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정보육을 할까봐 두렵다
4월 5일. 첫째의 초등학교에 공지가 떴다.
'최근 코로나19 확진자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따라 새로운 거리 두기 단계가 시행되면 1학년도 온라인 수업이 시작됩니다.'
그날부터 매일같이 확진자 수를 살폈다.
공지가 뜬 4월 5일은 확진자 477명. 4월 6일은 668명, 7일은 700명, 8일은 671명. 숫자가 심상치 않다.
3차 대유행이 시작되던 작년 11월과 비슷하다.
TV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4차 대유행의 문턱'이라고 경고했다. 기사를 확인하고 TV를 시청하는 나의 마음은 타들어간다.
'이러다... 가정 보육 또 하게 되는 거 아냐?!'
가정 보육을 생각하자마자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떠올랐다.
유튜브 주 1회 업로드,
블로그 주 2~3회 포스팅
브런치 주 1회 발행
그 외로도 독서와 인스타그램, 쿠팡파트너스도 하고 있다.
내가 가까스로 지키며 하는 행위들이다. 가정 보육으로 몇 번이나 중단되었던가.
중단되는 거까진 그렇다 치자. 무엇보다 괴로웠던 건 끊긴 흐름을 다시 부여잡는 과정이었다. 마치 무너진 벽돌집을 하나하나 다시 쌓아나가는 기분이랄까.
육아와 살림을 하며 자아를 지켜내는 건 쉽지 않다. 육아에 변수가 많을수록 엄마의 시간은 날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특히 코로나 시대엔 더욱더.
첫 번째 가정 보육 때는 악착같이 새벽에 일어나 글을 썼더라도 둘째가 깨거나 아파 못한 날이 많았다.
두 번째 가정 보육 때는 어떻게든 해내려 하다 보니 예민해졌고 아이들에게 번번이 신경질을 냈다.
세 번째 가정 보육 때는 모든 걸 놔버리고 아이들에게 집중했으나 내 안은 곪아갔다.
그럴수록 맹목적으로 살아가던 예전이 떠올랐으나 돌아갈 수 없다는 걸 나는 누구보다 잘 안다.
맹목적으로 살아가던 때보다, 아등바등하더라도 무언가에 몰입하고 성취해나가는 시간이 엄마인 나를 지탱해 준다는 걸 근 4년 동안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도 여전히)
그래서 이 모든 게 가정 보육으로 다시 위태로워질까 봐 벌써부터 심란하다.
엄마들은 대개 이렇다. 무언갈 시도해도 아이 일로 엎어지고 중단되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하물며 아이로 인해 일을 그만두는 엄마도 있다.(내가 그랬다)
아이들을 키울수록 많은 욕심과 과한 목표는 상처가 된다는 걸 매번 깨닫는다. 그래서 욕심을 최소한으로 덜어내지만 그마저 못하는 날엔 마음이 산산조각 난다.
코로나라는 위태로운 환경과 엄마라는 역할 안에서 나를 지키기 위해 나는 더 강해져야만 했다. 어떻게든 시간을 내야 했고, 중단돼도 주섬주섬 일어나 걸어야 했다.
그럴 때마다 엄마의 과다한 몫들이 싫었다.
엄마는 원래 강하지 않다. 엄마가 되어 맞닥뜨리는 풍파를 맞으며 억척스러워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대체 얼마나 더 강해지고 억척스러워져야 하는 걸까.
엄마의 과다한 몫들 속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해 대체 얼마나 더 굳세져야 하는 걸까.
지금보다 얼마나 더 담대해져야만 이 난관을 덤덤히 견딜 수 있는 걸까.
이 시간에도 삶의 근거를 찾기 위해 달려가는 엄마들이 있다.
아이들이 잠든 밤 노트북 앞에 앉아 책 읽는 엄마,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나 글 쓰는 엄마, 새벽 6시에 독서 모임을 하는 엄마, 아기가 낮잠 잘 때 악착같이 강의 들으며 공부하는 엄마. 출퇴근하며 영어 공부하는 엄마.
이것이 치열하게 살아가는 엄마들의 풍경이다. 그녀들은 하나같이 절실하다. 그녀들의 간절함을 보고 있노라면 정신이 번쩍 든다.
엄마라는 과중한 역할과 코로나라는 위태로움 속에서도 엄마들이 절실하고도 간절하게 무언갈 해내려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엄마라는 갑갑함에서 벗어나고 싶고, 뭐라도 삶의 근거를 찾기 위해서다.
그렇게 엄마들은 오늘도 분투한다. 나를 지키기 위해. 코로나 시국에 더욱 악착같이.
나는 왜 공부하는가, 무엇을 얻으려고 하는가, 남들처럼 무슨 학위 따고 연구자의 길을 갈 것도 아닌데....그냥 나의 갑갑함이겠지. 뭐라도 삶의 근거, 희망 나부랭이를 찾고 싶은
- 은유 「올드걸의 시집」 p. 233