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롱이(2019)/사이사/네이버웹툰
인간의 잔인함은 돼지를 사냥하는 것이 아니라 사육하는 데에서 발견된다. 《도롱이》에서 권 씨 가문의 이기심이 소름 끼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그들은 대대로 이무기를 사육하고 도축함으로써 부를 쌓았다. 이무기라는 한 종족을 생태계에서 빼내서 사람의 재산 범주 안으로 편입한 것이다. 권삼복이 도롱이를 처음 발견하고 '자연산 이무기'라며 기뻐한 모습이 이기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거기에 있다. 애초 자연산 이무기가 보기 드물어진 건 권 씨 집안이 이무기를 싹 잡아들여 가축으로 다뤘기 때문인데, 그런 상황에서 자연산 이무기를 보며 입맛을 다시는 권삼복의 반응은 도롱이 입장에서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다.
권삼복의 그러한 가치관은 집안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녀의 오빠 권삼오가 이무기에 대해 알고 싶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어차피 백정으로 살아갈 거라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에게 이무기는 도축해야 할 일거리일 뿐이었다. "말이 좀 통한다고 특별하게 여겨야 할까? 결국 인간이 아닌데." 한 마디로 그에게 세상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으로 나뉘었다. 즉, 인간이 아닌 것이 하나로 뭉뚱그려져 같은 가치를 지닌다는 점이다. 그 가치란 바로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삶을 윤택하게 하는 쓰임새였다.
닭, 돼지, 소도 죽이면서 왜 이무기는 안 되느냐는 그의 논리는 얼핏 결점이 없는 것 같으나 사실은 굉장히 난폭한 주장이다. 그의 주장을 거꾸로 들여다보면 바로 허점이 나온다. 이렇게 질문을 바꿔 보자. 이무기도 죽이지 않는데 왜 닭, 돼지, 소를 죽이느냐?
그는 현재 관습이 이러하니 이무기에도 같은 방식을 적용해도 괜찮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관습이 절대적으로 옳은 방식인가? 누구도 쉽게 그렇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이다. 권삼오가 이무기를 죽이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면 관습에 기대어 그 감정을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왜 우리는 닭, 돼지, 소를 도축하고 있는가에 의문을 가지는 것이 훨씬 발전적인 사고이다.
권삼오는 이무기가 용이 된다는 전설까지 언급하며 이무기만의 특별함을 강변하지만 아버지는 전설을 한낱 허황된 낭설로 단정 짓는다. 그는 이무기를 평범한 동물로 규정지었기 때문에 손쉽게 양심을 떨쳐버릴 수 있었다. 여기서 용의 전설이 더욱 중요해진다. 용이 꼭 나타나야 하는 이유는 미래의 용이 될 수많은 이무기들의 목숨줄이 달려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무기만의 특별함이 증명되기만 하면 이무기는 가축의 영역에서 제외될 수 있다. 인간이 아닌 것 중 하나가 아니라 이무기 그 자체로 고유한 생명체가 된다.
하지만 이상한 일이다. 용이 되든 말든 이무기는 그 자체로 이미 고유함이 증명된 것 아닌가? 결국 용이란 것은 그것이 되지 않고는 이무기라는 것이 얼마나 특별한지 알아보지 못하는 눈먼 인간들을 위한 장치 아닐까?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육류, 돼지고기를 떠올려보자. 대다수 한국인은 돼지를 보면 부위명이나 시가부터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돼지가 잠자리와 배변 자리를 가릴 만큼 똑똑하다는 점, 스스로 먹는 양을 조절하고 규칙적으로 생활한다는 점, 교감 능력도 뛰어나다는 점, 그럼에도 17년이라는 수명을 다 누리지 못하고 겨우 180일 동안 사육되다 식탁 위의 고기로 올라간다는 점, 그것도 평생을 좁다란 공간에 갇혀서 기계적으로 출산과 배설을 반복하다 죽는다는 점¹을 알고 나면 어떨까. 공감능력이 온전한 사람이라면 한 번쯤 돼지의 일생에 연민을 느끼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지식이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이유는 뭘까. 돼지가 단순히 고기의 종류가 아니라 독자적인 생명체라는 것을 일깨우기 때문이다. 돼지가 천 년의 생을 누리다 신수가 된다고 상상해보자. 그런 세상 속에서도 돼지는 지금처럼 함부로 대접받을까? 돼지가 천 년을 산다니, 그리고 그게 신성한 동물이 된다니, 그런 말을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중요한 건 진짜 돼지가 신성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더라도, 지금 우리가 공장식 축산업의 희생양으로 삼고 있는 그 수많은 돼지들이 충분히 특별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권삼복이 10년 동안이나 도롱이와 감정적으로 교류할 수 있었던 기반은 다름 아닌 도롱이가 해준 이야기였다. 도롱이는 권삼복이 그간 한 번도 못 들어본 이야기를 해주었고, 그제야 권삼복은 이무기들이 왜 사람을 공격하지 않는지, 왜 도롱이가 권 씨 집안을 배신자들이라고 부르는지 알게 된다. 우리가 자신도 모르게 잔인한 공정 속에 길들여지고 그것에 동조하게 된 건 그 내막을 전혀 모르거나, 일부러 모른 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작품의 맨 처음과 끝에서 드러난 뚜렷한 대조가 참 의미심장하다. 1화에서 마을 아이들이 모여 앉아 용이 있느냐 없느냐 논쟁이 붙었을 때 한 아이가 권삼복에게 뭐 아는 게 없냐고 묻는다. 그때 권삼복은 "내가 그걸 왜 알고 있어야 하는데"라고 어리둥절해한다. 같은 상황이 마지막화에서도 벌어진다. 그리고 권삼복은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과거 자신의 대답을 떠올린다. 그 순간 아이들 사이에 껴 있는 권삼복의 조카가 단호하게 말한다. "용은 확실히 있어! 내가 알아!" 그 대답은 이무기가 두 번 다시 인간의 손에 사육되는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게끔 만드는 부적과도 같은 말이었다.
권삼복이 무당을 찾으러 떠났을 때 들른 마을은 반은 굶어 죽고 반은 굶기 싫어 떠나는 참담한 상황이었다. 기근의 원인은 오랫동안 이어진 가뭄이었고 가뭄의 원인은 용의 부재였다. 권삼복은 자기 가문이 무차별적으로 잡아들인 이무기 때문에 애먼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음을 뒤늦게 깨닫고 충격에 빠진다. 어느 한쪽이 무분별한 개발을 해나가고 그로 인해 다른 쪽에서 생명의 위협을 받는 관계는 그리 낯설지 않다. 아마 일부는 자본주의 안에서는 사익 추구라는 명분을 막을 수 없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명분은 어디까지나 자원을 활용하는 자유를 말하고 있다. 그 개념 속에 살인까지 용납되진 않는다.
돈을 이용한 거래에 익숙한 우리는 스스로의 경제 활동이 정당하다 믿고 이 극단적인 결말을 외면하고 있다. 당장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까 그리고 수많은 인과관계를 걸쳐 벌어지는 일이니까 책임감이 옅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 우리 모두의 삶엔 누군가의 터전을 망가뜨리는 행위, 누군가의 생명을 갉아먹는 행위, 누군가의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하는 행위가 섞여 있다. 악질적인 고리를 우리가 직접 만들지는 않았더라도 그 고리가 유지되도록 일조하고 있음은 변명할 여지가 없다.
《도롱이》는 권삼복의 성장기로도 읽을 수 있다. 이때 권삼복과 대립하는 존재는 그녀의 가문이다. 자신의 가문이 대대로 행한 이무기 사육이 얼마나 끔찍한지 깨달은 권삼복은 오빠인 권삼오에게 가업을 관두고 다른 곳에 가서 살자고 제안한다. 당연히 장남이었던 권삼오는 동생의 제안이 무책임하고 비현실적이라며 거절한다.
하지만 권삼복은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다. 강철이와의 사투가 끝난 후 그녀가 한 일은 '1,000년 간의 악행을 저지른 가문을 대표하는 자로서' 이무기에게 정식으로 사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그녀는 '홀로 살아남은 이무기 백정, 용을 승천시킨 자, 이무기 피를 묻힌 최후의 죄인, 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이무기의 친우임이 검증된 인간'이 된다.
그렇다고 《도롱이》가 단순히 영웅주의에 빠져 개인의 승리를 외치는 작품이라고 규정지을 생각은 없다. 권삼복이 목숨을 걸고 도롱이를 찾아가 끝내 사과를 했을 때, 도롱이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보다도 사과를 들어야 할 이들은 많다. 그 사과로 지금 이 상황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 용서가 되는 것도 아니며 사과 따윈 듣고 싶지 않고 그저 단죄를 바라는 이들도 많겠지." 그리고 도롱이가 용이 된 후 권삼복에게 미래를 묻자 그녀는 "살아서 직접 보러 갈 거야. 내가 한 짓을."라고 대답한다.
그녀에게선 한 번의 사과, 정확히 말하면 한 이무기에게 한 사과로 지난 과오가 모두 씻길 거라는 오만함을 찾아볼 수 없다. 도롱이의 말처럼 "살아있는 것이 용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이처럼 진정 어린 용서가 있었음에도 섣불리 가해자를 용서하지 않고 지켜보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것이야말로 이 작품의 정수라고 생각한다. 무언가 잘못한 것을 깨달았다면 설사 용서받지 못하더라도 사과해야 한다. 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