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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lisha Mar 11. 2023

할매가 부른다

주정숙 여사를 그리며


 "야야~~~아~~얼른 와서 밥 먹어라!"

우뚝. 하던 종이 인형 놀이를 멈추고 벌떡 일어나 할매가 부르는 부엌으로 냅다 뛴다. 아까부터 곰국 향이 솔솔 올라와 꿀꺽, 침을 삼키던 참이었다. 오늘 점심은 곰국이다. 윤기 나는 흰쌀밥을 크게 떠서 곰국에 꾹꾹 밀어 넣어 말고  어제  담근 생김치를 할매가 쭉쭉 찢어 수저 위에 올려준다. 함박웃음을 지으며 입을 쩌억 벌려 밥을 넣는다. 할매가 있으니 너무 좋다. 끼니때마다 윤기 좔좔 흐르는 밥과 다양한 식단. 이번 방학도 역시나 천국이 따로 없다.


 "퍼뜩퍼뜩 달리 바라! 뒤에서 쫓아온~다 아이가!"

초등학교 운동회의 하이라이트인 단체 릴레이 경기가 한창이다. 열띤 경쟁 아래, 때는 마침 우리 반 2위로 달리던 내가 1위로 순위를 올리던 참이었다. 짧은 커트 머리에 앞머리는 야무지게 동여맨 사과머리를 하고서 이를 악물고 짧은 다리로 부지런히 뛴다. 제야 따라잡은 1위를 놓칠세라 할매의 목소리가 더 조급해졌다. "오야 오야, 우리 손녀 잘 헌다~~내 손녀 잘 헌다아~!" 이번 운동회도 빠짐없이 바쁜 엄마를 대신해 김밥과 옥수수, 그리고 운동회의 상징인 1.5 리터 사이다와 삶은 달걀을 한 바구니 가득 싸 들고 오신 할매가 나를 부른다. 할매의 응원에 힘입어 입술을 앙다물고 힘껏 달려본다.


 "어이~ 아가씨, 식혜 좀 묵어볼 텐가?"

이 뜨거운 여름 날씨에 입시 공부가 웬 말이냐며  책상 위에서 녹아내린 나를, 수박처럼 시원한 목소리가 부른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식혜가 물처럼, 수도꼭지를 틀면  금방 나오는 줄 알았더랬다. 냉장고 안은 언제나 달달하고 시원한 식혜가 꽉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솜씨로 부지런히 채워 넣으신 울 할매 덕분이다. 얼음을 동동 띄운 달달하고 시원한 식혜 한 잔이면 녹아내렸던 팔다리에 놀랍도록 힘이 생기는 건 아마도 할매의 땀과 정성이 녹아들었기 때문이리라. 식혜 한 잔 쭉 들이켜고 할매한테 슬쩍 앵겨본다. "할~매~ 공부하기 싫다." " 이 아가씨가 식혜 한잔으로는 부족한가베~." "우와, 역시 울 할매는 쎈쓰가 남다르다니깐. 새콤한 냉면 우뜨까?" "그라믄 냉면을 함 땡기보까?" "오야르~울 할매가 최고, 최고!" 할매가 챙겨주는 식혜와 냉면은 그 여름 최고의 보양식이자 사랑이었다.


 '쿵!!'

"누가 있으면 좀 와보그라~! "

욕실에서 할매가 부른다. 물에 젖은 슬리퍼를 밟아 미끄러져 허리를 다치신 모양이었다. "큰일 났네. 이래 못 움직이믄 밥은 우예 챙기주노. 아까 빨래도 해놔서 널어야 되는데. 느그가 고생하긋네. 우야긋노..." 자리에 누워 주저리주저리 하시는 말씀은 우리를 걱정하는 말뿐이었다. "할매요, 지금 그기 문제가! 몸 아픈기 문제지!" 피식. 짐짓 긴장하던 할매 얼굴에 여유가 틈을 찾는다."그러게 그것부터 걱정이네. 허허." "음맘마, 웃음이 나오는 거 보이 울할매, 아직 개안은 가베?"  "하모, 내 안즉 안죽었그릉~" 여유 있는 말투와는 달리 이 즈음부터 할매는 많이도 아팠다.


"니가 누고? 쌍디가? 함 보자..."

주섬주섬 할매 손을 만져본다. 할매가 손가락에 힘을 주어 내손을 맞잡는다. 당뇨 합병증으로 눈이 보이지 않게 된 할매는 목소리로 사람을 구별했다.  거동을 못 하게 된 지는 벌써 좀 되었다. 직장이다 뭐다 바쁘다는 핑계로  경주에 살고 있는 할매 얼굴을 못 봤더니 그 단 새 더 핼쑥해졌다.

"할매요. 인제는 넘이 해주는 밥 먹는 거도 개안트제? 내가 잘~알지 그 마음을." "이 아가씨보소. 암만케도 내가 한 게 제일로 맛나지. 안 글트나?" "하하. 옳소, 옳소. 역시 울 주정숙 여사가 젤로 똑똑하네." 서글픈 대화에 또 입술을 깨문다. "할매, 요새 내가 일하는데서 무슨 일이 있었냐면..." 할매가 없던 지난 시간 동안의 이야기를 풀어내어 본다.



 "쏴아아, 쏴아아~~철썩."

초여름 파도 소리가 시원하게 몸을 적시는 듯하다. 감포 해수욕장으로 오래간만에 발을 디뎌 본다. 이른 휴가차, 할매를 보러 온 가족이 모였다. 돗자리를 펴고 먹을 것부터 꺼내 어린 조카들에게 쥐어주니 너나 할 것 없이 과자를 들고 소리를 지르며 바다 쪽으로 뛰어간다. ‘느그들이 우리 할매가 있었으면 맛있고 건강한 거 많이 묵었을낀데...’ 잠시 속으로 생각해 본다. “엄마, 확실히 여기가 안 답답하고 탁 트여서 좋네. 할매가 딱 좋아할 만하네.” 답답하고 못 움직이는 산에 말고 여기저기 다닐 수 있는 바다에 뿌려달라시던 본인의 유언대로 할매의 유골은 감포 바닷가로 종착지를 정했다. 지금이야 불법이라지만 당시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할매를 원하는 곳에 보내드릴 수가 있었다. 세련된 우리 할매가 좋아하는 아메리카노 커피 한잔을 준비해 온 보온 물병에서 꺼내 따라본다. 향기라도 맡고 싶었는지 막 따라낸 뜨거운 커피 김이 순식간에 바다로 향한다. 잠시 할매와 커피 향을 공유해 본다.  "할매요, 할매!  주정숙 여사! 어데, 거는 좋은교? 시원한교?" “쏴아아~~철썩.” 대답인 건지 그저 파도 소리인 건지 분간이 안 된다. “쏴아아~~철썩.” 나를, 우리를 부르던 할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아가씨요, 내는 걱정 하덜 말고 맛난 거 많이 묵고 잘 자고 하는 기 제일로 행복한기다.” 평소에 하던 할매 목소리가 커피 김을 다시 한번 바람에 가져가며 귓가에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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