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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Mar 28. 2021

어둠이 깊을수록 그윽한 향기

밤의 향(2018)/보리/다음 웹툰

몸은 의지를 표현하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이다. 그런데 '나' 말고도 몸을 통제하는 또 하나의 권력자가 있다. 사회다. 조선 시대의 여인만큼 몸의 자유가 간절했던 사람이 또 있을까. 그것도 기생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이슥한 밤, 적야 선생은 춘화를 그림으로써 그녀들에게 '나'를 되찾아준다. 그의 그림이 천박하지도 음란하지도 않은 이유는 그림 속 여인이 곧 그림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몸은 사람에게 주어진 가장 은밀한 공간이다. 적야 선생은 그조차 자기 것이 될 수 없었던 그녀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따뜻한 위로의 시선을 그림 속에 담아낸다.


적야 선생의 정체는 서재하라는 사대부 집안의 자제였다. 대외적으로 그는 기생의 몸에서 난 얼자였으나 사실은 서 대감과 전혀 피가 섞이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는 여종 여진이 다른 남자와 낳은 자식이었는데, 어릴 적부터 그녀를 남몰래 흠모했던 서 대감은 차마 그녀를 내쫓을 수 없었고, 그녀를 옆에 두기 위해 재하를 친자로 거둬들인다.


이러한 운명은 재하와 홍이의 사랑에 중대한 장애물로 작용한다. 서 대감의 딸인 홍이와 재하는 서로 연모했다. 하지만 남들 눈에는 그 둘은 이복남매였다. 그렇게 두 사람은 애타는 연심을 억누르며 집 안에서 데면데면한 관계를 유지한다. 그런 두 사람이 마음을 터트리는 공간이 있었다. 유난히 녹음이 우거져서 자칫했다간 길을 잃는다는 뒤뜰의 정원이었다.


공개되어 있으면서 동시에 폐쇄적인 그 장소에서 두 사람은 마음껏 마음을 표현한다. 두 사람 입장에서는 고래등 같은 기와집 안에서 문을 걸어 잠그는 것보다 그곳이 훨씬 안전했다. 두 공간의 대조는 서하와 홍이가 처한 현실을 비유적으로 보여준다. 둘의 사랑을 상징하는 정원과 그들을 둘러싼 운명을 상징하는 기와집은 곧 억압과 자유, 도덕과 본능, 규율과 해방, 가식과 진실, 야생과 문명, 축축함과 건조함, 생명과 죽음의 대립을 나타낸다.


정원 안에서 두 사람은 서로의 체취를 맡는다. 그 후 홍이는 재하의 박하향을, 재하는 홍이의 달콤한 향을 늘 그리워하며 가슴앓이를 한다. 그러다 홍이는 재하가 적야 선생이라는 아명으로 춘화를 그리는 사실을 알게 되고, 밤중에 그를 찾아가 본인의 맨몸을 그려달라고 청한다. 적야 선생은 그녀를 향해 질정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애써 그녀의 청을 거절한다. 그러나 그녀를 화폭에 담고 싶은 강렬한 욕망에 휩싸이며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한다.


적야 선생이 그림을 그리던 중, 홍이는 지난날의 아련한 마음을 털어놓으며 적야 선생의 복면을 벗긴다. 그렇게 홍이는 재하의 자제력을 한 순간 함락시킨다. 두 사람은 야생으로 되돌아가 참아온 욕망을 터트린다. 서로의 몸을 더듬고 어루만지며 마음이 이끄는 대로 움직인다. 둘이 사랑을 나누는 장면에서는 원초적인 감각들이 총동원된다. 시각으로 확인되는 표정, 촉각을 이끌어내는 살결, 청각을 자극하는 찌꺽거리는 소리, 미각을 짐작케 하는 혀의 애무까지.


두 사람이 사랑을 나누는 동안 강조되는 건  다른 무엇보다 후각이다. 향기는 그 어떤 감각보다 몸속 깊숙이 들어온다. 사랑을 나누고 집으로 돌아온 홍이는 자신의 몸속에 그의 향이 가득 차 있음을 느끼며 양 볼에 홍조를 띤다. 사랑의 욕망은 가까워지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상대의 안으로 파고들기를 원한다. 거리를 좁히는 게 아니라 깊이를 더해간다.


재하는 아버지의 명에 따라 정국회라는 반란 조직에 가담한다. 정국회는 세력 확장에 방해가 되는 모든 자를 가차 없이 척살해버린다. 명령이 떨어질 때마다 손에 피를 묻혀야 했던 재하는 짐승과도 같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다. 그러다 정국회를 탈출할 수 있는 일말의 희망이 생긴다. 개혁 정치를 펼치던 왕에 눈에 들어 호위 무사의 지위를 얻게 된 것이다. 재하는 그 순간 정국회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홍이와 함께하는 미래를 꿈꾸게 된다.


홍이 역시 상단 일을 배워나가며 차츰 상단의 규모를 키워나간다. 그녀는 집안이 정해놓은 혼사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자립할 수 있는 힘을 길러서 스스로의 인생을 책임질 생각이었다. 홍이와 재하의 사랑이 꿋꿋한 생명력을 풍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한 쌍의 남녀는 자신의 생이 남에게 쓰이는 걸 원치 않았다. 오롯이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목표인 사람들이었다.


재하와 홍이 주변에는 잔혹한 현실에 떠밀려 죽음을 맞이한 가련한 인물들이 있다. 재하는 적야 선생으로서 그들을 오롯이 화폭에 담아낸다. 역모로 몰려 사형을 앞둔 송화의 연인도, 남사당패인 연우를 연모했던 주승 도령도, 이별을 앞두고 그에게 그림을 청했다. 비록 현실에 꺾인 꿈일지라도 화폭 안에서 온전한 모습으로 간직하고 싶었던 것이다. 재하는 사람들 눈을 피해 밤마다 재야 선생이 되어 붓을 들었다. 작품 속에서 밤은 희망의 시간이다.  밤은 매일 상처 받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윽한 향 속에 그들을 보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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