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보를 걷는 방법

by 박하

운동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 문장을 쓰는 데 단 1초도 걸리지 않는다.

핑계도, 변명도 필요 없다.

나는 몸을 움직이는 일과 좀처럼 친해지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아주 손을 놓고 사는 건 아니다.

내게도 단 하나의 방식이 있다.

여행을 핑계로 걷는 것.


남편의 고향, 밀양에서 고등학교 동창 부부 모임이 있던 날,

저녁 약속은 여섯 시였지만 나는 아침부터 부산을 떨었다.

이왕 가는 거 일찍 가서 한 바퀴 돌자고.

엄마 운동도 할겸 함께 하자고...

큰아들은 왜 그래야 하느냐며 소파에 붙박였고,

남편은 오전 라이딩 계획이 어그러졌다며 못마땅한 얼굴이었다.

그 사이에서 둘째는 눈치만 보았다.


하지만 이럴 땐 밀어붙이는 사람이 이긴다.

나만의 스킬로

결국 남자 셋을 현관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다.


연휴 첫날이라 고속도로는 한산했고,

무료 통행이라 출발 전부터 이미 작은 선물처럼 느껴졌다.

차 안의 공기는 무거웠지만, 내 마음만은 소풍날 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가장 먼저 향한 곳은 달팽이처럼 몸을 틀어 올린 전망대와 잔도길.

초입부터 우리는 겉옷을 벗어야 했다.

겨울 끝이라 생각했는데, 햇살은 완연히 봄이었다.

둘째는 반팔 차림으로 앞서갔고,

큰아들의 표정은 끌려 나온 짐승처럼 억울해 보였다.

그래도 걷다 보면 풀릴 걸 알기에

나는 모른 척 경치 이야기를 꺼냈다.


남편과는 오랜만에 둘만 들을 수 있는 속도로 말을 나눴다.

아이들 얘기, 집안 얘기, 별것 아닌 농담.

평소라면 흘려보냈을 말들이

걸음에 맞춰 천천히 마음에 내려앉았다.


전망대에 오르니 바람은 부드러웠고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풍경을 담고 있었다.

사진을 찍거나, 숨을 고르거나,

혹은 아무 말 없이 먼 산을 바라보거나.

이제 내려가려는데 아이들이 보이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려는 순간,

달콤한 음료를 입에 문 채 웃으며 나타났다.

엄마 아빠도 더우니 마시라며 음료를 내민다.

- 우와 엄마 아빠를 위해 용돈으로 샀어?

- 아니 아빠카드 ㅎㅎ

그말에 우리가족은 한바탕 웃는다.

그러고는 언제 투덜거렸냐는 얼굴로

잔도길도 같이 가 주겠다고.

역시 사람의 기분은 당으로 움직인다.


절벽을 따라 난 길은 생각보다 아찔했고

발아래로 펼쳐지는 풍경은 잠시 외국에 온 듯했다.

아이들도 어느새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억지로 나선 길이었지만,

결국 기억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차에 돌아오니 공기가 후끈했다.

2월인데도 에어컨을 켜야 할 만큼.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니었다.

투어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나는 아이들에게 PC방 이용권이라는 비장의 카드를 꺼냈고,

임무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남편과 둘만 남은 거리.

우리는 밀양 아리랑시장을 천천히 지나

밀양 관아를 들렀다가

성을 따라 걷다 보니

어느새 영남루 아래까지 내려와 있었다.

해는 기울고, 그림자는 길어지고,

시계를 보니

9,800보.


아침에 운동겸 나들이가자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행한 하루였다.

그래, 했다.

아주 근사한 방식으로.


나는 여행 속 걷기를 사랑한다.

목적지가 있으니 덜 힘들고,

풍경이 있으니 덜 지루하다.

무엇보다 함께한 사람들이 있어

걸음마다 이야기가 쌓인다.

매일이 여행이라면 매일 운동을 할 텐데.

현실은 그렇지 않으니

다음 기회를 또 노려야 한다.


그러니 얘들아,

다음에 엄마가 어디 가자고 하면

못 이긴 척이라도 같이 나서 주라.

너희들도 엄마가 운동하길 바라잖아

그리고

결국 우리 모두 웃게 될거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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