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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구름 Feb 12. 2021

유일성을 잃은 나는 여전히 특별한가

미 앤 아이(2013)/고리타/다음 웹툰

정체성을 파악하는 데 가장 쉬운 방법이 뭘까. 바로 타자와 대조해서 차이점을 찾는 것이다. 자기애의 기반도 바로 유일성이다. 남들과 난 달라,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 그게 곧 나야. 사람들은 자신이 지나치게 평범하다고 느끼면 우울감을 느끼고 어떻게든 차별점을 찾아 '나'를 특별한 위치에 놓으려고 애쓴다.


주인공 '홍길동'은 자신의 얼굴과 똑 닮은 사람을 연달아 발견한다. 한 명의 도플갱어가 아니었다. 주변 인물들이 하나둘씩 자기 얼굴로 변해갔다. 심지어 이름까지 죄다 홍길동으로 바뀌었다. 한 마디로 그는 '나'를 도둑맞은 것이다. 그것도 모든 사람들에게. 그는 극도의 혼란에 빠져 이 사태를 바로잡으려 애쓴다. 누구에게나 '나'는 언제까지나 한 명이어야 한다. 내가 둘 이상이 되는 현실은 용납할 수 없는 무엄한 침범이자 도발이다.


홍길동은 대학 친구와 조장에게 이번 사태에 대해 말했지만, 그들은 이 엄청난 변화를 인식조차 못하고 있었다. 홍길동은 이렇게 말한다. "전에 너희가 '리차드 파커'였다면, 지금은 그냥 '호랑이'가 된 것 같아." 그러자 조장은 "모두 '리차드 파커'가 된 건 아니고?"하고 묻는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의 해석에서 호랑이는 리차드 카퍼의 비유로 읽힌다. 홍길동은 자신 이외의 사람들을 모두 카피로 바라보았다면 조장은 오리지널과 카피의 경계 자체를 부인한다. 하지만 이는 오리지널의 원칙, 유일성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관점이다. 다수의 오리지널을 인정할 수 있을까? 만약 오리지널과 카피, 둘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발견되지 않는다면 오리지널의 가치는 무엇일까? 단지 카피보다 선행했다는 것? 그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고유성을 상실한 오리지널은 카피와 전혀 구분되지 않는다. 고로 모두 '리차드 파커'가 되었다는 말은 모두 '호랑이'가 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추락을 오리지널은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모든 남자가 '홍길동'이 되어가는 사이 모든 여자들은 '김미영'이 되어간다. 홍길동은 오리지널 김미영을 찾아 이 일을 해결하기로 결심한다. 온갖 방법과 수단을 동원해 수소문해보지만 오리지널 김미영은 쉽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똑같이 생긴 사람들 속에서 허우적대며 복제된 수많은 삶을 허망하게 바라본다.


현대 사회에서 카피는 낯선 개념이 아니다. 대도시에서는 카피가 아닌 것을 찾기 힘들 정도다. 그 덕에 우리는 평준화된 삶의 질을 보장받았다. 사람들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체제 안에 하나의 부품으로 살아간다. 하지만 분명 자의식이 있는 부품이다. 하루하루 소모되어가면서도 여전히 '나'라는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홍길동은 그토록 찾던 오리지널 김미영을 만나지만 그녀는 자신이 오리지널이 아니라는 거짓말을 둘러대고 자리를 뜬다. 뒤늦게 그녀가 진짜라는 것을 알아챈 홍길동은 그녀의 행적을 찾아 버스터미널로 향한다. 홍길동은 그녀가 섬으로 떠났을 거라는 중요한 단서를 얻는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다시 말하면 '내가 나 하나뿐인' 곳을 찾아갔던 것이다.


한편 조장은 터미널로 찾아와 홍길동에게 가지 말라고 말린다. 홍길동은 이 사태가 벌어지기 전 조장을 짝사랑했음에도 그녀의 부탁을 거절한다. 조장은 말한다. "넌 아직도 내가 '카피'라고 생각하니? 난 내가 특별한 '김미영'인 줄 알았는데.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홍길동은 끝까지 진짜 김미영만을 고집했다. 그는 오리지널을 고정된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그가 모든 카피에게 특별해지고 싶은 열망이 있다는 것을 이해했다면, 그리고 특별함이란 안에 있는 것을 발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덧붙여 발명할 수도 있음을 눈치챘다면, 그는 굳이 떠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카피는 카피된 순간부터 오리지널로부터 독립한다. 고로 후천적인 과정에 따라 얼마든지 또 다른 오리지널이 될 수 있다. 사랑이 그렇다. 홍길동이 엄마에게 '어디서든 아빠를 구별할 수 있느냐'라고 물었을 때 그의 엄마는 보자마자 '아! 이 사람이구나!' 하는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홍길동은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올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는 오리지널 김미영과 사랑에 빠진 것이 아니라, 오리지널과 오리지널의 만남이라는 강력한 운명에 도취되어 있었다.


운명은 무겁고 진지하다. 그것을 믿는 사람들은 운명에서 자신의 특별함을 찾으려 한다. 하지만 운명이 허상이라면? 상상 속에서만큼 극적이고 강력하지 않다면? 그저 그런 우연의 일부일 뿐이라면? 우리는 인생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아니 그런 게 있기나 할까?


확실히 운명이나 기적 같은 말들은 매력적이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의미 없는 작은 우연조차 쉽게 운명이라고 믿어버린다. 홍길동이 운명을 확신하고 오리지널 김미영을 만났을 때, 김미영은 운명의 존재를 부정한다. 당신이 날 만나러 온 건 우연의 연속일 뿐이라고. 거기엔 아무런 의미도 없다고.


애초에 삶이 운명의 무게를 버틸 만큼의 중량이 되지 않는 건 아닐까? 어쩌면 딱 우연이 스치고 지나갈 정도로 가벼운 존재일지 모른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문득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무의미의 축제』가 떠올랐다. 삶이란 게 생각보다 별 볼 일 없고 우연이 빚어놓은 일시적인 형상에 지나지 않는다면, 운명에 목매기보다 가벼움을 즐기는 게 올바른 인생 사용법이 될 것이다. 운명으로 보이는 것이 쓱 다가오더라도, '어 왔니?' 하고 뒤통수를 가볍게 툭 치고 지나가는 여유를 지니고 산다면, 작은 우연들 속에서도 행복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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