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마음을 담그다
족욕(足浴)과 심욕(心浴)
긴장된 몸을 풀어주기 위해, 족욕을 준비한다. 세숫대야에 뜨거운 물을 넣고 향기로운 오일도 조금 탄다. 발을 살짝 넣는다. 앗 뜨뜨! 처음은 뜨거울지라도, 곧 따듯함이 되고 점점 노곤함이 될 것을 알기에 발의 들썩거림을 애써 참는다. 그럼 그렇지. 긴장이 풀어지고 근육이 흐물흐물 해져서 나도 모르게 흥얼거림이 흘러나온다. 따라라라랄라. 랄랄라. 이 노래가 뭐였더라? 저 하늘과 저 넓은 바다... 아! 기억났다.
저 하늘과 저 넓은 바다는 어쩜 이리도 푸른지 날 비우네
저 파도와 시원한 바람이 내 안에 모든 것들을 다 채우네
쌓여있던 내 맘을 모두 비우니 가벼운 나의 마음이 달아오르네
굳어있던 내 안에 마른 감성이 촉촉이 내 맘을 채워 외롭지 않네
흥얼거림이 노래가 되어 욕실 안을 가득 채우는 울림이 되었다. 욕실에선 ‘나도 가수’였다. 감성을 팍팍 넣어 신나게 꽥꽥이는 소리로 부르고 나니 ‘아루앤폴’이라는 가수에게 조금, 아주 조금 미안하다.
족욕을 끝내고 깨끗하고 노곤해진 몸을 뉘었다. 두 팔로 머리 베개를 만들고 구부린 무릎을 들어 다리를 슬쩍 꼬았다. 아까 욕실에서의 외침이 부족했던지 꼬았던 다리가 은근슬쩍 박자를 맞추고 입에서는 반복된 구절이 흘러나온다. “떠나버린 던져버린 녹아버린 내 맘을 비우네, 떠나버린 던져버린 녹아버린 내 맘을 채우네~” 그러고 보니 노래 제목이 「Busan」이다. 부산에 왔다가 부산 바다에 반해서 만든 곡이라고 들었다. 뭘 좀 아는 가수 같다.
가슴이 답답할 때마다 혼자 바다를 보러 간다. 바다에게 내 답답함을, 그리움을 좀 가져가 달라고 부탁하러. 일이 잘 안 풀릴 때도, 아빠가 보고 싶을 때도 오랜 시간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의 흐름에 답답함과 그리움을 흘려보낸다. 한참을 보고 나면 비워진 그 자리에는 시원한 바닷소리만 들어찬다. 노랫말처럼 나는 비워지고 또 채워진다. 특별한 것도 없는데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나만 아는 줄 알았는데 저 가수도 알아버렸네. 아닌가? 다 아는데 나만 아는 줄 알았는지도.
픽. 방금 마친 족욕처럼, 마음의 피로를 풀기 위해 바다에 갔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난다. 나 자신도 모르게 가끔 바다로 달려가고 있는 이유가 선명해진다. 그럼, 바다로 갈 때마다 빠지지 않는 손 안의 커피는 향기로운 오일쯤 되려나?
부산에서 태어나고 지금은 해운대 바다 근처에 살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나 보다. 이 노래를 들으며 바다가 내게 주는 평온함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부산에 살면서 바다에 간다는 건 언제든 마음을 담글 수 있는 심욕(心浴)을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어서 벌떡 일어났다. 야구 모자를 눌러쓰고 잠옷 바지 위에 츄리닝 바지를 대충 껴입었다. 줄줄이 접혀 들어간 잠옷 바지 덕에 다리 한쪽이 불룩하지만, 씩 웃으며 당당히 문밖을 나선다. 뭐 어때. 누가 신경이나 쓸까. 좀 전의 족욕으로 발걸음이 가볍다. 바다야 언니가 간다. 기다려라. 급한 마음에 가볍다고 생각한 발이 허공을 날아가기 시작한다.
30분 남짓. 열심히 걸어서 해운대 바닷가에 도착했다. 철썩. 파도 소리에 물세례를 받은 듯 정신이 번쩍 든다. 시원스레 내 마음에 물을 끼얹고 저 멀리 달아나는 파도가 보인다. 어느새 커피가 든 종이컵의 목덜미가 오른손에 잡혀있다. 그래. 바로 이거지. 털썩. 모래에 주저앉아 따듯한 커피를 마시며 파도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는다.
쌓여있던 내 맘을 모두 비우니 가벼운 나의 마음이 달아오르네
굳어있던 내 안에 마른 감성이 촉촉이 내 맘을 채워 외롭지 않네
(「Busan」 feat. St. Paul 아루앤폴 노래, 에스티폴 작사 및 작곡)
족욕과 심욕, 둘 다를 욕심 내어도 사치가 아닌 이곳에 살고있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