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력과 기록 사이

by 박하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프리랜서에게

기억력은 생존 능력이다.

한 가지 일만 하는 것도 아닌데

일하는 요일과 시간까지 들쑥날쑥하다.

정리를 해두지 않으면

예고 없이 걸려오는 전화 한 통에 나는 바로 얼어붙는다.


“그날 가능하시죠?”

…잠시만요.

잠시만요오.


그래서 일정이 생기면 무조건, 즉시,

핸드폰 캘린더에 입력한다.

그마저 놓치면 대략 난감한 상황이 벌어진다.


반백에 가까워지니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기억력은 점점 휘발성이다.

해야 할 일은 늘 많고, 확인하지 않으면 사라진다.

체크리스트가 없으면 나는 매일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이 된다.

그래서 나는 기록을 세 군데에 한다.


첫 번째, 핸드폰.

통화 중 바로 확인해야 하니 필수다.


두 번째, 체크리스트 다이어리.

일주일치를 미리 적고, 전날 다시 쓰고,

당일 생긴 변수와 생각까지 덧붙인다.

일기장은 아니고 거의 ‘업무 작전 본부’에 가깝다.


세 번째, 탁상 달력.

절대 잊으면 안 되는 강의 일정은 눈에 보이게 크게.

세 군데 입력을 마치면 그제야 숨을 쉰다.

오늘도 살아남았다 싶다.


그런데도.

문득 아차! 하는 순간은 꼭 온다.

그때부터 나는 아주 빠른 사람이 된다.

다행히 하루 전에만 알아도 대부분은 수습이 가능하다.

그러니 아직 괜찮다. 아직 인간이다.


오늘도 그랬다.

전혀 다른 두 가지 일을 처리하느라

주말을 통째로 반납했다.

8년째 하고 있는 놀이수업,

4시간짜리 PPT를 새로 구성하려니 숨이 차오른다.

작년과 달라야 하고, 재미있어야 하고,

현장에서 바로 써먹을 수 있어야 한다.

컴퓨터, 탭, 핸드폰이 동시에 켜지고

나는 기계 사이를 떠도는 사람이 된다.

강의 준비 끝.


바로 방송 대본 작성.

전송 완료.

“끝났다!”

나는 만세를 불렀다.


이제 책 좀 읽어야지하며 책에 푹 빠져있는데

시계를 보니 11시 30분.


보내야 할 강의 계획서가 남아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리고 별별챌린지 마감까지 30분.

기억을 해도 해도 끝이 없고

기록을 해도 보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나는 오늘도

기억력과 기록 사이에서 허우적거린다.


데드라인이라는 파도에 떠밀리지 않기 위해.

그래도 뭐, 30분 전에 생각났으니까.

오늘은 세이프다.

아슬아슬하게, 또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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