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라짜로 (2018, 알리체 로르와커)

야만의 시대에서 우리는 예수를 알아 볼 수 있을까

by 베일


* 아래 내용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수가 재림해도 알아보지 못하는 시대들

1980년대 이탈리아의 작은 시골 마을 안비올라타. 이 곳의 사람들은 외부 문명과 단절된 채 놀랍게도 담배 농장을 가지고 있는 한 후작 부인의 소작농이다. 소작농이 금지된 시대에서 여전히 착취를 당하고 있지만 이들은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 소작농 공동체의 일원 중 하나인 라짜로는 순수하고 착한 청년으로 마을 사람들은 이런 라짜로를 적극적으로 이용한다. 요양 차 안비올라타로 내려온 후작부인의 아들 탄크레디는 강압적이고 비도덕적인 어머니에게 반항하기 위해 납치극을 꾸미며 그 과정에서 라짜로와 우정을 쌓게 된다. 탄크레디는 어머니와는 대비되는 인물로 이 착취가 불공정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인물로 어머니에게 반항한다. 이런 탄크레디의 행보에 동참하는 것은 마을 사람들 중 가장 아랫사람으로 취급되는 라짜로다. 후작 부인이 두려워 도시로 떠나지도, 권력에 대항할 생각조차 못해본 마을 사람들과 라짜로는 분명 대비된다. 라짜로의 도움으로 탄크레디가 몸을 숨기고, 마을의 소녀가 몰래 한 탄크레디의 실종 신고는 이 시간이 멈춘 마을에 엄청난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이후 국가의 공권력이 마을에 미치게 되면서 후작 부인의 대 사기극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마을 사람들은 고립되어 있던 마을에서 나와 도시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고 라짜로는 경찰의 수색에 놀라 발을 헛디뎌 절벽 아래로 추락하게 된다. 그리고 마법처럼, 늑대가 선한 사람의 냄새를 맡고 라짜로의 앞을 지나가자 수십 년이 지나고, 비로소 라짜로가 눈을 뜬다.


라짜로와 탄크레디

마술적 리얼리즘을 완벽히 보여주는 이 영화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사실적인 표현과 전개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라짜로가 눈을 뜨는 순간부터 영화는 2막으로 전환된다. 1막이 현실적인 소작농들의 삶과 그들이 사는 마을의 자연에 집중해 리얼리즘에 집중했다면 라짜로가 죽음에서 깨어나면서부터는 극의 분위기가 완전히 전환된다. 순수하고 성실한 일꾼의 얼굴을 한 라짜로는 성인의 모습으로 부활한다. 수십 년이 지났지만 소년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라짜로를 마주하면서 관객들은 본격적으로 영화 안에서 마술적인 체험을 하게 된다. 배고픔과 추위, 세월을 초월한 라짜로의 여정을 따라가면서 우리는 어떠한 비현실적인 사건이 생겨도 그것을 이상한 것이나 이질적인 경험으로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 성경에 나오는 성인 나사로를 모델로 한 주인공 라짜로는 예전 시대에서도, 지금 시대에서도 보기 드문 순수하고 선한 인물이다. 너무 착해서 바보 같아 보이기까지 할 지경인 사람. 라짜로의 시선을 통해서 바라보는 이 시대는 착취와 속임수로 얼룩진, 성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시대이다. 의미심장하게도 라짜로의 부활 이후 라짜로를 알아보고 무릎을 꿇는 이는 과거 유일하게 같은 또래 아이였던 안토니아이다. 안토니아는 과거 성인들의 사진에 입맞춤했던 소녀이기도 한다. 안비올라타의 어른들, 현재 늙어서 노인이 된 이들은 라짜로를 유령이나 악마 취급을 한다.


기적처럼 도시에서 재회한 라짜로와 안비올라타 마을 사람들의 삶을 살펴보자. 후작 부인에게 착취당하던 노예 같은 세월들을 벗어나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뿔뿔이 흩어진 안비올라타의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었을까? 그들은 여전히 착취당하고 있다. 예전에는 한 개인으로부터 착취를 당했다면 이제는 산업사회에 접어들어 경쟁과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시대로부터 착취당하며 소작농으로 살던 과거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한다. 오히려 과거보다 못한 삶을 사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 그들이 과거 안비올라타의 삶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이해가 아주 안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은 또 과거 라짜로를 착취했던 것처럼, 또 다른 이들을 착취하며 살아가기도 한다. 착취를 당하는 사람들이 또 다른 사람들을 착취한다. 착취는 착취를 부른다. 니콜라는 이주 노동자들이 더 싼 값으로 일을 가게 경쟁을 시키는 일을 하고, 안토니아의 가족들은 선량한 이에게 사기를 쳐서 생계를 이어나간다.


재회한 라짜로와 탄크레디


한편 라짜로는 그를 배다른 형제라 칭하던 탄크레디와 재회하게 된다. 기뻐하는 것이 느껴지는 라짜로의 반응과 달리 탄크레디의 반응은 호의적인 것 같아 보이지만 왠지 뜨뜻미지근하다. 후작의 아들로 부유했던 과거와는 달리, 탄크레디는 늙었고 은행이 재산을 몰수해 가 예전보다 훨씬 못한 삶을 살고 있다. 한편 라짜로를 통해 탄크레디와 재회한 안비올라타의 사람들은 탄크레디의 집으로 식사 초대를 받게 되고 가진 돈을 다 털어서 고급 제과점에서 선물을 사 그의 집을 방문하지만 문전박대를 당하게 된다. 고급 제과 마저 탄크레디의 집에 전달하고 온 가족이 허탈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음악소리에 이끌려 들어선 성당. 수녀는 방해가 안 되게 음악만 듣고 가겠다는 이들을 자신들만의 의식을 핑계로 매몰차게 내쫓는다. 어딘가 주객전도가 된 기분이다. 성인을 알아보지 못하는 수녀는 결국 가진 것 없고 힘없는 이들에게 음악을 뺏기고 만다. 아니, 음악이 그들을, 라짜로를 쫓아왔다고 하는 표현이 맞는 말일 수도 있겠다. 성당에서 음악이 사라지고, 음악이 힘없는 이들을 쫓아오는 이 마법 같은 장면은 아름다우면서 슬프다.


담뱃잎에 둘러 쌓인 아날로그의 정취

<행복한 라짜로> 는 초현실적이면서도 사실적인 이야기만큼이나 이를 그려내는 방식 또한 흥미롭다. 투박하고 그레인이 가득한 필름으로 찍은 영상은 1막의 안비올라타 마을의 전원적이고 목가적인 풍경을 아름답게 보여준다. 또 안비올라타의 풍경을 비출 때 자주 쓰이는 핸드핼드는 투박하게 자연의 아름다움을 잘 살리고 있다. 꾸미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시골 풍경의 아름다움을 우리는 목격할 수 있다. 모서리가 둥글게 처리된 정사각형에 가까운 프레임 비율과 스크래치가 느껴지는 필름의 텍스쳐는 마치 고전 영화를 보는 착각을 일으킨다. 2019년에 개봉된 영화라고 말하지 않는다면 훨씬 더 예전의 영화라고 착각할 수 있을 정도다. 이렇게 아날로그적이고 투박한 과거의 산물을 환기시키는 형태의 프레임은 초현실적이지만 현실적인 이야기와 잘 어울리며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신비한 힘을 부각하고 있다. 또한 라짜로는 다른 인물들보다 화면 중앙에 자주 배치되는데 라짜로가 부각되는 장면들이 겹쳐 힘을 가지게 되면서 라짜로라는 인물에 대한 신비로움과 신적인 느낌은 강조되고 관객은 인물이 가진 힘과 연기에 주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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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라보는 성인의 눈물

라짜로는 이 세상과 선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분노하지 않는다. 그저 이 모든 것을 그 큰 두 눈망울에 담으며 안타까워하고 눈물을 흘릴 뿐이다. 라짜로는 안토니아의 가족이 사는 쓰레기장 같은 곳에서도 가치 있는 것들을 발견하고 그 진가를 알아보는 인물이다. 정작 라짜로보다 그곳에 오래 살던 가족들은 약초나 식재료로 쓰일 수 있는 생명을 발견하지 못했다. 그들이 눈 앞에 성인으로 부활한 라짜로도 못 알아보는 것을 생각한다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이처럼 쓰레기 속에서도 아름다움을 발견한 라짜로지만, 마주한 이 세상에서는 그런 희망의 빛조차 발견할 수 없었는지 결국 눈물을 흘린다. 세상에 분노하거나 사람들을 바꾸려 하지 않고 그저 이들의 모습을 눈에 담으며 받아들이지만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하는 라짜로의 모습은 어떤 먹먹함을 안긴다.


탄크레디와 라짜로가 함께 울음소리를 흉내 내던 늑대는 라짜로에게 위기가 닥칠 때마다 그 모습을 드러낸다. 라짜로는 선인의 냄새를 맡은 늑대가 나타난 뒤 죽음에서 부활했으며 은행에서 라짜로가 쓰러지자 어디선가 늑대가 나타난다. 늑대를 선인, 성인을 알아보는 초월적인 존재로 생각한다면 그 매개체가 다른 인간이 아닌 짐승의 탈을 쓴 존재라는 점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늑대는 라짜로가 쓰러진 자본주의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도심의 은행에서부터 더 멀리멀리 달아난다.


<행복한 라짜로>의 엔딩은 관객석으로 달려오는 늑대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라짜로를 지나서 우리에게 달려오는 늑대는 라짜로에게서 느꼈던 선인의 냄새를 우리에게서 느낄 수 있을까. 늑대는 더 멀리 달아난다.


야만의 시대

역사는 흐르고, 야만과 폭력이 당연했던 과거에 비해 지금의 세상은 너무나 많이 변했고 기술적 혹은 사회적으로 엄청난 발전을 이루었다. 그러나 정녕 사람들의 의식 수준은 그 옛날 과거에 비해서 진보했는가? 세상이 눈부시게 발전해도 그 발전의 수혜를 받지 못하고 소외된 사람들은 어느 시대에서나 존재했고, 21세기가 된 지금도 지구 한편에서는 가진 자들은 먹을 것들이 남아돌고 어느 한 편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있다.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존재한다. 그리고 그 착취당하는 사람들은 또다시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착취하며 살아간다. 예수에게 돌팔매질을 하고 죽음으로 몰아세운 성경 시대의 사람들과 지금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성인이 와도, 예수가 부활해 돌아온대도 뭔가 잘못된 이 세상의 무언가를 바꾸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행복한 라짜로>는 아직 끝나지 않은 야만의 시대 속에서 성인을 부활시키며 이 세상을 돌아보게 한다. 라짜로 한 명으로는 이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그러므로 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그동안 우리가 외면해왔던 것들에 대하여. 라짜로를 지나 달려가는 늑대가 선인의 냄새를 맡고 기꺼이 멈출 수 있는 시대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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