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구름 Jul 10. 2021

우리가 기다리던 인어공주의 결말

해오와사라(2019)/송송이/카카오웹툰

해오가 나고 자란 곳의 바다는 해녀의 바다라고 불렸다. 해녀들이 물질하는 곳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인어가 등장하고 나서 그 이름에서 배타성이 드러난다. 그 이름 속에는 해녀 외에 다른 존재는 인정하지 않겠다는 강한 주장이 들어 있다. 인어의 출몰을 해녀들은 침범으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인어들의 입장에서 그곳은 인어의 바다였다. 인어는 새끼 인어를 맞이하기 위해 그곳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보니 사람과 인어는 서로를 원수처럼 여겼는데 해오만은 달랐다. 그녀는 인어를 만났을 때 그것을 불길해하거나 무서워하지 않고 사람과 마찬가지로 대했다. 사실 해녀와 인어는 같은 처지였다. 서로를 해칠 것이 아니라 이해하고 협력해야 하는 관계이다. 아마 해오는 인어를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그 사실을 느꼈으리라.


《해오와 사라》는 인어와 해녀를 거울처럼 사용함으로써 인어가 해녀이고 해녀가 인어라고 말한다. 해녀는 남정네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평생 섬에 갇혀 물질을 해야 하고, 인어는 사람을 멀리하면서도 그들이 사는 세계를 궁금해하며 바닷속에 갇혀 산다. 가능성이 제한되어 있다는 점이 똑같다. 무엇보다 작품 속에서 해남이 등장하지 않고 물질하는 사람이 모두 여자인 것, 그리고 이와 조응하듯 인어가 모두 여자인 것 또한 인어와 해녀를 동일시하는 관점에 더욱 힘을 실어준다.


이제 이러한 등식이 구체적으로 표현된 부분을 한 번 살펴보자. 사라는 처음 보는 인어를 발견하고 가까이 가서 확인하는데 막상 보니 그것은 물질하던 해오였다. 해오가 워낙 헤엄에 능숙하다 보니 사라가 오해를 한 것인데 이를 계기로 두 사람은 처음으로 대화하게 된다. 이후 해오는 마을 사람들 몰래 사라를 만나는데, 해오가 마을 소식을 전해주는 대가로 사라는 매일 전복을 구해 주기로 약속한다. 해녀들이 하는 일을 인어인 사라가 하게 되는 것이다.


직접적으로 둘의 처지를 드러내는 장면도 있다. 사라가 "인어들은 다 그렇게 사니까."라고 한 말을 듣고 해오는 그동안 숱하게 들어온 "여자들은 다 그렇게 사니까."라는 말을 떠올린다. 마지막으로 해오와 사라 사이 강력한 공통점이 있다. 둘 다 사라져 버린 엄마를 찾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사라는 '인간과 섞인 반쪽짜리' 인어였기에 자신을 낳은 인어가 누군지 직접 확인하고 싶어 했고, 해오는 어릴 적 아무 말 없이 떠나버린 엄마를 미워하면서도 막연한 그리움을 버리지 못하는 소녀였다.


하지만 인어에게서만 발견되는 한 가지 자유로움이 있다. 바로 복장이다.  야학에 다니는 소녀들이 바지를 입자 해녀들이 놀란 것에서 알 수 있듯 해녀들은 옷차림도 규율을 따라야 했다. 반면 바닷속 인어들은 거추장스러운 옷을 입지 않는다. 맨몸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되바라지거나 천박해 보이는 인상을 전혀 남기지 않는다. 그저 자연스러울 뿐이다. 과도하게 가슴의 굴곡을 표현하지 않기에 불필요하게 시선이 가슴으로 향할 일이 없다.


대부분 우리가 아는 인어공주는 조개 껍데기로 가슴을 가리고 있다. 하지만 인어들이 사람의 복장을 갖출 필요가 뭐가 있을까. 그런 면에서 해오가 사라를 따라 맨몸으로 물에 뛰어들어 수영하는 장면이 시원해 보이는 건, 단지 차가운 물의 온도가 상상되어서가 아니라, 평소 그녀를 감싸고 있던 구속을 벗어던졌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를 모티프로 삼고 있으면서도 《해오와 사라》가 보여주는 세계관은 원작과 딴판이다. 원작에서 인어공주는 잘생긴 왕자에게 반해 인간 세계를 꿈꾸지만 사라는 남자가 아니라 동성인 해오를 만나면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품는다. 사라가 원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자유였다.


그러한 소망은 사라의 것만이 아니다. 섬 여자들 또한 사랑 때문에 인생을 허비하거나 희생하지 않는다. 설령 그러했다가도 결국엔 자신을 위해 사는 쪽으로 바뀐다. 그녀들에게 사랑은 인생을 구속하는 원흉이라는 경험을 남겼을 뿐이다. 이를 보고 배운 소녀들이 어떻게 사랑을 동경이나 낭만의 대상으로 삼겠는가. 연지만 보더라도 동우와 길에서 부딪혔을 때 그의 얼굴을 보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의 교복에 달린 고등학교 배지를 보고 부러움을 느낀다. 이렇듯 《해오와 사라》에서는 사랑이 절대적 목표가 되는 일이 없다. 오히려 남자에 배신당한 여자들이 연대하며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개척해나간다.


해오의 엄마 옥련에게 네 삶을 찾아 떠나라고 말해준 건 같은 섬사람이 아니라 지금은 마녀가 되어버린 인어 요나였다. 요나는 옥련이처럼 똑똑한 여자가 해녀의 운명에 얽매여 사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러한 장면은 의도치 않게 그녀들의 딸들에게 재현된다. 요나의 딸인 사라는 해오가 정우를 만나러 가려고 하자 혼인하지 말라고 충고하며 해오의 발을 붙잡는다. 이밖에 해오가 글을 배우는 것, 사라가 사람이 되는 것도 옥련이나 요나의 삶과 닮았다. 다른 점은 엄마들과 달리 딸들은 본인의 대에서 억압을 끊어냈다는 것이다. 겨우 열댓 먹은 소녀들이 말이다.


해오는 동우가 어머니 몰래 부산으로 몰래 떠나려는 계획을 알게 되고 그를 말리러 간다. 해오 역시 섬을 떠나고 싶은 욕망을 품고 있었음에도 그를 저지한 건 남겨진 사람들이 겪어야 할 고통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그녀는 인어를 넘기기만 하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는 기회를 얻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연지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이유를 묻자 해오는 이렇게 답한다. "내가 가진 소중한 걸 대가로 뭘 이루고 싶진 않아. 그러면 내 속에서 뭐가 망가질 것 같거든."


여희가 유학을 제안할 때 해오는 이런 답을 내놓으며 여희를 놀라게 한다. "저 혼자 안락하고 싶지 않아요." 해오는 옥련의 똑똑한 머리와 능숙한 헤엄 솜씨를 물려받았지만 확실히 엄마와 다른 딸이었다. 그녀는 엄마보다 더 나은 선택을 내림으로써 본인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다. 해오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들의 삶까지 바꾸고자 했다.


이러한 의지는 비범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이전까지 해오를 괴롭히고 상처 준 것이 바로 여성들이었기 때문이다. 겨우 다섯 살인 딸을 버리고 간 엄마는 말할 것도 없고, 그녀가 믿고 따르던 연지는 해오의 정혼자인 동우와 야반도주를 하려 했고, 약혼이 깨진 후 밝게 지내는 해오를 향해 '요즘 어린것들은'하고 입방아를 찧던 것도 해녀들이었으며, 인어를 사냥하기 위해 해오에게 접근한 것도 최부자네 집 여식인 여희였다.


해오가 물밖에서 의미 있는 변화를 이끌어 냈듯 사라 또한 인어 사회에 놀라운 변혁을 일으킨다. 사라는 아기 인어를 무사히 데리고 가면 다른 인어들에게 무시받지 않을 수 있었지만 막상 알을 찾은 후에는 인어를 부화하는 일에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녀에겐 본인이 핍박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괴롭히던 위치에 내가 올라가게 되는 건가. 그건 싫다.'라고 생각하며 '나'뿐 아니라 '모두'의 행복을 고민했다. 그리고 위기의 순간 사라는 중대한 선택을 내리게 되는데 이 선택은 본인을 위해서 내린 것이면서 동시에 다른 인어를 지키기 위한 것이 된다.


사라는 이 사실을 명확히 정리한 후에야 마녀를 찾아가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사람이 되고 싶다는 본심을 자각한 건 이보다 전이지만 이때 비로소 행동에 옮겼다는 점이 중요하다. 고민의 시간 동안 사라가 나 혹은 타인 중 하나를 희생하지 않아도 되는 길을 찾아냈다는 뜻이니까. 어쨌든 마녀의 요술로 사라는 인간이 되는데 여기서 대부분의 독자는 한 가지 사실을 예상할 수 있다. 아, 목소리를 잃겠구나.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사라의 목소리를 지켜준 사람은 바로 요술을 사용한 마녀, 요나였다. 요나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사라의 마음을 진작부터 눈치챘고 언젠가 사라가 사람이 되더라도 목소리를 지켜주고자 했다. 요나 역시 사람이 된 적이 있었고 말 못 하는 여자로 살면서 당한 일들이 너무도 고통스러웠기에 사라의 미래만큼은 다르길 바랐다. 그래서 요나는 앞으로 모든 인어들이 아무런 조건 없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요술을 사용하고 본인이 물거품이 된다.


가만 생각해 보면 다리를 얻기 위해서 목소리를 주는 걸 당연하게 여길 일이 아니다. 다리는 꼬리와 교환한 것인데 왜 목소리까지 잃어야 하지? 거기다 원작에서 인어공주는 자신이 왕자의 은인이란 것을 밝히지 못하고 물거품이 되지 않던가. 그처럼 허무한 죽음이 또 있을까. 인어공주의 죽음은 비련 그 자체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다. 하지만 요나는 물거품이 되었을망정 사람이 되고자 하는 모든 인어들이 꼬리의 속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냈다.


그렇게 되기까지는 결코 쉽지 않았다. 이전에 목소리를 잃고 허무하게 죽어간 인어들이 왜 이제야 주문을 깨뜨리느냐고, 다른 인어들도 나와 같은 고통을 겪어야 한다고 저항했기 때문이다. 정작 본인들도 남정네들 뒷바라지하느라 평생 고생만 했으면서 미래 창창한 소녀들에게 여자는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엄포를 놓는 우도의 해녀들의 모습과 겹치는 부분이다. 어쨌든 요나는 포기하지 않고 그들의 영혼을 하나하나 다독였다. 이 일에 힘을 쏟느라 인어 중에서 가장 아름다웠던 미모가 흉측해지고 추악해지더라도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사라가 온전한 사람이 되었을 때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 말을 남겼다. '설령 고해오를 배신하는 일이 있더라도 너 자신을 위해 살아가겠노라고 약속해라.'


이 말은 이전에 그녀가 했던 대사와 대비된다. 요나는 해오에게 어떤 일이 있어도 사라를 배신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왜 요나는 두 사람에게 서로 배신하지 말라고 똑같이 말해주지 않았을까? 이 말을 이해하려면 요나와 옥련의 과거를 알아야 한다. 예전에 요나는 사람이 되었다가 사랑하는 이에게 버림받아 물거품이 될 위기에 처했는데 그것을 피하려면 사랑하던 이의 심장을 칼로 찔러야 했다. 그게 누구냐. 해오와 사라의 친부이자 옥련의 남편이면서 요나와 정을 통한 재하이다.


하지만 요나는 재하의 집에 찾아가기만 할 뿐 차마 죽이지 못하고 망설인다. 그러다 재하가 옥련을 무자비하게 구타하는 모습을 보게 되고, 그 순간 요나는 엄청난 증오를 뿜어내며 재하를 죽여버린다. 흥미롭게도 작품의 종반부에서 해오와 사라는 반대의 역할을 수행한다. 동우 아버지가 메스로 사라를 찌르려 하자 해오는 대신 칼에 맞으며 권총으로 동우 아버지를 쏴 죽인다. 이러한 점들을 염두에 두고 다시 보면 요나는 자신이 옥련을 지켰듯이 이번엔 해오가 사라를 지켜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두 사람에게 다른 말을 남기지 않았을 것이다.


요나는 재하를 죽인 후 인어가 되어 바다로 되돌아갔다. 그리고 옥련은 아무 말 못 하고 그녀를 보내주었다. 그렇다면 해오는 어떨까. 그녀는 사람을 죽였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며 총을 쐈던 오른팔을 못쓰게 된다. 오른팔은 사라와 있지 않을 때만 움직였다. 결국 해오는 여희에게 다음의 말을 남기고 사라를 떠난다. "사라는 누군가가 돌봐줘야 해요. 하지만 저에게는 그럴 힘이 없어요. (…) 누군가를 짊어질 힘이. 누군가를 위해 노력을 바치고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을 힘이. 원망하지 않을 힘이."


살인을 저지른 후 두 사람은 의지했던 친구를 떠났다. 이 작품은 자신의 삶에 주인이 되기 위해서는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떠나야 할 때 떠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을 희생해가며 누군가를 책임지지 말고, 관계가 나를 병들게 한다면 언제든 고통에서 멀어지라고 조언한다. 그게 강인한 여성이 아니라 강인한 사람이 되는 법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유일성을 잃은 나는 여전히 특별한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