 도망간 호순을 찾으러 나선 호와 그런 그를 이해하고 동행하려는 시연을 보며 할머니는 그들에게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기로 한다. 여기서 할머니가 앞을 볼 수 없는 인물로 설정된 것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이는 희망을 영영 볼 수 없을 거라는 비극적 암시일까, 아니면 보이지 않는 희망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는 장엄한 전언일까.

할머니는 그 누구도 인지하지 못한 분명한 진실을 알고 있었다. 누구도 혼자 살 수 없다. 그것이 설사 가공할 만한 힘을 지닌 괴물일지라도. 개인이 얼마나 강한지, 약한지와 무관하게 어찌 되었든 사람은 타인과 함께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그러니 우리가 꿈꿀 수 있는 가장 최선의 행복은 공존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한편 마을에서 쫓겨난 호순은 신 박사의 요원들로부터 공격을 받는다. 요원들은 신 박사가 개발한 강화인간들이었다. 강화 인간은 무한 재생 능력을 갖춘, 인간의 신체적 한계를 넘어선 존재였고 무엇보다 감정이 제거된 인간이었다. 신 박사는 현 박사가 개발한 괴물 아기가 자신이 개발한 강화 인간보다 강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고, 현 박사를 넘어서기 위해 호순을 제거하기로 한다. 중요한 점은 독자가 인간의 외양을 안 강화인간보다 괴물의 형상을 한 호순에게 감정을 이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심지어 호순이 인육을 먹은 사실을 알면서도 말이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호순이 감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설사 호순이 악에 받쳐 사람들에게 분노를 쏟아내더라도 그 분노가 자신을 품어주지 않는 데에 대한 반작용이란 것을 알기에 그런 모습은 안쓰러움의 일면으로 다가온다.


현 박사는 쫓기던 호순을 데리고 와서 그녀를 최강의 살상 무기로 키우기 시작한다. 호순은 왜 꼭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지만 괴물인 모습을 긍정해 주는 그의 뜻대로 훈련을 이어나간다. 마을 사람들이 ‘괴물이어서 (자신을)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면 현 박사는 ‘괴물이어서 좋아하는 사람들’ 쪽에 속했다. 결국 그녀가 누군가에게 받아들여지는 데에 있어서, 괴물인지 아닌지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사람들이 그녀의 어떤 면에 중점을 두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 그런 면에서 호순이를 구하러 온 호가 건네는 말은 먹먹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호순이 네가 어떤 모습이건 상관없어. (…) 나의 가장 소중한 사람이야.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지킬 거야.”


돌이켜 보면 호와 호순이, 그리고 두 사람을 지지한 길수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그들 모두 가족에게 상처 받은 과거가 존재했다. 동생에 대한 죄책감에 괴로워하면서 동시에 부모로부터 이해받지 못하는 호, 아버지인 현 박사의 폭주하는 욕망으로 실험 대상이 된 호순이, 자신을 버린 채 다른 남자와의 행복을 찾아 나선 어머니를 원망하는 길수까지. 이 세 사람은 타인으로부터 받은 상처를 또다시 누군가에게 상처로 돌려주지 않았다. 한 때 분노에 휩싸여 그릇된 길을 걷긴 했지만 결국엔 상대를 품어주는 쪽을 택했다. 상처가 반드시 가시로 발현되지 않는다는 선택지를 본 이상, 누군가 나를 공격할지도 모른다는 불신으로 먼저 타인을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우리의 선택이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 보러가기: http://webtoon.daum.net/webtoon/view/monsterba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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