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틴의 재설정

돌이키면 잔잔하게 남을 지금을 위하여

by Rhea

봉쇄가 길어진다. 이렇게 길어질 줄 몰랐다. 예상을 빗나가도 한참 빗나간 무지막지한 봉쇄에 이곳 사람들은 많이 지쳤고 분노한다. 그것은 마치 상하이라는 도시의 위상만큼이나 높았던 그들의 자존심이 배신을 당한 것처럼 보인다. 나는 어찌어찌 잘 버티고 있다. 기동력 좋은 동네 한국 사람들과 중국 사람들 덕에 다양한 물건들을 공구가 가능하고, 중국 정부에서 보내주는 물건들과 회사에서 보내주는 구호품들까지 더해져 우습게도 물건이 넘쳐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탕이나 빵 같은 여전히 부족한 물건들이 있고, 택배를 통해 감염되는 것 같다며 곧 배송 자체가 금지될 거라는 흉흉한 소문도 매일같이 들려오고 있어서 이미 물건이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아침부터 밤까지, 심지어 회사 화상회의를 하고 있는 중에도 공구에 몰두했다.


물건이 왔다며 1층에서 가져가라는 자원봉사자의 연락을 받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길에, 4층에 사는 한국인 남자를 만났다. 그도 마침 같은 물건을 가지러 간다며 내게 ‘뭐가 온 건가요?’라고 물었다. 나는 ‘저도 몰라요’라고 답했다. 그리고는 한동안 서로 멍하다 이내 헛웃음을 내었다. 그렇다 너무 많은 공구로 우리는 무엇을 주문했는지, 그리고 무엇이 왔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던 것이다. 물건은 식빵 3 봉지였다.


이른 아침부터 아이들의 아침과 온라인 수업을 챙기고, 곧이어 나도 재택근무를 시작한다. 일하랴, 아이들 수업 챙기랴, 공구하고, 공구받고, 틈틈이 항원 검사, 핵산 검사를 하고 점심을 차리고 치우고, 또 일하고 아이들 챙기고, 공구하고, 공구받고, 저녁을 준비하고 치우고, 집안일을 하고, 공구를 하고, 공구를 받고, 아이들을 재우고.


거짓말 같은 상황, 거짓말 같은 일상, 그 속에서 거짓말처럼 살고 있는 나. 내가 원하는 건 뭘까? 한국에 돌아가고 싶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 남아 더 해보고 싶나? 나는 괜찮은 걸까? 아님, 사실 두려운 걸까? 나는 어떻게 하고 싶은 걸까? 내게 필요한 것을 무엇일까?


드라마 파친코의 어느 대사처럼, 내 몸의 윤곽이 흐릿해지는 기분이다. 그래서 파친코의 이번 화는 나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비록 이런 와중이지만, 내가 내가 아닌 체 무력하게 시간을 보내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봉쇄가 시작되어 며칠 지나지 않아 새로운 루틴을 만들어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아이들을 위해 그 루틴을 지키려 무던히 애쓰고 있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내가 나로서 시간을 보내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그리 했는지도 모르겠다.


너무 바쁘거나 피곤한 날을 제외하고 되도록 매일 하루 40분 이상 운동을 했다. 봉쇄를 하며 외부에서 아무런 운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불과 며칠 만에 몸이 둔덕 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봉쇄도 억울한데 몸까지 엉망이 되면 너무 자괴감이 들 것 같아 꼭 운동을 하자고 스스로에게 약속을 한 것이다. 본래 홈트를 꾸준히 하는 편이기도 했어서 플랫폼의 좋은 프로그램을 보며 정말 거의 매일 운동을 하고 있다.

운동은 주로 덤벨 프로그램으로 한다. 근육을 유지하기에도 좋고 맨손 운동보다 덜 지루해서 꾸준히 할만 하다. 이젠 5키로가 가볍다

역시 너무 바쁜 날을 제외하고 아이들과 매일 하루 한 시간씩 함께 책을 읽고, 읽은 책에 대해 대화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다. 봉쇄가 시작되어 아이들과 24시간을 함께 한 것이 벌써 한 달 반째. 회사 다닐 때는 할 수 없었던 아이들과 함께 책 읽기를 이번 기회를 통해 충분히 해보자 생각했다. 내가 읽는 책은 아이들에게 어려울 수도 있을 텐데, 책에 대한 설명을 아이들은 재미있게 들어주었고 어느새 오늘 북클럽은 언제 하냐며 그 시간을 꽤 즐기게 되었다. 이번 봉쇄 기간 중 가장 큰 뿌듯함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디자인이나 예술관련 서적, 또는 철학 에세이 등을 읽고 큰 아이는 고전 소설을, 둘째는 수준에 맞는 이야기 책을 읽는다.

파친코를 보고 난 후, 나는 공구를 일단 멈췄다. 필요한 설탕이나 식초는 당장 급한 것은 아니니, 영업을 슬슬 다시 시작하고 있는 주변 마트를 기다리기로 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을 돕기로 했다. 시작은 회사 안에 혼자 지내고 있는 사람에게 내 물건을 보내는 것이었다. 그동안 나 먹고살자고 그노무 공구에 정신이 팔려 다른 사람을 생각할 겨를이 없었는데, 잘 지내겠거니 생각했던, 함께 일하는, 시내 작은 아파트 단지에서 혼자 살고 있는 어린 여자 동료의 소식을 우연히 듣게 되었고, 지난 일주일 동안 컵라면으로 겨우 끼니를 해결했다는 기막힌 상황을 듣고 나는 당장 집에 있는 물건들을 싸기 시작했다.


계란, 식빵, 잼, 사과, 망고, 딸기 우유, 두유, 조미김, 김치, 맥주, 스팸, 고구마, 감자, 당근.. 와.. 나 진짜 많이 샀구나. 마트처럼 변한 냉장고와 창고를 보며 나는 스스로 반성했다. 내가 만든 반찬도 두 가지 통에 담아 중국말을 잘하는 다른 회사 동료의 도움으로 부르는 게 값인 퀵을 불러 그 친구에게 물건을 보냈다.

물건을 받은 그녀는 6분이 넘는 언박싱 동영상을 보내며 오픈하는 순간의 감동을 그대로 전해주었다. 너무 고맙다며, 한국에서 애가 타고 있는 엄마에게도 걱정 말라 연락하겠다 말했다. 또 다른 혼자 사는 동료도 생각나 연락을 했고, 그 친구 아파트는 매일같이 확진자가 계속 나오고 있어 아예 배달 자체가 금지되었다 했다. 나는 필요한 물건들을 접수(?) 받고 준비해 둘 테니 배송이 가능해지면 바로 연락 달라고 일러두었다.


그리고 지인에게 물어 유학생에게 물품을 지원하는 모임에 가입했다. 뉴스에 나오듯 유학생들 상황이 매우 좋지 못하다. 이곳 한인회에서 유학생들과 1대 1 매칭을 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퀵으로 보내주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기대 이상으로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학생들에게 필요한 온갖 것을, 온갖 방법을 동원해 보내고 있었다. 이제 앞으로는 공구를 하게 되더라도 나의 필요보다는 그들의 필요에 맞춰 공구를 하게 될 것이다. 물론 그전에 집에 있는 저 많은 물건부터 보내야 하겠지만.


혼자 두 아이를 케어하고 회사 일도 하며 여전히 버거운 현실이라 오지랖이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내 상황이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도움 줄 수 있는 곳에 하자.라고 결정을 하고 나니,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이제야 정신이 차려지는 듯했다.


그래, 정신을 차리자.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남을 돕자. 그리고 아이들을 잘 지키고 열심히 일하자. 그러다 보면 봉쇄도 끝이 날 것이고, 이 시간을 돌이켜 볼 때 분명 의미가 있을 거야. 그렇게 시간을 보내 보자.

내가 나 일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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