찌르르 찌르르. 여름밤의 소리에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본다. 며칠 무더위가 아직 기승을 부렸지만, 어쩐 일 인지 오늘 밤 만은 살랑이는 미풍이 창을 타고 들어와 머리카락을 건드린다. 읽던 책을 덮고 창문을 끝까지 밀어 열고 숨을 크게 들이쉰다. 공기는 여전히 덥지만 은은한 여름의 풀내가 코끝을 맴돈다. 내일부터 휴가라 그런지 이 더위조차, 설레는 행복이다.
3일간의 휴가 중 첫날. 늦게까지 늦잠을 자고, 늦은 아침을 먹고, 또다시 늘어지게 낮잠을 잤다. 지잉 지잉거리는 휴대폰 소리에 한쪽 눈을 뜨고 방해꾼을 확인했다. 작은 언니다. "내일~ 다른 건 필요 없꼬, 수박만 큰 거 하나 사 오면 된디. 젤 맛있는 거로 사온나!" 내일 거창에서 보낼 온 가족 휴가 준비물로 수박이 당첨되었다. 요리솜씨가 없는 나로서는 감사한 준비물이다. 잠시 눈을 감고 있다가 벌떡 일어났다. 수박을 사러 가야겠다. 대충 세수를 하고 거울을 보니 얼굴이 부어있다. 먹고 바로 잤더니 그런가 보다. 으흐흐. 먹고 자서 부은 얼굴은 부의 상징이 아니던가. 혼자 킥킥 거리며 수건으로 얼굴을 닦는다.
고당도 수박임을 자랑하며 당당히 스티커를 달고 있는 큰 수박이 눈에 띄었다. 잘생기고 줄무늬도 선명한 것이 때깔 나는 수박이다. 줄기가 촉촉한 걸 보니 내일 먹기도 딱이다. 엉차엉차. 당첨된 수박을 안고 집에 오니 땀이 흥건하지만 내일 함께 먹을 생각에 기분은 가볍다.
거창은 말 그대로 풀잎들이 거창하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온 동네가 푸르르다. 푸른색에 한껏 취한 우리 가족은 더위를 뒤로하고 온종일 동네 산책이다. 조카들은 현장체험을 하듯 식물 이름을 물어보고 큰언니와 작은언니 그리고 엄마는 사진 찍느라 바쁘다. 어디서 온 강아지인지 모를 작은 흑구가 아까부터 왁자지껄한 우리 가족을 따라다닌다. 구경거리가 생겼나 보다. 약간은 후덥지근하지만 따듯한 공기가 크림 같은 부드러움으로 주변을 감싸고 재잘거리는 듯 한 웃음소리가 청량하게 더해진다. 이제 얼음 같은 시원한 수박이 더해질 차례.
쩍! 칼을 살짝 가져다 대기만 한 것 같은데 수박이 번개처럼 금이 갔다. 수줍은 수박이 벌건 얼굴을 드러낸다. 아직 다 자르지도 않았는데 어린 조카들이 줄을 서 입을 벌리고 있다. 요 둥지 속 어린 새들을 봤나. 조그맣게 속을 떼내어 입안에 쏙쏙 넣어준다. 행복한 조카들의 얼굴에 기분이 좋다. 뭉텅뭉텅 썰어 놓은 수박을 큰 쟁반에 담아 마당으로 가지고 간다. 너나 할 것 없이 수박을 하나씩 집어 들고 시원하고 달달한 여름을 맛본다. 고당도란 이런 것이라며 내가 턱을 치켜올린다. 고당도 수박씨는 날아가기도 멀리 날아간다며 쌍둥이 동생이 씨를 멀리 뱉는다. 애 어른 할 것 없이 한 바탕 씨 멀리 뱉기 경쟁이다. 수박씨가 바닥 여기저기 튀기 시작하고 누군가의 얼굴에 튀자 그 바보 같은 모습에 다들 웃음이 터지기 시작한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가족과 함께 맞이하는 이 푸르른 하루. 시원한 행복이 입으로, 눈으로, 피부로, 그리고 가슴으로 느껴진다. 행복한 이 시간, 나는 이 여름의 맛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